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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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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事亦奇
柳先生曰
少恩하여 生男女 必貨視之
自毁齒已上 父兄鬻賣하여 以覬其利하고 不足이면 則盜取他室하여 束縛鉗梏之하고
至有鬚鬣者 力不勝이면 皆屈爲僮하니 當道相賊殺以爲俗이라
幸得壯大 則縛取幺弱者
漢官因爲己利하여 苟得僮 恣所爲不問하니
以是越中戶口滋耗
少得自脫하되 惟童區寄以十一歲勝하니 斯亦奇矣
從事杜周士爲余言之하니라
童寄者 郴州蕘牧兒也
行牧且蕘러니 二豪賊劫持反接하고 布囊其口하여 去逾四十里之賣之
寄僞兒啼하고 恐慄爲兒恒狀하니 賊易之하여 對飮酒醉
一人去爲市하고 一人臥할새 植刃道上이어늘
童微伺其睡하여 以縛背刃하고 力下上하여 得絶하니
因取刃殺之하니라
逃未及遠 市者還하여 得童大駭하고 將殺童이어늘
遽曰
爲兩郞僮 孰若爲一郞僮耶
彼不我恩也
郞誠見完與恩하면 無所不可라하니
市者良久計
曰 與其殺是僮으론 孰若賣之 與其賣而分으론 孰若吾得專焉이리오
幸而殺彼하니 甚善이로다하고
卽藏其尸하니라 持童抵主人所하여 愈束縛牢甚이어늘
夜半 童自轉하여 以縛卽爐火燒絶之하되
雖瘡手勿憚하니라
復取刃殺市者하고 因大號하니 一虛皆驚이라
童曰
我區氏兒也 不當爲僮이라
賊二人得我어늘 我幸皆殺之矣로라
願以聞於官하라하니라
虛吏白州하고 州白할새 大府召視하니 兒幼愿耳
奇之하여 留爲小吏 不肯하니 與衣裳하여 吏護還之鄕하니라
鄕之行劫縛者 側目莫敢過其門하고 皆曰 是兒少二歲로되 而討殺二豪하니 豈可近耶아하니라


17. 구기區寄라는 아이에 관한 전기
사적 또한 기특하다.
유선생柳先生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방 사람들은 인정이 야박하여 아들딸을 낳으면 반드시 그들을 돈으로 여긴다.
이를 갈 나이가 지나면 부형父兄이 자기 자식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그래도 양이 차지 않으면 남의 집에서 아이를 잡아다가 포박하고 칼과 수갑을 채운다.
심지어 수염이 난 성인成人도 힘이 모자라면 모두 그들에게 굴복하여 종이 되는데, 길을 가로막고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풍속이 되었다.
아이가 다행히 몸집이 크면 놓아두고 어리고 약한 자를 묶어 데려간다.
한족漢族 관리는 이를 이용해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기회로 삼아 만약 종을 수중에 넣게 되면 그들의 행위를 그대로 보아 넘기고 따져 묻지 않는다.
이로 인해 지방의 호구가 자꾸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강탈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경우가 드문데 오직 구기區寄라는 아이는 열한 살의 나이로 그들을 이겨냈으니, 이 또한 기특한 일이다.
이는 계부종사桂部從事 두주사杜周士가 나에게 말해준 내용이다.
구기區寄침주郴州에서 나무하고 소를 치는 아이였다.
한창 소에게 풀을 뜯어먹게 하고 한편으로는 나무를 하고 있는데, 두 명의 강도强盜가 위협을 가해 손을 뒤로 묶고 천으로 입을 감싸 막고는 40리가 넘는 저자로 팔러 갔다.
구기區寄가 거짓으로 어린애처럼 훌쩍거리고 보통 아이들처럼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시늉을 하자, 강도들이 그를 쉽게 보고 마주앉아 술을 마셔 취하였다.
그런 다음 강도 한 명은 값을 흥정하러 시장에 갔고 다른 한 명은 바닥에 누워 있는데, 칼은 길 위에 꽂아둔 상태였다.
구기區寄는 조심조심 그가 잠이 든 것을 살펴가면서 〈칼이 있는 곳에서〉 뒤로 돌아 손을 묶은 줄을 칼날에 대고 위아래로 힘껏 비벼대 줄을 끊었다.
그리고는 칼을 잡아 그를 찔러 죽였다.
그리고 나서 도망쳤으나 미처 멀리 가기 전에 값을 흥정하러 갔던 자가 돌아와 다시 구기區寄를 잡고 자기 동료가 피살된 것에 크게 놀라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구기區寄가 다급하게 말하였다.
“두 아저씨의 종이 되는 것보다는 한 아저씨의 종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은 나를 잘 대해주지 않았습니다.
아저씨가 정말 나를 잘 대해주신다면 무슨 말이든 잘 듣겠습니다.”
그 사람이 한참동안 생각하였다.
‘이 종을 죽여버리는 것보다는 파는 것이 오히려 낫고, 팔아서 이익을 둘로 나누는 것보다는 나 혼자 차지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다행히 저자를 죽였으니 이것도 잘된 일이다.’
즉시 그 시체를 숨기고는 아이를 데리고 그를 사들일 주인이 있는 곳으로 가서는 더욱 단단히 묶어놓았다.
밤이 깊어지자 아이는 몸을 굴려 포승을 화롯불에 가까이 닿게 하여 태워 끊었다.
손이 화상火傷을 입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다음 다시 칼을 잡아 그자를 찔러 죽이고 크게 소리치자 온 저자 사람들이 다 놀랐다.
아이가 말하였다.
“나는 구씨區氏 집 아들로 남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강도强盜 두 사람이 나를 잡아왔으나 내가 다행히 이들을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려주십시오.”
저자를 관리하는 관리가 에 고하고 에서 상부에 고하였는데 상부에서 불러 보니, 아이가 어린데도 성실하였다.
자사刺史 안증顔証이 기특하게 여겨 그곳에 남겨두고 하급관리로 삼으려 하였으나 아이가 원하지 않자, 의복衣服을 줘서 입히고 관리가 보호하여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고향에서 남의 자식을 납치해 가는 강도들이 곁눈질하며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가지 못하면서 모두 하는 말이 “이 아이는 진무양秦武陽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도 두 명의 포악한 자를 공격하여 죽였으니, 어찌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역주
역주1 童區寄傳 : 元和 4년(809)에 永州에서 지었으며 이때 작자의 나이는 37세였다. 區는 성이고, 寄는 이름이다. 이 작품은 이때 永州에 와 있던 桂管觀察使 從事官 杜周士가 하는 말을 듣고 쓴 것으로, 지금의 廣西 지역인 桂管의 관내 郴州에 사는 區寄라는 아이가 자기를 납치하여 팔아먹으려고 한 강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지를 발휘하여 강도를 죽이고 탈출한 일화이다. 杜周士(?~822)는 京兆 사람으로, 德宗 貞元 17년(801)에 進士에 급제하였다. 穆宗(821~824) 초기에 監察御史를 지냈다.
역주2 越人 : 湖廣, 곧 湖北省과 湖南省 일대의 소수민족을 가리킨다.
역주3 桂部 : 桂管觀察使 衙門을 가리킨다. 관할지역은 지금의 廣西 동북 지역이다.
역주4 虛所 : 저자가 있는 곳이란 뜻이다. 南越 지방에서는 물건을 교역하는 저자를 虛라고 부른다.
역주5 大府 : 州의 상급기관으로, 觀察使 衙門을 가리킨다.
역주6 刺史顔証 : 刺史는 관명으로, 唐나라 때 州의 행정장관이다. 여기서는 桂州刺史를 가리키는데, 이때 顔証이 桂管觀察使 兼桂州刺史로 있었다. 顔証은 顔杲卿의 손자로, 德宗 貞元 20년(804)부터 元和 3년(808)까지 재임하였다.
역주7 秦武陽 : 13세 때 사람을 죽인 戰國 때 燕나라의 勇士이다. 燕 太子 丹이 荊軻를 시켜 秦나라로 들어가 秦王을 저격하게 할 적에 그를 수행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여 荊軻와 함께 피살되었다. 武陽은 舞陽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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