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天寶)[開元]年에 有以諂諛至相位하고 賢臣放退라
若公之死는 志匡王國하고 氣震姦佞하여 動獲其所하니 斯蓋得其死者歟인저
公之德之才 洽於傳聞하되 卒以不試하고 而獨申其節이나
而存不及興王之用하고 沒不遭聖人之歎하니 誠立志者之所悼也라
격조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수준에 들지 못하나 풍격과 운치는 힘이 있다.
당唐의 곧은 신하 여남汝南 주씨周氏는 이름이 아무개요, 자가 아무개이다.
정원貞元 12년에 유종원柳宗元이 그 무덤 좌측에 묘비를 세웠다.
천보天寶 연간에 어떤 자가 아첨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어진 신하는 내몰렸다.
공은 어사御史로 있으면서 과감하게 이 일에 대해 항의했다가 궁궐 뜰에서 죽으니, 사관史官이 이를 기록했다.
공이 죽고 나서야 아첨하는 자가 비로소 공론을 두려워했다.
아, 예로부터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공의 죽음 같은 경우는 그 의지가 왕과 나라를 바로잡고 그 기개가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떨게 하여 곧장 기대했던 효과를 거두었으니, 이는 죽어야 할 때 죽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공의 덕행과 재능은 온 세상에 자자했으나 끝내 시험해보지 못하고 단지 그 절의만 세웠다.
그러나 능히 유구한 역사에서 그 유래를 보기 드물게 우뚝 일어나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만약 공이 노魯나라 정공定公과 애공哀公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공자孔子도 “나는 강직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진秦ㆍ초楚 이후에 태어났더라면 한漢 고조高祖가 “어떻게 용사를 얻을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서는 왕업王業을 일으킬 수 있게 등용되지 못하고 죽어서는 성인聖人의 감탄을 받지 못했으니, 참으로 뜻있는 사람이 애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