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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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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不如前書 而中所自爲嗚咽涕洟略相似 故倂錄之
月日 宗元再拜하고 獻書하노이다
胡要返命 奉敎誨하니 壯厲感發하고 鋪陳廣大
上言推延賢雋之道 難於今之世하고 次及文章하고 末以愚蒙 하여 無以守宗族復田畝爲念하니 憂憫備極이라
不惟其親密故舊是與 復有公言顯賞하고 許其素尙하여 而激其忠誠者하니
用是踊躍敬懼 類嚮時所被簡牘 萬萬有加焉이라
故敢悉其愚하여 以獻左右
大凡薦擧之道 古人之所謂難者 其難非苟一而已也 知之難하고 言之難하고 聽信之難이라
夫人有有之而恥言之者하고 有有之而樂言之者하고 有無之而工言之者하고 有無之而不言似有之者
有之而恥言之者 上也
下斯而言知而不失者 妄矣
有之而言之者 次也
하고 하니 是皆終日號鳴大吒이라도 而卒莫之省이라
無之而工言者 賊也
今之若此類者 不乏於世하니 將相大臣 聞其言而必能辨之者 亦妄矣
無之而不言者 土木類也
近世尤好此類하여 以爲長者라하여 最得薦寵이라
夫言 其於田野鄕閭爲匹夫하여 雖稱爲長者可也어니와
自抱關擊柝以往이면 則必敬其事하고 愈上則及物者愈大리니 何事無用之朴哉리오
今之言曰 某子長者 可以爲大官이라하나니 類非古之所謂長者也 則必土木而已矣
夫捧土揭木而致之巖廊之上하여 蒙以하고 翼以徒隷하여 趨走其左右하니 豈有補於萬民之勞苦哉리오
故曰知之難이라
彼未吾信하되 而吾告之以士 必有三間이라
是將曰 彼誠知士歟
知文歟아하여 疑之而未重 一間也 又曰 彼無乃私好歟
交以利歟 二間也 又曰 彼不足我而惎我哉
玆咈吾事 三間也
畏是而不言이라 故曰言之難이요 言而有是患이라 故曰聽信之難이라
唯明者라야 爲能得其所以薦하고 得其所以言하며 得其所以聽이니 一不至則不可冀矣
然而君子不以言聽之難而不務取士하니
理之本也
苟有司之不吾信이라도 吾知之不捨 其必有信吾者矣리라
苟知之 雖無有司라도 而士可以顯이니 則吾一旦操用人之柄이면 其必有施矣
故公卿之大任 莫若索士
士不預備而熟講之라가 卒然君有問焉하고 宰相有咨焉하고 有司有求焉 其無所以應之 則大臣之道或闕이라 故不可憚煩이니라
今之世言士者 先文章이나 文章 士之末也
然立言存乎其中하니 卽末而操其本이면 可十七八이라 未易忽也
自古文士之多莫如今하니
今之後生爲文 希屈馬者 可得數人이요 希王褒劉向之徒者 又可得十人이요 至陸機潘岳之比 累累相望
若皆爲之不已 則文章之大盛 古未有也 後代乃可知之리라
今之俗耳庸目 無所取信이요 傑然特異者 乃見此耳
丈人以文律通流當世하고 하여 天下號爲文章家
하니 敬之 希屈馬者之一也
天下方理平하니 今之文士咸能先理로되 理不一일새 斷於古書老生하고 直趣堯舜大道하여 孔氏之志 明而出之하니 又古之所難有也
然則文章未必爲士之末이요 獨采取何如耳
宗元自小學爲文章이라가 하고하여 專百官章奏
然未能究知爲文之道 自貶官來無事 讀百家書하여 上下馳騁하여 乃少得知文章利病이라
美其齒少 才氣壯健하여 可以興西漢之文章일새
日與之言하고 因爲之出數十篇書하니 庶幾鏗鏘陶冶하여 時時得見古人情狀이라
然彼古人亦人耳 夫何遠哉리오
凡人可以言古 不可以言今이니
誠使博如莊周하고 哀如屈原하고 奧如孟軻하고 壯如李斯하고 峻如馬遷하고 富如相如하고 明如賈誼하고 專如揚雄이라도 猶爲今之人이면 則世之高者至少矣리니
由此觀之컨대 古之人未必不薄於當世而榮於後世也
若吳子之文 非丈人無以知之
獨恐世人之才高者 不肯久學하여 無以盡訓詁風雅之道하여 以爲一世甚盛이라
若宗元者 才力缺敗하여 不能遠騁高厲하여摩九霄하고 撫四海하여 夸耀於後之人矣 何也
凡爲文 以神志爲主어늘 自遭責逐하고 繼以 荒亂耗竭하고 又常積憂恐하여 神志少矣
所讀書隨又遺忘이라
一二年來 痞氣尤甚하고 加以衆疾하여 動作不常이라
眊眊然騷擾內生하여 霾霧塡擁慘沮하니 雖有意窮文章而病奪其志矣
每聞人大言이면 則蹶氣震怖하여 撫心按膽하되 不能自止
又永州多火災하여 五年之間 四爲大火所迫하여 徒跣走出하여 壞牆穴牖하여 僅免燔灼하고 書籍散亂毁裂하여 不知所往이라
一遇火恐 累日茫洋하여 不能出言하니 又安能盡意於筆硯하여 矻矻自苦하여 以傷危敗之魂哉리오
中心之悃愊鬱結 具載所獻許京兆丈人書하니 不能重煩於陳列이라
凡人之黜棄 皆望望思得效用이나 而宗元獨以無有是念하니
自以罪大不可解 才質無所入이라
苟焉以敍憂慄爲幸이니 敢有他志리오
伏以先君稟孝德하고 秉直道하여 高於天下하고 이라
宗元 亦嘗再登朝하여 至六品矣 何以堪此리오
且柳氏號爲大族이나 以來 無爲朝士者하니 豈愚蒙獨出數百人右哉리오
以是自忖컨대 官已過矣 寵已厚矣
夫知足與知止異 宗元知足矣 若便止不受祿位 亦所未能일새
今復得好官이면 猶不辭讓하리니
何也 以人望人이면 尙足自進이라
如其不至 則故無憾하여 進取之志息矣리라
身世孑然하여 無可以爲家하니 雖甚崇寵之라도 孰與爲榮이리오
獨恨不幸하여 寡居十餘年이라
하고 至今無以託嗣續하니 恨痛常在心目이라
今之汲汲於世者 唯懼此而已矣
天若不棄先君之德하여 使有世嗣하고 或者猶望延壽命하여 以及大宥하여 得歸鄕閭立家室이면 則子道畢矣
過是而猶競於寵利者 天厭之
리라
丈人旦夕歸朝廷하여 復爲大僚하리니 伏惟以此爲念하라
流涕頓顙하여 布之座右하니 不勝感激之至로라


03. 경조윤京兆尹 양빙楊憑에게 보낸 편지
문장구성이 앞의 편지보다는 못하지만, 중간에 스스로 자기의 열악한 처지에 느꺼워 목이 메이고 눈물을 흘리는 진솔한 모습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이 작품도 함께 초록하였다.
모월 모일에 종원宗元은 재배하고 장인丈人어른께 이 글을 올립니다.
심부름 보냈던 호요胡要복명復命함으로 인해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받들어 읽어보니, 힘차고 격앙된 어조가 감동스러웠고 전개하신 범위가 광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현자나 유능한 사람을 추천하고 영접하는 도리를 지금 세상에 펴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고, 다음에는 문장에 관해 언급하셨으며, 끝으로 어리석고 우매한 제가 벌을 받아 쫓겨나고 몸이 쇠약해져 친족을 지키지 못하고 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임을 염려해주시어 걱정과 연민이 한량없었습니다.
친밀한 옛 벗처럼 대해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정한 마음으로 높이 칭찬해주시면서 소박한 지조를 인정하여 충성심이 일어나게 하신 점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뛸 듯이 기쁘고 존경심과 두려운 마음이 교차하는 정도가 지난날 서찰을 받았을 때에 비해 훨씬 더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저의 우매한 소견을 토로하여 장인어른께 올릴까 합니다.
대체로 인재를 천거하는 일을 옛사람이 어렵다고 한 것은 그 어려운 문제가 사실 하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인재를 알기가 어렵고 인재를 인재라고 말하기가 어렵고 인재라고 하는 말을 받아들여 믿기가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중에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있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가 있고, 재능이 있으면서 재능이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고, 재능이 없으면서도 재능이 있는 것처럼 말을 잘하는 자가 있고, 재능이 없으면서 말을 하지 않아 마치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가 있습니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있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가 으뜸가는 인물입니다.
비록 임금이라도 인재를 알아보기 어려웠고 공자孔子 또한 자우子羽로 인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들 성인聖人보다 지혜가 낮으면서도 인재를 알아보고 놓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헛소리입니다.
재능이 있으면서 있다고 말하는 자는 그 다음가는 인물입니다.
덕이 높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같은 자도 풍연馮衍을 등용하지 못하였고, 재능이 뛰어난 왕경략王景略 같은 자도 윤위尹緯영사令史로 삼았으니, 이들은 모두 풍연馮衍윤위尹緯가 온종일 큰소리로 울어대고 한탄하더라도 끝내 살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재능이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말을 잘하는 자는 해로운 적입니다.
이 경우는 조괄趙括염파廉頗를 대신하고, 마속馬謖공명孔明을 혼란스럽게 했던 일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현재 이와 유사한 자들이 세상에 적지 않은데 장수나 재상 등 대신大臣이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반드시 재능의 유무를 가려낼 수 있다고 하는 자 또한 헛소리입니다.
지닌 재능이 없으면서 없다고 말을 하지 않는 자는 흙덩이나 나무둥치 같은 부류입니다.
이 경우는 주인周仁이 선대의 중신重臣이라 하여 2,000석의 녹을 받았고 허정許靖이 사람들의 칭찬으로 삼공三公 벼슬을 지냈던 일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근세에는 이런 부류를 특히 좋아하여 장자長者(덕이 높고 도량이 넓은 자)로 여겨서 천거와 총애를 받기가 가장 쉽습니다.
대체로 질박하고 우둔하여 별다른 병통이 없는 자는 그가 농촌 마을에서 필부로 있을 경우에는 비록 장자長者라 칭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일단 관문을 지키거나 딱따기를 치며 야경을 도는 말단관리라도 되면 반드시 그가 맡은 직무를 철저히 수행할 것이고, 지위가 더 올라가면 사물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더 클 것이니, 그 질박한 자를 쓰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아무개는 장자長者라서 큰 관리로 쓸 수 있다.”고 말하니, 이는 대부분 옛사람이 말하는 장자長者가 아니고 분명히 흙덩이나 나무둥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흙덩이를 떠받들고 나무둥치를 들어 올려 조정 위에 앉혀놓고서, 관복官服을 입히고 하인을 붙여주어 그의 곁에서 굽실대며 시중들게 하고 있으니, 이들이 어찌 만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성인聖人의 도가 세상에 쓰여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재를 알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한 자는 말을 신중히 한다고 말했고, 맹자孟子는 속마음이 서로 다른데도 말하는 것을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훌륭한 선비가 있다고 고하면 반드시 세 가지 간극이 있기 마련입니다.
상대방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저자가 진정 인재를 알까?
그리고 글을 알까?’라고 의심하고 중시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간극이고, 또 ‘저자가 혹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서로 이익을 꾀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간극이고, 또 ‘그가 나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아 나를 해롭게 하지는 않을까?
내 일을 거스르지는 않을까?’라고 하는 것이 세 번째 간극입니다.
이렇게 될까 두려워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말을 하더라도 이와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믿어주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직 밝은 사람만이 제대로 천거할 수 있고 제대로 말할 수 있고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 가운데 하나라도 완전하지 못한다면 인재가 쓰이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군자君子는 말을 하고 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여 인재를 취하는 일을 힘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재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가령 유사有司가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인재를 알아보고 버리지 않는다면 장래에 반드시 나를 믿어줄 자가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내가 인재를 알면 비록 유사有司가 없더라도 장차 그를 세상에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내가 어느 날 사람을 등용하는 권력을 잡으면 반드시 그 뜻을 펴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경公卿의 큰 책무가 인재를 찾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인재에 대해 미리 준비하고 강구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임금이 물어보거나 재상이 알아보거나 유사有司가 구하는 일이 있을 때 부응해주지 못한다면 대신大臣의 도리를 못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인재를 알아보는 일을 망설이면 안 됩니다.
지금 세상에 선비에 대해 말하는 자는 그의 문장文章을 먼저 거론하지만 문장이란 선비의 지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견해나 주장을 제기한 것은 그 문장 속에 담겨 있으므로 지엽으로 들어가 그 뿌리를 파악해보면 십중칠팔은 알 수 있으니,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문인文人의 숫자가 지금처럼 많은 적이 없습니다.
현재 젊은 사람으로 문장을 쓰는 부류 가운데 굴원屈原사마천司馬遷의 수준을 목표로 삼은 자가 몇 사람이 있고, 왕포王褒유향劉向을 목표로 삼은 자가 또 열 사람이 있으며, 육기陸機반악潘岳과 견줄 만한 수준에 이른 자는 수두룩합니다.
만약 이들이 멈추지 않고 저작활동을 계속한다면 문장이 크게 성황을 이루어 옛날에도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앞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현재 평범한 안목을 지닌 자들은 제 말을 믿지 못할 것이고, 특출한 사람은 이 점을 알 것입니다.
장인어른께서는 문장과 작품으로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두 아우까지 문단에 합류하여 천하 사람이 모두 문장 집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제 또 경지敬之가 나왔으니 경지敬之굴원屈原사마천司馬遷을 목표로 삼은 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천하가 한창 태평과 안정을 추구하므로 현재의 문인들이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우선시하고 있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이 하나가 아니므로 옛 서적과 늙은 학자에게서 최상의 결론을 구하고 곧장 의 큰 길로 달려가 공자孔子의 뜻을 밝혀 표출하니, 이 또한 옛날에 없던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문장은 반드시 선비의 지엽적인 부분이 아니고 다만 무엇을 취택하여 다룰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종원宗元은 어릴 적부터 문장 쓰는 법을 배우다가 중간에 다행히 갑과甲科을과乙科의 과거시험에 잇달아 급제하고 상서랑尙書郞에 이르러 조정 백관의 장주章奏를 전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작문作文하는 법을 깊이 알지 못하다가 폄적貶謫된 이후 일이 없어 한가할 적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을 읽으면서 고금의 시대를 오르내리며 종횡무진 섭렵한 끝에 마침내 문장의 좋고 나쁜 것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해에 오무릉吳武陵이 오자 그가 어린 나이에 재능과 기백이 왕성하여 서한西漢의 문장을 일으킬 만한 것이 가상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아울러 수십 편의 작품을 써내다 보니, 그런대로 문장이 유창하게 다듬어져 가끔 옛사람의 정황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옛사람 또한 사람이니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옛사람에 대해서는 말하고, 지금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환담桓譚 또한 말하기를 “직접 양자운揚子雲을 보았을 때 그 용모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 정도가 못 되었으니, 사람들이 어찌 그의 저서를 후세에 전하려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의 문장이 장주莊周처럼 박식하고, 굴원屈原처럼 애처롭고, 맹가孟軻처럼 심오하고, 이사李斯처럼 웅장하고, 사마천司馬遷처럼 가파르고, 사마상여司馬相如처럼 넉넉하고, 가의賈誼처럼 통명하고, 양웅揚雄처럼 전일하더라도 그가 현대의 인물이라면 세상에서 그를 존경하는 자가 극히 적을 것입니다.
이로 살펴보건대 옛사람은 반드시 당대에는 푸대접을 받지만 후세에 영광을 누리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오무릉吳武陵의 문장의 경우는 장인어른이 아니면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염려되는 것은 세상에 재주가 높은 자들이 오랫동안 배우려고 하지 않음으로 인해, 옛 경전에 담긴 도리를 완전히 이해하여 한 시대의 융성한 문화를 조성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종원宗元과 같은 자는 재능과 역량이 부족하여 멀리 달리고 높이 날아 제생諸生들과 하늘로 올라가고 바다로 들어가 후대인들에게 과시할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대체로 문장 짓는 일은 정신과 의지를 기본으로 삼는데 조정에서 문책을 받아 축출되고 잇달아 큰일을 겪은 뒤로 정신이 어지럽고 소모되었으며, 또 평소에 근심과 두려움이 쌓이다 보니 정신과 의지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읽은 글을 금방 또 잊어버립니다.
한두 해 전부터는 비질痞疾(뱃속이 더부룩한 증세) 기운이 더 심해지고 게다가 각종 질병이 겹쳐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몽롱하고 어수선한 기운이 내면에서 일어나 뿌연 안개가 가슴을 메우고 있어 의기가 소침하니, 문장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질병이 제 심지心志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매번 남의 거창한 담론談論을 들을 적에는 기세가 꺾여 놀라고 두려워서 심장을 달래고 간담을 다독여보지만 그 현상을 스스로 멈출 수 없습니다.
영주永州에 화재가 많이 일어나 5년 사이에 네 번이나 큰 불길에 쫓겨 맨발로 달려 나오면서 담을 허물어뜨리고 창문을 박차고 빠져나와 가까스로 불에 타죽는 화를 면하였으며, 서적은 모두 흩어지고 훼손되어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한 번 화재를 만나 공포에 떨게 되면 며칠 동안 정신이 아련해져 말조차 하지 못하니, 또 어찌 문필文筆에 전념하여 부단히 자신을 괴롭힘으로써 위태롭고 망가진 영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가슴속의 충정과 응어리진 번민은 모두 허경조許京兆(경조윤京兆尹 허맹용許孟容) 어른께 올린 편지에 실었으므로 다시 번거롭게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파직罷職되어 버려지면 모두 다시 조정을 위해 힘쓸 기회가 있기를 희망하지만 저 종원宗元만은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범한 죄가 커서 벗어날 수 없고 재능과 자질이 남들의 중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근심걱정과 두려운 심정을 서술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니, 감히 무슨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제 선친先親께서는 효성孝誠의 미덕을 부여받고 바른 도를 견지하여 명성이 천하에 높았으며,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두 번 조정에 올라 관직의 품계가 6품에 이르렀습니다.
종원宗元은 선친과 같은 자질이 없는데도 일찍이 재차 조정에 올라 6품직에 이르렀으니, 이 부담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유씨柳氏대족大族으로 불리지만 5, 6촌 친족 말고는 조정의 관원이 된 자가 없는데, 어찌 우매한 제가 유별나게 수백 명의 윗자리로 올라서겠습니까.
이로 헤아려보면 제 벼슬이 이미 지나치고 총애가 이미 후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만족할 줄 아는 것과 그칠 줄 아는 것은 서로 다르니, 종원宗元은 만족할 줄은 알지만 이대로 멈추고 녹위祿位를 받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다시 좋은 관직을 얻는다면 오히려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반인의 수준에 입각하여 저를 다른 사람과 견주어볼 때 그래도 충분히 앞으로 더 진보할 만한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도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이전처럼 유감을 갖지 않고 진취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제 신세는 고단하여 가정을 제대로 꾸릴 수 없으니 비록 매우 존귀尊貴하고 총애寵愛를 받더라도 누구와 함께 영광을 누리겠습니까.
다만 한스럽게도 따님에게 장가들었다가 불행히도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 홀로 지낸 지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일찍이 한 아들이 생기긴 하였으나 단 하루도 살지 못하고 죽었으며 이제까지 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깊은 유감이 항상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맹자孟子께서, 불효不孝가 세 가지 있는데 후사가 없는 불효가 가장 크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안절부절 애태우는 일은 오직 이에 대한 두려움일 뿐입니다.
하늘이 만약 효성이 지극했던 선친의 덕을 버리지 아니하여 대를 이을 후사를 두게 하고, 또 혹시 제 수명이 이어져 대규모의 사면이 있을 때까지 살아 있다가 고향마을로 돌아가 가정을 제대로 꾸릴 수만 있다면,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수준을 지나쳐 은총恩寵이록利祿을 다툰다면, 하늘이 미워할 것입니다.
하늘이 미워할 것입니다.
장인어른께서는 불원간에 조정으로 돌아가 다시 큰 관료가 되실 것이니 부디 앞서 말씀드린 일들을 유념해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좌우座右에 말씀을 올리노라니 사무치는 감정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역주
역주1 與楊京兆憑書 : 이 편지는 작자가 永州司馬로 貶謫된 지 5년째인 810년 겨울에 쓴 것이다. 이때 작자의 나이는 38세였다. 楊憑(?~817)은 자가 虛受로 虢州 弘農 사람이며, 작자의 장인이다. 刑部侍郞으로 재직하다가 앞서 1년 전에 京兆尹으로 밀려났다. 京兆尹으로 재직하던 중 평소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御史中丞 李夷簡의 탄핵으로 인해 賀州 臨賀尉로 폄직되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신중히 하고 절개를 중시하였는데, 당시의 명사인 穆質‧許孟容‧李友 등과 교분이 두터워 楊‧穆‧許‧李라고 불렸으며, 詩文을 잘 지어 아우 凝‧凌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三楊이라 하였다. 이 편지는 상대방이 보내온 편지에, 인재를 영입하는 일과 문장을 짓는 일, 그리고 작자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을 언급한 것에 대해 단락별로 자기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역주2 丈人 : 여기서는 아내의 親家 아버지에 대한 호칭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역주3 〈座前〉 : 이 두 자는 저본에 없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지에서 존장자에 대한 敬稱으로 사용한다.
역주4 役人 : 使役에 종사하는 하급관리를 말한다.
역주5 剝喪頓悴 : 剝喪은 《書經》 〈泰誓 中〉에 “受는 그 죄가 桀보다도 크니 元良에게 상처를 주고 조정에서 내쫓았다.[惟受 罪浮于桀 剝喪元良]”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조정에서 벌을 받아 쫓겨났다는 뜻이다. 頓悴는 潘岳이 지은 《文選》 〈寡婦賦〉에 “용모가 야위고 초췌하니 친지들이 가련하게 여긴다네.[容貌儡以頓悴兮 左右悽其相慜]”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근심걱정으로 몸이 쇠약해진 것을 뜻한다.
역주6 雖舜猶難知之 : 禹의 신하 皐陶가 禹에게 군주가 수행해야 할 일은 인재를 알아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고하자, 禹가 말하기를 “그와 같이 하는 것은 舜임금도 어렵게 여기셨다.”라고 하였다. 《書經 虞書 皐陶謨》
역주7 孔子亦曰 失之子羽 : 子羽는 魯나라 사람으로 孔子의 제자인 澹臺滅明의 자이다. 외모가 매우 못생겨 孔子가 처음에 그를 대단치 않게 여겼다가, 길을 갈 때 지름길로 가지 않고 公務가 아니면 卿大夫를 찾아가지 않는 등 행실이 올바른 것을 알고 말하기를 “내가 외모로 사람을 취했었는데 子羽를 보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史記 권67 仲尼弟子列傳》
역주8 德如漢光武 馮衍不用 : 馮衍은 東漢 京兆 杜陵 사람으로 자는 敬通이다. 光武帝 때 曲陽令이 되어 세력이 막강한 도적 郭勝 등을 죽이고 추종자 5천 명을 항복하게 하였다. 論功行賞할 때 당연히 상을 받을 만하였으나 그와 평소에 유감이 있던 司空長史 令狐略의 참소로 인해 무산되고 司隷從事로 밀려났다. 《後漢書 권28 馮衍列傳》
역주9 才如王景略 以尹緯爲令史 : 尹緯는 天水 사람으로 자는 景亮이다. 처음에 前秦 苻堅의 조정에서 하급관리인 吏部令史를 지내다가 姚萇을 옹립하여 後秦을 세웠다. 姚萇이 苻堅을 포로로 잡은 뒤에 尹緯를 그에게 보내 옛날 堯임금과 舜임금이 했던 것처럼 황제 자리를 평화롭게 양보하는 형식을 취할 것을 회유하게 하였다. 苻堅이 尹緯에게, 姚萇은 역적인데 어찌하여 옛 성군에게 견주느냐고 하면서 말하기를 “경은 재상감으로 王景略의 부류이다. 그런데도 짐이 경을 몰라보았으니 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지난날 尹緯가 비범한 인물인 줄 모르고 푸대접한 것을 한탄하였다. 王景略은 王猛(325~375)으로 景略은 그의 자이다. 苻堅을 도와 前秦을 일으켜 승상으로 있으면서 국가의 대소사를 관장하였다. 《十六國春秋 권4 前秦録》
역주10 趙括得以代廉頗 : 趙나라 孝成王이 廉頗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를 방어하게 하였는데, 秦나라가 간첩을 보내 趙括이 재능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를 “秦나라가 우려하는 것은 오직 馬服君 趙奢의 아들 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자, 趙나라 왕이 장수를 趙括로 교체하였고 결국 패배하였다. 《史記 권81 趙奢列傳》
역주11 馬謖得以惑孔明 : 馬謖(190~228)의 자는 幼常으로 馬良의 아우이다. 재주가 있어 軍務에 관해 논하기를 좋아하였는데, 劉備가 죽으면서 諸葛亮에게 그는 말이 실제보다 지나쳐 크게 쓸 인물이 못 된다고 하였으나, 諸葛亮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參軍으로 삼았다. 그러나 街亭에서 魏나라 장수 張郃에게 크게 패하여 하옥한 뒤에 처형하였다. 《三國志 蜀志 권9 馬謖列傳》
역주12 周仁以重臣爲二千石 : 周仁은 西漢 任城 사람으로, 周文이라고도 한다. 文帝 때 太中大夫, 景帝 때 郞中令을 역임한 인물로 말수가 적고 욕심이 없어 景帝의 총애를 받았다. 武帝가 즉위해서는 그가 선대 황제의 총애를 받은 重臣이란 이유만으로 높이 대우하여 매년 2,000석의 녹을 받으면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였다. 《漢書 권46 周仁傳》
역주13 許靖以人譽而致位三公 : 許靖(?~222)은 汝南 平輿 사람으로 자는 文休이다. 巴郡‧廣漢太守로 있을 때 劉備가 공격하여 成都를 포위하자, 성곽을 넘어와 항복하였다. 그러자 劉備가 그를 형편없는 인물로 보고 푸대접을 하다가 法正이 “許靖의 명예가 사방에 퍼졌는데 만약 그를 예우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공이 賢者를 천시한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이를 따라 司徒로 삼았다. 《三國志 蜀志 권7 法正列傳》
역주14 朴愚無害 : 無害는 《漢書》 〈蕭何列傳〉에 “문서를 작성할 때 별다른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沛邑 수령의 관리가 되었다.[以文毋害 爲沛主吏掾]”에서 나온 것으로, 《論衡》 〈程材篇〉에 의하면 풀이하는 사람에 따라 ‘별다른 하자가 없다’, ‘남을 해치는 일이 없다’, ‘그와 견줄 사람이 없다’ 등 그 설이 각기 다른데, ‘별다른 하자가 없다’는 설이 더 우세하므로 그에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15 紱冕 : 官印을 맨 실끈과 大夫 이상의 관리가 머리에 쓰는 禮冠으로, 官服 또는 禮服을 뜻한다.
역주16 聖人之道……凡以此也 : 여기서 말하는 聖人의 도는 내면의 心性을 함양하고 세상을 經營할 역량을 기르는 것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도를 닦은 자들이 다 세상을 위해 큰 구실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곧 당사자가 자기 존재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해 외부 사람이 진정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역주17 孔子曰 仁者其言也訒 : 孔子가 그의 제자 司馬牛의 질문에 대답한 말로,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論語 顔淵》
역주18 孟子病未同而言 : 孔子의 제자 子路가, 상대방의 환심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여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비난하였는데, 孟子가 그 말을 거론하면서 君子는 떳떳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예의의 中正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 下》
역주19 然則 : 如此와 같은 용법으로 쓰인 것이다.
역주20 叔仲鼎列 : 楊憑은 代宗 大曆 9년(774)에 進士에 급제하고, 둘째 아우 楊凝(?~803)은 大曆 13년에 進士에 급제하고, 셋째 아우 楊凌(?~790?)은 大曆 12년에 進士에 급제하여 세상에서 三楊이라 불렀다. 솥의 발이 세 개이므로 鼎列이라 한 것이다. 작자가 이 편지를 쓴 때는 楊憑의 두 아우가 이미 죽은 뒤이다.
역주21 今又生敬之 : 敬之는 楊凌의 아들이자 楊憑의 조카로, 자는 茂孝이다. 元和 2년(807)에 進士에 급제하였다. 憲宗 연간에 사건에 연루되어 州司戶參軍으로 폄직되었다가, 文宗 때 大理卿을 거쳐 檢校工部尙書 兼 祭酒를 역임하였다. 韓愈가, 그가 지은 〈華山賦〉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역주22 中間幸聯得甲乙科第 : 작자는 21세 때인 貞元 9년(793) 2월에 進士에 급제하였고, 26세 때 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集賢殿 書院正字가 되었다.
역주23 尙書郞 : 작자는 33세 때인 貞元 21년(805)에 監察御史裏行에서 尙書禮部員外郞으로 전보되었다. 尙書郞은 약칭이다.
역주24 去年吳武陵來 : 吳武陵(?~834)은 信州 사람이다. 元和 2년(807)에 進士에 급제하고, 2년 뒤에 永州로 유배되어 작자와 친분을 맺었다.
역주25 桓譚亦云……安肯傳其書 : 桓譚(약 B.C. 20~A.D. 56)은 東漢의 經學家이자 哲學家로, 자는 君山이다. 博學多才하고 古文經學을 숭상하였으며, 劉歆‧揚雄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揚雄이 죽은 뒤에 大司空 王邑과 納言 嚴尤가 桓譚에게 揚雄의 저서가 후세에 전해지겠느냐고 묻자, “받드시 전해질 것이다. 다만 그대들과 나는 전해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까운 것은 賤視하고 먼 것은 重視한다.” 하면서 이어 대답한 말이다. 《漢書 권87 揚雄列傳》
역주26 諸生 : 同年輩 文人들을 가리킨다.
역주27 大故 : 어머니 盧氏의 喪을 당한 것을 말한다. 작자가 永州로 貶謫되어 올 때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반년이 채 안 되어 상을 당하였다.
역주28 仕再登朝 至六品官 : 작자의 아버지 柳鎭이 殿中侍御史로 있던 중 竇參의 탄핵으로 夔州司馬로 貶謫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殿中侍御史가 된 일을 말한다. 殿中侍御史는 6품관이다.
역주29 無似 : 不肖와 같다. 아버지의 못난 자식이란 뜻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겸사로 쓰인다.
역주30 五六從 : 5촌 從叔과 6촌 從兄弟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從은 堂과 같은 글자로, 4촌 이상의 친족을 뜻한다.
역주31 獲託姻好 而早凋落 : 작자가 24세 때인 貞元 12년(796)에 楊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평소에 足疾로 고생하던 아내가 3년 뒤인 799년 8월에 23세로 죽었다. 《柳河東集 권13 亡妻弘農楊氏志》
역주32 嘗有一男子 然無一日之命 : 아내 楊氏가 아들을 임신했다가 死産했으므로 하는 말이다. 《柳河東集 권13 亡妻弘農楊氏志》
역주33 孟子稱不孝有三 無後爲大 : 《孟子》 〈離婁 上〉에 나온다. 이 章의 朱子集註에 “禮法에 不孝가 세 가지 있다. 어버이의 잘못된 뜻을 諫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다가 어버이를 不義에 빠뜨리는 것이 첫 번째이고,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는데도 祿을 받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이고, 장가를 들지 않아 자식이 없어 선조의 제사를 끊는 것이 세 번째이다. 이 세 가지 중에 후사가 없는 불효가 가장 크다.” 하였다.
역주34 天厭之 天厭之 : 《論語》 〈雍也〉에 나온다. 어떤 행위가 예법과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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