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朝廷用諫議大夫陽公爲司業으로 諸生陶煦醇懿하여 熙然大洽이 于玆四祀而已러니 詔書出爲道州라
僕時
하고 就職書府
라가 聞之悒然不喜
하니 非特爲諸生戚戚也
라 乃僕亦失其師表而莫有所矜式焉
이라
旣而署吏有傳致詔草者하여 僕得觀之하니 蓋主上知陽公甚熟하여 嘉美顯寵이 勤至備厚라
乃知欲煩陽公하여 宣風裔土하고 覃布美化于黎獻也라
幸生明聖不諱之代하여 不能布露所蓄하여 論列大體하여 聞于下執事하여 冀少見採取而還陽公之南也라
翌日退自書府하여 就車于司馬門外라가 聞之於抱關掌管者하니
道諸生愛慕陽公之德敎하여 不忍其去하여 頓首西闕下하여 懇悃至願乞留如故者百數十人이라하니라
輒用撫手喜甚하여 震忭不寧하니 不意古道復形于今이라
僕嘗讀
이라가 觀其言太學生徒仰闕赴訴者
하고 僕謂訖千百年不可覩聞
이러니 乃今日聞而覩之
하니
라 始僕少時
에 嘗有意遊太學
하여 受師說
하여 以植志持身焉
이러니 當時說者咸曰 太學生聚爲朋曹
하여 侮老慢賢
이라
有墮窳敗業而利口食者하고 有崇飾惡言而肆鬪訟者하고 有凌傲長上而誶罵有司者요
僕聞之에 恟駭怛悸하여 良痛其遊聖人之門하여 而衆爲是口沓 口沓也하니라
遂退託鄕閭家塾하여 考厲志業하고 過太學之門而不敢跼顧하니 尙何能仰視其學徒者哉아
今乃奮志厲義하여 出乎千百年之表하니 何聞見之乖刺歟아
夫如是면 服聖人遺敎하고 居天子太學이라도 可無愧矣리라
於戱라 陽公有博厚恢弘之德하여 能容善僞하여 來者不拒라
曩聞有狂惑小生
이 依託門下
하여 或乃
하여 醜行無賴
하니 而論者以爲言
하여 謂陽公過於納汙
하여 無人師之道
라하니 是大不然
이라
彼一聖兩賢人은 繼爲大儒나 然猶不免하니 如之何其拒人也리오
且陽公之在于朝
에 四方聞風
하여 仰而尊之
하여 貪冒苟進邪薄之夫 庶得少沮其志
하여 不遂其惡
하리니 雖微
之位
라도 而人實具瞻焉
이라
與其宣風一方하고 覃化一州론 其功之遠近을 又可量哉아
諸生之言은 非獨爲己也라 於國體實甚宜하니 願諸生勿得私之하라
01. 태학太學 제생諸生들이 궁궐에 나아가 사업司業 양성陽城을 유임留任시켜 달라고 청한 것이 기뻐 태학太學 제생諸生에게 보낸 편지
26일에 집현전정자集賢殿正字 유종원柳宗元은 삼가 태학太學 제생諸生 족하足下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처음 조정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양공陽公을 사업司業에 제수한 뒤로 제생諸生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정감이 두터워져 크게 흡족해한 지 지금 4년이 되었는데, 그를 도주자사道州刺史로 내보낸다는 조서詔書가 내려왔습니다.
저는 마침 광범문光範門에 통적通籍하고 서부書府(書院)에서 직무를 보던 중에 그 소식을 듣고 기분이 침울해져 즐겁지 않았는데, 그저 제생諸生들만을 위해 서글퍼한 것은 아니고 저 또한 사표師表를 잃어 모범으로 삼을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윽고 서리署吏(하급관리)가 조서詔書 초안을 보내왔기에 제가 그것을 살펴보았더니, 대체로 주상主上께서 양공陽公을 매우 잘 알아 가상히 여기고 총애하시는 마음이 지극하고 두터웠습니다.
그래서 양공陽公에게 부탁하여 변방 고을에 교화를 펴고 여민黎民(백성) 중의 어진 자에게 아름다운 교화를 널리 파급시키려고 그러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로 인해 기분이 풀려 천자의 거룩하신 명으로 인해 위안을 받은 것처럼 약간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물러나 생각하니 서글픈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행히 천자께서 영명하여 신하의 건의를 도외시하지 않는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가슴속에 품은 것을 드러내 올바른 사리를 하나하나 서술하여 하집사下執事(담당책임자)에게 보고함으로써 다소나마 채택이 되어 양공陽公이 남쪽으로 가게 된 것을 환수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서부書府에서 물러나와 사마문司馬門(황궁皇宮 외문外門) 밖을 나서다가 문지기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가 하는 말이 “제생諸生들 중에 양공陽公의 도덕과 교화를 흠모한 나머지 차마 그를 떠나보내지 못해 서궐西闕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하게 예전처럼 유임시켜 달라고 요구한 자들이 백 수십 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박수를 치면서 너무도 기뻐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으니, 옛날의 도가 오늘날 다시 나타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가 일찍이 〈이원례전李元禮傳〉과 〈혜숙야전嵇叔夜傳〉을 읽다가 태학생太學生들이 대궐을 향해 달려가 스승으로 받들게 해달라고 호소했다는 말을 보고는, 앞으로 천백 년이 지나도 이런 일은 다시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생諸生들이 저에게 끼쳐준 은혜가 실로 대단히 큽니다.
아, 저는 처음 어릴 적에 태학太學에 들어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뜻을 세우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그 당시 말하는 자들이 모두 “태학생太學生은 자기들끼리 한동아리가 되어 나이 많은 노인을 깔보고 덕 있는 사람을 업신여긴다.
게을러빠져 학업을 망치면서 음식만 탐하는 자도 있고, 흉악한 말을 꾸며가며 싸움을 일삼는 자도 있고, 윗사람을 무시하여 유사有司를 욕하는 자도 있다.
겸손하게 스스로 마음을 수양하여 일반 사람보다 특별히 다른 사람은 얼마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서 겁이 나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성인聖人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한동아리가 되어 그와 같은 잡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실로 가슴 아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을 서당으로 들어가 뜻을 가다듬고 학업을 닦으면서 태학太學의 문앞을 지나면서 감히 위축되지 않았으니, 어찌 태학생太學生을 부러운 눈으로 우러러보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태학太學 제생諸生이 분발하여 뜻을 세우고 의리를 가다듬어 그 행위가 천백 년 역사에 으뜸이 되었으니, 저의 견문見聞이 어쩌면 그리도 어긋났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면 혹시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달라 그 당시의 포악한 자들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무래도 양공陽公의 지도와 가르침이 깊이 젖어들어 이제 확실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그게 맞는다면 성인이 남기신 가르침을 익히고 천자의 태학太學에 머물러 지내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 양공陽公께서는 두텁고도 큰 덕을 지녀 능히 선한 자와 부정한 자를 모두 포용하여 찾아오는 자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전에 들으니, 어느 정신 나간 소생小生이 양공陽公의 문하에 의탁해 있으면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추잡한 짓을 자행하자, 논자論者가 그것을 말거리로 삼아 “양공陽公이 난잡한 자들을 과도하게 받아들여 스승으로서의 도가 없다.”라고 했다 하는데, 이는 매우 옳지 않다고 봅니다.
중니仲尼께서 “우리의 무리는 뜻이 허황되거나 행실이 고집스럽다.”라고 하자 남곽혜자南郭惠子가 비난한 일도 있고, 증삼曾參의 문인 72명은 부추負芻의 화를 초래하였으며, 맹가孟軻는 제齊나라 객관客館에 묵고 있을 적에 문하생이 신발을 훔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저들 한 성인聖人과 두 현인賢人은 역사적으로 대유大儒인데도 오히려 문하에 잡다한 자들이 있음을 면치 못했는데, 양공陽公이 어떻게 찾아오는 자를 거부하겠습니까.
유부兪跗와 편작扁鵲의 문전에는 병자를 거부하지 않고, 먹줄 곁에는 굽은 재목을 거부하지 않고, 사유師儒의 자리에는 고루한 선비를 거부하지 않는 법이니, 이치가 사실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양공陽公이 조정에 계실 적에 사방에서 풍문風聞을 듣고 우러러 존경함으로 인해 탐관오리나 부당하게 승진하는 자, 그리고 사악하고 경박한 자들이 약간이나마 그 뜻을 자제하여 나쁜 짓을 자행하지 않았을 것이니, 비록 사윤師尹의 지위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사실 모두 우러러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한 지방에 교화를 선양하고 어느 한 고을에 교화를 파급시키는 것에 견주어볼 때 그 공의 크기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제생諸生들이 하는 말은 그저 자신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대사에도 사실 매우 유익한 일이니, 바라건대 제생諸生들은 자신들의 일로만 여기지 말았으면 합니다.
다시 또 조정에 건의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글이 조금이나마 필력筆力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거룩한 뜻을 더욱 분발하여 역사가로 하여금 그 사실을 기술할 수 있게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