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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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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深識之言이요 逼古之文이라
知足下遇火災하여 家無餘儲
僕始聞而駭하고 中而疑라가 終乃大喜하니
蓋將弔而更以賀也니라
道遠言略하여 猶未能究知其狀하니 若果蕩焉泯焉而悉無有 乃吾所以尤賀者也니라
足下勤奉養하여 樂朝夕하며 惟恬安無事是望也라가 今乃有焚煬赫烈之虞하여 以震駭左右하고 而脂膏滫瀡之具 或以不給일새
吾是以始而駭也하니라
凡人之言 皆曰 하여 이라
或將大有爲也 乃始厄困震悸
於是有水火之孽하고 有群小之慍하여 勞苦變動 而後能光明이라
古之人皆然이라하나
斯道遼闊誕漫하여 雖聖人不能以是必信이라
是故中而疑也하니라
以足下讀古人書하여 爲文章하고이라
其爲多能若是로되 而進不能出群士之上하여 以取顯貴者 蓋無他焉이라
京城人多言足下家有積貨하니 士之好廉名者 皆畏忌하여 不敢道足下之善하고 獨自得之하여 心蓄之하고 銜忍而不出諸口하니 以公道之難明이요 而世之多嫌也
一出口 則嗤嗤者以爲得重賂하니라
僕自貞元十五年見足下之文章하여 蓄之者蓋六七年未嘗言하니
是僕私一身而負公道久矣 非特負足下也니라
하여는 自以幸爲天子近臣하니 得奮其舌하여 思以發明足下之鬱塞이나
然時稱道於行列 猶有顧視而竊笑者
僕良恨修己之不亮하고 素譽之不立하여 而爲世嫌之所加하고 常與言而痛之하니라
乃今幸爲天火之所盪滌하여 凡衆之疑慮 擧爲灰埃
黔其廬하고 赭其垣하여 以示其無有
而足下之才能 乃可以顯白而不汚하여 其實出矣之相吾子也
則僕與幾道十年之相知 不若玆火一夕之爲足下譽也
宥而彰之하여 使夫蓄於心者 咸得開其喙하고 發策決科者 授子而不慄이라
雖欲如嚮之蓄縮受侮라도 其可得乎
於玆吾有望於子
是以終乃大喜也하니라
今吾之所陳若是 有以異乎古 故將弔而更以賀也하니라
足下前要僕文章古書하니 極不忘이요 候得數十幅乃倂往耳
하여 言足下爲醉賦及對問하니 大善이라하니 可寄一本하라
僕近亦好作文하여 與在京城時頗異
思與足下輩言之 桎梏甚固하여 未可得也로도
因人南來하여 致書訪死生이라
不悉이라
宗元白하노라


04. 화재火災를 당한 진사進士 왕참원王參元을 축하하는 편지
식견이 깊은 말이자, 옛 작가와 흡사한 문장이다.
양팔楊八이 보내온 편지를 받고 족하足下화재火災를 당해 집안에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크게 놀랐고 중간에는 뭔가 의심이 일었다가 뒤에는 마침내 매우 기뻤습니다.
그래서 본래 조위弔慰를 표시하려 했다가 지금 다시 축하의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길이 멀고 소식의 내용도 간략하여 그 상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정말로 남은 물건이 하나도 없이 다 타버린 것이 맞다면 이는 곧 내가 더욱 축하할 일입니다.
족하足下는 부모를 열심히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즐거워하며 오직 평안 무사하기만을 바라고 있다가, 지금 갑자기 큰불이 나는 뜻밖의 일을 당하여 족하足下를 크게 놀라게 했을 것이고, 심지어 여러 가지 음식재료도 어쩌면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놀랐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 “길흉吉凶화복禍福은 서로 의존하여 변할 수 있기에 갔다 왔다 하는 일이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 장차 큰일을 이루려고 할 적에 처음에는 곤경에 처하고 놀라는 일을 겪기도 한다.
그래서 수재水災화재火災를 당하거나 소인배들의 분노를 사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노고와 변화를 경험하니, 그런 다음에 광명을 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다 그러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도리는 너무 요원하고 황당하여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이를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중간에 또 의심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족하足下는 옛사람의 책을 읽어 문장文章을 쓰고 소학小學에 정통합니다.
이와 같이 재능이 많은데도 관계에 진출하여 많은 인물 중에 특출하게 존귀한 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도성 사람들은 족하足下 집안에 재물이 쌓여 있다는 말을 많이 했으니, 청렴淸廉하다는 이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꺼려 감히 족하足下의 뛰어난 재능을 칭찬하지 못하고 혼자만 알아 마음에 쌓아두고서 입 밖에 꺼내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공정한 도리는 밝히기 어렵고 세상에 의심하는 자가 많아서 그런 것입니다.
일단 족하足下에 대해 훌륭하다는 말을 입 밖에 꺼냈다가는 남을 조소嘲笑하길 좋아하는 자들은 〈곧 족하로부터〉 분명히 많은 뇌물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정원貞元 15년(799)에 처음 족하足下의 문장을 보고 찬미하는 말을 가슴에 품고 6, 7년을 지냈는데, 그동안 말을 꺼낸 적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오랫동안 나 개인을 위해 공정한 도리를 저버린 것이고 족하足下만을 저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사御史, 상서랑尙書郞이 되었을 때 내심 ‘다행히 천자의 근신近臣이 되었으니 이제는 혀를 놀려서 억눌려 빛을 보지 못하는 족하足下를 드러내 밝혀줘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따금 동료 관리들 속에서 칭찬을 해보면 오히려 돌아보고 내심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자신의 수양修養이 높지 못하고 평소에 명예名譽를 세우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의 의심을 받는 것이 정말 한스러웠으며, 항상 맹기도孟幾道와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행히도 하늘이 내린 불에 족하足下의 재산이 깨끗이 타 없어져서 세상 사람들의 의심도 함께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집은 검게 타고 담은 붉게 태워져 사람들에게 족하足下가 하나도 가진 것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족하足下의 재능이 모욕侮辱을 당하지 않고 분명해져서 그 실상이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는 축융祝融회록回祿이 그대를 도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맹기도孟幾道가 10년 동안 족하足下의 재능을 알고 있었던 것이, 이 불이 하룻저녁에 족하足下를 위해 청렴하다는 명예를 세워준 것만도 못합니다.
이 큰불이 그대를 도와 그대의 실상을 드러내줌으로써 그대를 칭찬하는 말을 마음속에 쌓아둔 사람은 모두 그 입을 열 수 있게 하고, 인재선발을 주관하는 자는 그대에게 관직을 줘도 두려워 떨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비록 예전처럼 세상 사람들이 의심할까 위축되고 사람들의 조소를 받고 싶더라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나는 그대에게 큰 기대를 가집니다.
이 때문에 뒤에는 마침내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옛날 여러 제후국에 화재가 일어나 동등한 지위의 다른 국가는 모두 가서 위문하였으나 나라는 위문하지 않았다 하여 군자君子가 증오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한 정황은 이처럼 옛날의 그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위문을 하려다가 도리어 축하를 하는 것입니다.
안회顔回증삼曾參이 부모를 봉양할 적에 그 즐거움이 컸을 것이니, 또 무엇이 부족했겠습니까.
족하足下가 예전에 나의 문장文章고서古書를 원했었는데, 전혀 잊어버린 것은 아니고 수십 편 정도 쌓이길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오이십일吳二十一 무릉武陵이 와서 족하足下가 〈취부醉賦〉와 〈대문對問〉을 썼는데 매우 좋다고 했으니, 한 부 보내주었으면 합니다.
나도 요즘 글쓰기를 좋아하여 도성에 있을 때와 상당히 다릅니다.
족하足下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구속이 워낙 심하여 그럴 수 없습니다.
이곳 남쪽으로 온 사람이 있기에 편지를 써서 그대의 안부를 묻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종원宗元은 고합니다.


역주
역주1 賀進士王參元失火書 : 年譜 등 여러 자료에 의하면 작자가 永州司馬로 있던 元和 3년(808)에 쓴 것으로 보인다. 王參元은 濮陽 사람으로, 鄜坊節度使 王棲嚁의 아들이자 王茂元의 아우이다. 元和 2년(807)에 進士에 급제하였다.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주위 사람들이 그를 관직에 임용하라고 추천하려 하였으나, 그의 집이 부유하여 혹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살까 두려워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때 그의 집에 큰불이 나서 전 재산이 다 없어지자, 사람들이 비로소 망설이지 않고 그를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작자가 이와 같은 내용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위안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써 축하한 것이다. 貪官汚吏가 법을 유린하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서, 작자가 ‘화재’와 ‘축하’라는 모순된 현상을 주제로 삼아 시대의 잘못된 조류를 맹렬하게 비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주2 楊八 : 劉禹錫의 《劉賓客外集》 권5 〈雜詩〉의 편명인 〈寄唐州楊八歸厚〉로 볼 때 楊八은 楊歸厚를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다. 楊歸厚는 扶風 사람으로, 憲宗 때 左拾遺로 있을 당시 천자를 대면한 자리에서 환관 許遂振을 과격하게 논박하고 여러 재상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기를 요직에 앉혀주면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고 하자, 천자가 노하여 國子主簿 分司東都로 좌천시켰다. 뒤에 鳳州‧虢州‧壽州‧唐州‧常州 등 刺史를 역임하였다. 楊八에 대해 楊憑의 조카인 楊敬之라는 설과, 御史中丞 湖南觀察使 楊憑에게 초빙되어 觀察度支使로 부임한 楊儀之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모두 근거가 희박하다.
역주3 盈虛倚伏 : 《老子》에 “禍는 福이 의지해 있고, 복은 화가 엎드려 있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盈虛는 禍福과 같다.
역주4 去來之不可常 : 禍와 福은 항구적이지 않고 늘 변한다는 뜻이다. 去來는 得失과 같다.
역주5 小學 : 文字‧音韻‧訓詁 등에 관한 文字學을 가리킨다.
역주6 及爲御史尙書郞 : 작자가 30세 때인 貞元 18년(802)에 監察御史가 되었고, 順宗 원년(805)에 禮部員外郞이 되었다. 禮部는 尙書省 소속이므로 尙書郞이라 한 것이다.
역주7 孟幾道 : 幾道는 孟簡(?~823)의 자이다. 汝州 梁縣 사람이며 孟郊의 從叔이다. 貞元 7년(791)에 進士에 급제한 뒤에 또 博學宏詞科에 합격하였다. 浙東觀察使‧戶部侍郞‧山南東道節度使‧太子賓客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꼿꼿하여 節義를 숭상하였고 盧仝‧韓愈 등과 교유하였다.
역주8 祝融回祿 : 祝融과 回祿은 전설로 전해지는 火神의 이름이다.
역주9 古者列國有災……君子惡之 : 《春秋左氏傳》 昭公 18년에 “宋나라, 衛나라, 陳나라, 鄭나라에 모두 화재가 일어났다……陳나라는 불을 끄지 않았고 許나라는 네 나라의 화재를 위문하지 않았으므로, 君子가 陳나라와 許나라가 먼저 멸망할 것을 알았다.” 하였다.
역주10 顔曾之養……又何闕焉 : 顔曾은 孔子의 제자인 顔回와 曾參을 가리킨다. 顔回가 그의 아버지 顔路를 섬기고, 曾參이 그의 아버지 曾點을 섬길 때 매우 가난하였지만 효성을 다하고 천륜을 즐기는 데에 전혀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곧 王參元이 이제 가난한 처지에서 부모를 봉양하게 되었지만 봉양하는 것은 마음을 봉양하는 정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顔回와 曾參처럼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말이다.
역주11 吳二十一武陵 : 二十一은 작자의 벗인 吳武陵(?~834)의 排行이다. 吳武陵이 이때 작자가 머무르고 있는 永州로 유배되어 왔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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