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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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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意氣淋漓
二十六日 敬致尺牘足下하노라
始朝廷用諫議大夫陽公爲司業으로 諸生陶煦醇懿하여 熙然大洽 于玆四祀而已러니 詔書出爲道州
僕時하고 就職書府라가 聞之悒然不喜하니 非特爲諸生戚戚也 乃僕亦失其師表而莫有所矜式焉이라
旣而署吏有傳致詔草者하여 僕得觀之하니 蓋主上知陽公甚熟하여 嘉美顯寵 勤至備厚
乃知欲煩陽公하여 宣風裔土하고 覃布美化于黎獻也
遂寬然少喜하여 如獲慰薦于天子休命이라
然而退自感悼하니
幸生明聖不諱之代하여 不能布露所蓄하여 論列大體하여 聞于下執事하여 冀少見採取而還陽公之南也
翌日退自書府하여 就車于司馬門外라가 聞之於抱關掌管者하니
道諸生愛慕陽公之德敎하여 不忍其去하여 頓首西闕下하여 懇悃至願乞留如故者百數十人이라하니라
輒用撫手喜甚하여 震忭不寧하니 不意古道復形于今이라
僕嘗讀이라가 觀其言太學生徒仰闕赴訴者하고 僕謂訖千百年不可覩聞이러니 乃今日聞而覩之하니
誠諸生見賜甚盛이라
始僕少時 嘗有意遊太學하여 受師說하여 以植志持身焉이러니 當時說者咸曰 太學生聚爲朋曹하여 侮老慢賢이라
有墮窳敗業而利口食者하고 有崇飾惡言而肆鬪訟者하고 有凌傲長上而誶罵有司者
其退然自克하여 特殊於衆人者無幾耳라하니
僕聞之 恟駭怛悸하여 良痛其遊聖人之門하여 而衆爲是口沓 口沓也하니라
遂退託鄕閭家塾하여 考厲志業하고 過太學之門而不敢跼顧하니 尙何能仰視其學徒者哉
今乃奮志厲義하여 出乎千百年之表하니 何聞見之乖刺歟
豈說者過也로다
將亦時異人異하여 無嚮時之桀害者耶
其無乃陽公之漸漬導訓하여 明效所致乎
夫如是 服聖人遺敎하고 居天子太學이라도 可無愧矣리라
於戱 陽公有博厚恢弘之德하여 能容善僞하여 來者不拒
曩聞有狂惑小生 依託門下하여 或乃하여 醜行無賴하니 而論者以爲言하여 謂陽公過於納汙하여 無人師之道라하니 是大不然이라
彼一聖兩賢人 繼爲大儒 然猶不免하니 如之何其拒人也리오
之門 不拒病夫하고 之側 不拒枉材하고 니라
且陽公之在于朝 四方聞風하여 仰而尊之하여 貪冒苟進邪薄之夫 庶得少沮其志하여 不遂其惡하리니 雖微之位라도 而人實具瞻焉이라
與其宣風一方하고 覃化一州 其功之遠近 又可量哉
諸生之言 非獨爲己也 於國體實甚宜하니 願諸生勿得私之하라
想復再上하여 故少佐筆端耳
勗此良志하여 俾爲史者有以紀述也하라
努力多賀
柳宗元白하노라


01. 태학太學 제생諸生들이 궁궐에 나아가 사업司業 양성陽城유임留任시켜 달라고 청한 것이 기뻐 태학太學 제생諸生에게 보낸 편지
의지意志기개氣槪가 충만하다.
26일에 집현전정자集賢殿正字 유종원柳宗元은 삼가 태학太學 제생諸生 족하足下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처음 조정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양공陽公사업司業에 제수한 뒤로 제생諸生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정감이 두터워져 크게 흡족해한 지 지금 4년이 되었는데, 그를 도주자사道州刺史로 내보낸다는 조서詔書가 내려왔습니다.
저는 마침 광범문光範門통적通籍하고 서부書府(書院)에서 직무를 보던 중에 그 소식을 듣고 기분이 침울해져 즐겁지 않았는데, 그저 제생諸生들만을 위해 서글퍼한 것은 아니고 저 또한 사표師表를 잃어 모범으로 삼을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윽고 서리署吏(하급관리)가 조서詔書 초안을 보내왔기에 제가 그것을 살펴보았더니, 대체로 주상主上께서 양공陽公을 매우 잘 알아 가상히 여기고 총애하시는 마음이 지극하고 두터웠습니다.
그래서 양공陽公에게 부탁하여 변방 고을에 교화를 펴고 여민黎民(백성) 중의 어진 자에게 아름다운 교화를 널리 파급시키려고 그러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로 인해 기분이 풀려 천자의 거룩하신 명으로 인해 위안을 받은 것처럼 약간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물러나 생각하니 서글픈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행히 천자께서 영명하여 신하의 건의를 도외시하지 않는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가슴속에 품은 것을 드러내 올바른 사리를 하나하나 서술하여 하집사下執事(담당책임자)에게 보고함으로써 다소나마 채택이 되어 양공陽公이 남쪽으로 가게 된 것을 환수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서부書府에서 물러나와 사마문司馬門(황궁皇宮 외문外門) 밖을 나서다가 문지기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가 하는 말이 “제생諸生들 중에 양공陽公의 도덕과 교화를 흠모한 나머지 차마 그를 떠나보내지 못해 서궐西闕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하게 예전처럼 유임시켜 달라고 요구한 자들이 백 수십 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박수를 치면서 너무도 기뻐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으니, 옛날의 도가 오늘날 다시 나타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가 일찍이 〈이원례전李元禮傳〉과 〈혜숙야전嵇叔夜傳〉을 읽다가 태학생太學生들이 대궐을 향해 달려가 스승으로 받들게 해달라고 호소했다는 말을 보고는, 앞으로 천백 년이 지나도 이런 일은 다시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생諸生들이 저에게 끼쳐준 은혜가 실로 대단히 큽니다.
아, 저는 처음 어릴 적에 태학太學에 들어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뜻을 세우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그 당시 말하는 자들이 모두 “태학생太學生은 자기들끼리 한동아리가 되어 나이 많은 노인을 깔보고 덕 있는 사람을 업신여긴다.
게을러빠져 학업을 망치면서 음식만 탐하는 자도 있고, 흉악한 말을 꾸며가며 싸움을 일삼는 자도 있고, 윗사람을 무시하여 유사有司를 욕하는 자도 있다.
겸손하게 스스로 마음을 수양하여 일반 사람보다 특별히 다른 사람은 얼마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서 겁이 나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성인聖人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한동아리가 되어 그와 같은 잡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실로 가슴 아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을 서당으로 들어가 뜻을 가다듬고 학업을 닦으면서 태학太學의 문앞을 지나면서 감히 위축되지 않았으니, 어찌 태학생太學生을 부러운 눈으로 우러러보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태학太學 제생諸生이 분발하여 뜻을 세우고 의리를 가다듬어 그 행위가 천백 년 역사에 으뜸이 되었으니, 저의 견문見聞이 어쩌면 그리도 어긋났단 말입니까.
아마도 말한 자가 잘못 말해주었나 봅니다.
그게 아니면 혹시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달라 그 당시의 포악한 자들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무래도 양공陽公의 지도와 가르침이 깊이 젖어들어 이제 확실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그게 맞는다면 성인이 남기신 가르침을 익히고 천자의 태학太學에 머물러 지내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 양공陽公께서는 두텁고도 큰 덕을 지녀 능히 선한 자와 부정한 자를 모두 포용하여 찾아오는 자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전에 들으니, 어느 정신 나간 소생小生양공陽公의 문하에 의탁해 있으면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추잡한 짓을 자행하자, 논자論者가 그것을 말거리로 삼아 “양공陽公이 난잡한 자들을 과도하게 받아들여 스승으로서의 도가 없다.”라고 했다 하는데, 이는 매우 옳지 않다고 봅니다.
중니仲尼께서 “우리의 무리는 뜻이 허황되거나 행실이 고집스럽다.”라고 하자 남곽혜자南郭惠子가 비난한 일도 있고, 증삼曾參의 문인 72명은 부추負芻의 화를 초래하였으며, 맹가孟軻나라 객관客館에 묵고 있을 적에 문하생이 신발을 훔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저들 한 성인聖人과 두 현인賢人은 역사적으로 대유大儒인데도 오히려 문하에 잡다한 자들이 있음을 면치 못했는데, 양공陽公이 어떻게 찾아오는 자를 거부하겠습니까.
유부兪跗편작扁鵲의 문전에는 병자를 거부하지 않고, 먹줄 곁에는 굽은 재목을 거부하지 않고, 사유師儒의 자리에는 고루한 선비를 거부하지 않는 법이니, 이치가 사실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양공陽公이 조정에 계실 적에 사방에서 풍문風聞을 듣고 우러러 존경함으로 인해 탐관오리나 부당하게 승진하는 자, 그리고 사악하고 경박한 자들이 약간이나마 그 뜻을 자제하여 나쁜 짓을 자행하지 않았을 것이니, 비록 사윤師尹의 지위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사실 모두 우러러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한 지방에 교화를 선양하고 어느 한 고을에 교화를 파급시키는 것에 견주어볼 때 그 공의 크기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제생諸生들이 하는 말은 그저 자신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대사에도 사실 매우 유익한 일이니, 바라건대 제생諸生들은 자신들의 일로만 여기지 말았으면 합니다.
다시 또 조정에 건의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글이 조금이나마 필력筆力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거룩한 뜻을 더욱 분발하여 역사가로 하여금 그 사실을 기술할 수 있게 하기 바랍니다.
온 힘을 다해 축하드립니다.
유종원柳宗元은 말씀드립니다.


역주
역주1 與太學諸生喜詣闕留陽城司業書 : 唐 德宗 貞元 14년(798) 9월에 도성 長安에서 何蕃‧季償‧王魯卿‧李讜 등 太學 諸生 270명이 궁궐로 가서 國子司業 陽城을 留任시켜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일어났다. 작자는 이때 26세로 集賢殿正字로 있었으며 이달 26일에 이 편지를 작성하였다. 陽城(736~805)은 자가 亢宗으로, 定州 北平 사람이다. 進士에 급제한 뒤에 中條山에 은거하던 중, 재상 李泌의 천거로 諫議大夫에 발탁되었다가 貞元 11년(801)에 裴延齡의 모함으로 폄직된 陸贄와 張滂 등을 변호한 일로 다시 國子司業으로 전보되었다. 그 후 3년이 지난 이때 太學生 薛約이 국사를 진언했다가 문책을 받아 連州로 유배되는 처분을 받았다. 陽城은 자기 집에 기숙하던 薛約이 御史臺의 관리에게 잡혀갈 때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었고 눈물을 흘리면서 교외에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德宗이 그에게 죄인과 한통속이라는 죄명을 가해 道州刺史로 좌천시키자, 그에게 수업을 받던 諸生들이 일어나 그 조치를 취소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新唐書 권194 陽城列傳》
역주2 集賢殿正字柳宗元 : 集賢殿은 中書省에 딸린 集賢殿書院의 약칭으로 서적을 편집하고 간행하는 일을 담당한다. 작자가 이해에 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처음 제수받은 관직이다.
역주3 太學諸生 : 太學은 國子監에 딸린 중앙교육기관으로, 國子監을 가리킨다. 5품 이상 관료의 자제를 소집하여 가르친다. 諸生은 그곳에서 공부하는 여러 書生, 곧 학생들을 말한다.
역주4 通籍光範門 : 籍은 궁궐에 들어오는 관리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성명‧연령과 신체의 특징 등을 적은 竹牒이다. 通籍은 이것을 궁문에 걸어두고 들어오는 사람과 대조하여 당사자임이 확인되면 통과시키는 것을 말한다. 光範門은 長安 大明宮에 있는 궁문의 하나로, 含元殿院 서쪽에 있었다.
역주5 李元禮嵇叔夜傳 : 《後漢書》 〈李膺列傳〉과 《晉書》 〈嵇康列傳〉을 말한다. 元禮는 李膺(110~169)의 자이고, 叔夜는 嵇康(224~263)의 자이다. 李膺은 당대의 명사 ‘八俊’ 가운데 한 사람으로, 太學生의 존경을 받아 ‘천하의 모범 인물 李元禮라네.[天下楷模李元禮]’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嵇康은 ‘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당대의 명사이다. 鍾會의 모함으로 司馬昭에게 살해되었는데, 東市에서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太學生 3천 명이 그를 스승으로 섬기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역주6 於戱 : 오호
역주7 飛文陳愚 : 飛文은 유언비어와 같다. 陳愚는 章士釗의 《柳文指要》에 “ ‘陳’은 陣과 같고, ‘愚’는 ‘墨’의 오자이다. 陳墨은 陣馬와 비슷한 용어이다.” 하였다. 陣馬는 전장에서 거침없이 달리는 말이라는 뜻이므로 유언비어를 거침없이 퍼뜨린다는 형용사로 볼 수 있다.
역주8 仲尼吾黨狂狷 南郭獻譏 : 吾黨狂狷은 《論語》 〈公冶長〉에 “우리 黨의 小子가 뜻만 크고 일에는 소략하여 아름답게 문장을 이루었을 뿐 마름질할 줄을 모르는구나.”라고 한 것과, 〈子路〉에 “행실이 도에 들어맞는 자를 찾아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狂者, 狷者와 함께하겠다.”라고 한 것을 합성한 것이다. ‘狂簡’은 행실보다 뜻이 큰 것이고, ‘狷’은 아는 것보다 행실이 철저하다는 말로, 모두 過不足이 없는 中庸의 도에 맞지 않는다. 南郭獻譏는 《荀子》 〈法行篇〉에, 南郭惠子가 子貢에게 묻기를 “夫子의 문하에는 어찌 그리도 잡다한 자가 많은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子貢은 그에 대해 “솜씨 좋은 의원의 문전에는 환자가 많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연장 곁에는 굽은 나무가 많은 법이다.”라고 대답하여 그의 비난을 일축하였다.
역주9 曾參徒七十二人 致禍負芻 : 《孟子》 〈離婁 下〉에 나오는 말이다. 孟子가 나라에 벼슬하여 녹을 받아먹는 신하의 입장과 스승이나 손님의 입장은 각기 다르다는 것을 말할 때 인용한 고사이다. 曾參이 그의 제자 72명과 함께 제자인 沈猶行의 집에 머물 적에 꼴을 베는 자가 난을 일으켜 沈猶氏를 공격하자, 曾參이 도와주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떠났다고 한다. 負芻는 사람 이름이라는 주석도 있다. 여기서는 負芻가 沈猶氏를 공격한 이유가 그의 집에 묵고 있는 曾子 제자들의 재물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10 孟軻館齊 從者竊屨 : 《孟子》 〈盡心 下〉에 나오는 말이다. 孟子가 제자들과 함께 齊나라 上宮(별궁)에서 묵고 있었는데, 별궁 관리인이 작업 중이던 미완성 신발을 창가에 놓아두었다가 없어진 것을 알고 孟子의 제자가 훔쳐갔다고 의심하였다. 그러자 孟子가 내 제자들이 남의 신발을 훔치려고 이곳에 왔겠느냐고 하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해명하였다. 여기서는 孟子의 제자도 모두 선량한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孟子 제자가 신발을 훔쳤다.’는 대목만 적출한 것이다.
역주11 兪扁 : 兪跗와 扁鵲의 합칭으로, 모두 중국 고대의 名醫이다. 兪跗는 《韓詩外傳》에 의하면, 병을 치료할 때 외과수술을 많이 적용하였는데, 피부를 절개하는 수술은 물론이고 개복수술까지 하였다 한다. 扁鵲은 戰國時期 渤海 鄚郡 사람으로 B.C. 5세기경에 살았다. 진맥으로 질병을 진단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중국 脈學의 선도자로 추앙받는다.
역주12 繩墨 : 나무를 다루는 木工이 직선을 그릴 때 사용하는 공구이다.
역주13 師儒 : 고대의 敎官 혹은 學官을 가리킨다.
역주14 陽公有博厚恢弘之德……理固然也 : 金柱臣(1661~1721)의 《壽谷集》 〈散言 上篇〉에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說苑》에 ‘東郭子惠가 子貢에게 묻기를 「孔子의 門下에 왕래하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처럼 난잡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굽은 것을 바로잡는 틀 주변에는 굽은 목재가 많고, 名醫의 문전에는 病者가 많고, 숫돌 곁에는 날이 무딘 연장이 많은 법입니다. 孔子는 자신의 도를 닦아 천하 사람을 기다리시는 분으로, 찾아오는 자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그 門下에 난잡한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하였다.’라고 했다. 子貢의 대답은 민첩하다고 할 만하다. 柳子厚가 쓴 〈與太學諸生留司業陽城〉에 ‘陽公이 큰 덕을 지녀 찾아오는 사람을 거부하지 않은 것인데, 이를 두고 論者들은 난잡한 자를 과도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曾子의 門徒는 負芻의 화를 초래하였고, 孟軻는 齊나라 객관에 묵고 있을 적에 문하생이 신발을 훔쳤다. 그러므로 俞跗와 扁鵲의 문전에는 병자를 거부하지 않고, 먹줄 곁에는 굽은 재목을 거부하지 않고, 師儒의 자리에는 고루한 선비를 거부하지 않으니, 이치가 본디 그런 것이다.’ 하였다. 그의 이 말은 《說苑》의 내용을 변용한 것으로, 옛사람의 글을 답습하는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曾子와 孟子의 일을 인용한 점은 너무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 같다.”
역주15 師尹 : 周나라 太師 尹氏를 가리킨다. 太師는 周나라의 三公이었으므로 후세에 三公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여기서는 《詩經》 〈小雅 節南山〉에 “명성이 높디높은 太師 尹氏여. 백성 모두 당신을 우러러보네.[赫赫師尹 民具爾瞻]”라고 한 것에서 인용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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