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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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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撈籠勝槩하여 却又別出一見解
邑之有觀游 或者以爲非政이라하나 是大不然이라
夫氣煩則慮亂하고 視壅則志滯하나니
君子必有游息之物 高明之具 使之淸寧平夷하여 恒若有餘 然後理達而事成이니라
零陵縣東有山麓하니 泉出石中이라
沮洳汚塗하고 群畜食焉하니 牆藩以蔽之하여 爲縣者積數十人 莫知發視하니라
河東薛存義以吏能聞하니 擧之하여 하니라
會零陵政尨賦擾하여 民訟于牧하니 推能濟弊 來莅玆邑이라
遁逃復還하여 愁痛笑歌하고 逋租匿役 期月辨理하니 宿蠹藏奸 披露首服하니라
民旣卒稅 相與歡歸道塗하고 迎賀里閭
門不施之席하고 耳不聞鼛鼓之召하며 鷄豚糗醑 得及宗族하니 州牧尙焉하고 旁邑倣焉이라
然而未嘗以劇自撓山水鳥魚之樂하여 澹然自若也하니라
乃發牆藩 驅群畜하며 決疏沮洳하고 搜剔山麓하니 萬石如林하고 積坳爲池
爰有嘉木美卉 垂水藂峯하고 瓏𤫩蕭條하여 淸風自生하고 翠烟自留하니 不植而遂
魚樂廣閒하고 鳥慕靜深하여 別孕巢穴하고 沈浮嘯萃하니 不畜而富
伐木墜江하여 流于邑門하고 陶土以埴 亦在署側이라
人無勞力하고 工得以利
乃作三亭하여 陟降晦明하니 高者冠山顚하고 下者俯淸池
更衣膳饔 列置備具하여 賓以燕好하고 旅以館舍
高明游息之道 具於是邑하니 由薛爲首니라
在昔하고 하니 亂慮滯志 無所容入이라
則夫觀游者 果爲政之具歟 薛之志 其果出於是歟
及其弊也하여는 則以玩替政하고 以荒去理리라
使繼是者 咸有薛之志 則邑民之福 其可旣乎리오
余愛其始而欲久其道하여 乃撰其事하여 以書于石하니
曰吾志也라하여 遂刻之하니라


07. 영릉零陵의 세 정자에 관한 기문
아름다운 경치를 망라한 것으로 이 또한 하나의 견해를 창출하였다.
고을에 관상觀賞유람遊覽을 제공할 곳이 있는 것에 대해 혹자는 정사를 행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체로 심기心氣가 답답하면 사고思考가 어지럽고, 시야視野가 막히면 생각이 정체된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는 반드시 유람하고 휴식할 장소와 높고 밝은 시설을 갖추어 그들의 심기가 맑고 안정되며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게 함으로써 항상 여유가 있는 것처럼 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사리를 통달하고 행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다.
영릉현零陵縣 동쪽 산기슭에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있다.
지세地勢가 낮아 진펄이 쌓여 질퍽거리고 가축들이 그곳에서 물을 마시는데 울타리로 가려져 있으므로, 그동안 이 고장의 현령縣令으로 거쳐 간 자가 수십 인이었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동河東 사람 설존의薛存義는 공무처리 능력으로 형초荊楚 지방에 이름이 났는데, 담주潭州에 주재하는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의 추천으로 상원湘源의 대리 현령이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영릉현零陵縣의 정무가 혼란하고 세금 징수가 어지러워 백성들이 영주자사永州刺史에게 유능한 이를 추천하여 그 폐단을 없애줄 것을 호소하였으므로 이 고을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자 도망쳐 숨었던 이들이 다시 돌아와 근심과 고통은 웃음과 노래로 바뀌었으며, 세금이 밀리고 부역을 피했던 이들이 한 달이 되자 정산하니, 상습적인 악인과 숨었던 범인들이 발각되어 검거되거나 자수하였다.
백성들은 세금을 완납하고는 함께 기뻐하면서 돌아오고, 향리에서는 서로 영접하여 축하하였다.
문밖에는 관리가 앉아 있을 자리를 두지 않았고, 귓전에는 관아에서 독촉하는 북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닭고기와 돼지고기와 마른 식량과 맛좋은 술을 가족이며 친척들과 함께 나눠먹으니, 자사刺史는 그의 치적을 칭찬하였고 이웃 에서는 그의 방법을 본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무가 복잡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자기가 누리는 산수의 경관과 새들이며 물고기를 구경하는 즐거움에 방해를 받는 일이 없고 태연자약하였다.
마침내 그 샘물을 에워싼 울타리를 헐고 가축들을 몰아내고는 쌓여 있는 진펄을 쳐내고 산기슭의 언덕을 깎아내니, 무수한 괴석이 숲처럼 늘어서고 낮은 곳의 웅덩이는 못이 되었다.
이에 좋은 나무와 아름다운 화초花草가 물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하고 산봉우리에 숲을 이루기도 하여, 곳곳이 모두 영롱하고 산뜻하여 맑은 바람이 절로 일고 푸른 안개가 절로 머무르니 특별히 화초와 나무를 심지 않아도 잘 자랐다.
그리고 고기들은 이곳의 넓고 한적한 못을 즐기고 새들은 이곳의 고요하고 깊은 산림山林을 좋아하여 저마다 새끼 치고 둥지를 틀며 물속에선 떴다 잠기고 숲속에선 노래하니, 특별히 보살피고 기르지 않아도 그 숫자가 날로 늘어났다.
베어진 목재는 강물에 떨어져 성문 어구에까지 이르고, 점토로 벽돌과 기왓장을 빚어내는 장소는 관서官署 옆에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힘을 들이는 일이 없고 장인匠人의 작업이 편리하였다.
이렇게 하여 정자 세 채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렸는데, 높은 곳의 정자는 산꼭대기에 높이 서 있고 낮은 곳의 정자는 맑은 못을 굽어보았다.
휴식하며 옷을 갈아입을 곳과 음식을 조리할 곳을 줄지어 배치하여 이곳에서 빈객을 맞아들여 연회도 하고 길손이 묵는 숙소로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높고 밝은 정자에서 유람하고 휴식하는 길이 이 고을에 갖추어졌으니, 이는 설존의薛存義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옛날에 비심裨諶은 들에 나가 계책을 궁리하여야 성과가 있었고, 복자宓子는 거문고를 타면서 고을을 다스렸으니, 어지러운 사고와 정체된 생각이 가슴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하니 관상하고 유람하는 이 일이 정말로 정사를 추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겠으며, 설존의薛存義가 정자를 세운 목적이 정말로 이와 같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폐단으로 작용할 경우에는 유락遊樂으로 인해 정사를 폐기하고 방탕으로 인해 직무에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
만약 계속하여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이 모두 설존의薛存義의 생각을 가진다면 고을 백성들의 복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나는 그가 이 일을 개시한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면서 그의 방법을 오래도록 전해가기를 희망하여 마침내 그의 사적을 저술하여 바위에다 썼다.
그러자 설존의薛存義가 절을 하며 자기 생각도 그렇다고 말하였으므로 마침내 새기게 되었다.


역주
역주1 零陵三亭記 : 永州司馬로 있을 때 쓴 것으로, 그 연대는 알 수 없다. 零陵은 지금의 湖南 零陵縣으로, 永州刺史의 관청소재지가 있는 縣이다. 三亭은 東山 아래 샘물 주변에 있는 세 채의 정자로, 讀書林亭‧湘秀亭‧府淸亭을 가리킨다. 元和 연간에 零陵의 대리 현령으로 있던 薛存義가 세운 것이다. 薛存義가 직무를 잘 수행하여 훌륭한 치적을 거두었는데, 이는 그가 경관을 즐기며 여유를 지녔던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 글에서 부각하였다. 경물을 구경하고 산천을 유람하여야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트이며 사고가 원활해져 정사를 행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역주2 荊楚 : 楚나라와 같다. 楚나라 최초의 영토가 지금의 湖北 南漳 서쪽에 있는 荊山 일대에 해당하였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역주3 潭部 : 湖南觀察使를 가리킨다. 관청소재지가 潭州였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역주4 假湘源令 : 假는 代理라는 뜻이다. 湘源은 縣 이름으로, 唐나라 때 永州의 속현이었다. 지금의 廣西 全州이다.
역주5 胥吏 : 지방관아의 말단 관리이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세금을 거두는 등 일선현장의 직무를 수행한다.
역주6 裨諶謀野而獲 : 裨諶은 春秋 때 鄭나라 대부로, 계책을 잘 짰다는 사람인데, 한적한 들판에서 궁리해야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子産이 그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판으로 나갔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襄公 31년》
역주7 宓子彈琴而理 : 宓子는 春秋 말기 魯나라 宓不齊로, 孔子의 제자이다. 單父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堂에서 내려오지 않고 거문고를 타면서 고을을 다스렸다고 한다. 《呂氏春秋 察賢》
역주8 拜手 : 일종의 예절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대고 땅에 댄 다음 머리를 손에 닿을 정도로 숙인다. 오늘날 행하는 큰절의 형식과 같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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