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伏見
에 有
人徐元慶者
하니 父爽爲縣尉趙師韞所殺
하여 卒能手刃父讐
하고 束身歸罪
하니이다
臣聞禮之大本은 以防亂也니 若曰無爲賊虐이라하면 凡爲子者殺無赦하고
刑之大本은 亦以防亂也니 若曰無爲賊虐이라하면 凡爲治者殺無赦니이다
其本則合하고 其用則異하니 旌與誅莫得而竝焉이니이다
誅其可旌이면 玆謂濫이니 黷刑甚矣요 旌其可誅면 玆謂僭이니 壞禮甚矣니이다
果以是示於天下하고 傳於後代면 趨義者不知所向하고 違害者不知所立하리니 以是爲典可乎잇가
蓋聖人之制는 窮理以定賞罰하고 本情以正褒貶하여 統於一而已矣라
嚮使刺讞其誠僞하고 考正其曲直하며 原始而求其端이런들 則刑禮之用이 判然離矣리니
若元慶之父 不陷於公罪로되 師韞之誅 獨以其私怨하여 奮其吏氣하여 處於非辜어나 州牧不知罪하고 刑官不知問하여 上下蒙冒하여 籲號不聞일새
而元慶能以戴天爲大恥하고 枕戈爲得禮하여 處心積慮하여 以衝讐人之胸하고 介然自克하여 卽死無憾인댄 是守禮而行義也라
執事者宜有慚色하여 將謝之不暇어늘 而又何誅焉이리오
其或元慶之父 不免於罪하고 師韞之誅 不愆於法이면 是非死於吏也요 是死於法也니
且其議曰 人必有子하고 子必有親하니 親親相讐면 其亂誰救리오하니
禮之所謂讐者는 蓋其寃抑沈痛하여 而號無告也요 非謂抵罪觸法하여 陷於大戮어늘
而曰彼殺之에 我乃殺之라하여 不議曲直하고 暴寡脅弱而已면 其非經背聖이 不亦甚哉잇가
周禮調人掌司
之讐
라 凡殺人而義者
는 令勿讐
니 讐之則死
하고
春秋公羊傳曰 父不受誅면 子復讐可也어니와 父受誅에 子復讐면 此推刃之道니
元慶能不越於禮하여 服孝死義하니 是必達理而聞道者也라
議者反以爲戮하여 黷刑壞禮하니 其不可以爲典明矣라
請下臣議하여 附於令하고 有斷斯獄者면 不宜以前議從事니이다
이 주의奏議는 한공韓公(한유韓愈)이 “오늘날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한 그 반쪽만 다루었으나, 문장의 구조가 잘 짜여 힘차고 빈틈이 없어 유자후柳子厚 문장 중에 뛰어난 작품이다.
신이 삼가 아는 바에 의하면,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동주同州 하규下邽 사람 서원경徐元慶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비 서상徐爽이 현위縣尉 조사온趙師韞에게 살해되자 마침내 아비의 원수를 직접 찔러 죽이고 자기를 포박하여 관아에 자수하였습니다.
당시에 간관諫官이었던 진자앙陳子昂은 그를 사형에 처한 다음 그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건의하고, 아울러 이 안건의 처리 내용을 법령에 편집해 넣어 영원히 국가의 법전으로 삼을 것을 청했습니다.
신은 삼가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듣건대, 예법禮法의 근본목적은 혼란을 방지하자는 것이니 예컨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자식 된 자는 아비를 위해 용서하지 말고 복수해야 할 것이고,
형법刑法의 근본목적 또한 혼란을 방지하자는 것이니 예컨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는 그 자식을 처형하고 사면할 수 없습니다.
예법과 형법은 그 근본은 같고 운용만 다를 뿐이니,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과 처형하는 것을 함께 시행할 수 없습니다.
정문을 세워 표창할 만한 자를 처형한다면 이는 벌罰을 남용한다는 것으로 형벌의 본의를 크게 손상하는 행위이고, 처형할 만한 자를 정문을 세워 표창한다면 이는 예禮를 어긴다는 것으로 예법을 크게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는 것을 천하에 내보이고 후대에 전한다면 도의道義를 추구하는 자가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할지 모를 것이고, 보복을 피하는 자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를 것이니, 이것을 국법國法으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대체로 성인聖人이 예법禮法을 만든 것은 사리事理를 추구하여 상벌賞罰을 정하고 인정人情에 근거하여 포폄褒貶의 표준을 바로 세움으로써, 사리事理와 인정人情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초에 만약 그 안건에 대해 사정의 진위를 조사 심리하고 그 시비곡직을 살펴 바로잡으며, 그 발생과정을 추구하여 그 까닭을 분명히 밝혔더라면 형법과 예법의 적용이 분명하게 구분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서원경徐元慶의 아비가 국법을 범하지 않았는데도 조사온趙師韞이 단지 사적인 원한 때문에 관리의 기세로 무고한 자를 함부로 죽였다거나, 조사온趙師韞에 대해 주군州郡의 수령이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형관刑官이 그를 심문하지 않으면서 위로 덮고 아래로 속여 무고한 자의 억울한 호소를 귀를 막고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서원경徐元慶이 원수와 한 세상에 사는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겨 밤낮으로 손에 무기를 들고 복수를 생각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다고 여기고서, 여러 궁리 끝에 원수의 가슴을 찌르고는 정직하게 스스로 몸을 포박해 자수하여 죽음도 불사하였다면, 이는 예법을 지키고 도리를 이행한 것입니다.
집권자는 마땅히 그에게 부끄러움을 느껴 사죄하기에도 바쁠 처지에 어찌 그를 처형한단 말입니까.
만약 서원경徐元慶의 아비가 사면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였고 조사온趙師韞이 그를 처형한 것이 법률을 위배하지 않았다면, 이는 관리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법률에 의해 처형된 것입니다.
법률을 과연 복수할 대상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천자의 법률을 원수로 여겨 그 법을 받드는 관리를 살해했다면, 이는 패역무도하고 거만하여 존장尊長을 범한 행위입니다.
이런 사람은 잡아 처형하는 것이 국법을 바로잡는 길이니, 어찌 또 표창하겠습니까.
그리고 진자앙陳子昂의 논의에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식이 있고 자식에게는 반드시 양친兩親이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부모를 위해 상호 복수한다면 그 혼란을 누가 구해낼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예법에서 복수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대체로 〈부모가 피살되었을 때〉 억울하고 침통한데도 어디에다 호소할 곳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지, 죄를 짓고 법을 어겨 처형된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자가 내 부모를 죽였으니 나도 그를 죽여야겠다고 하면서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고 그저 다수多數가 소수少數를 폭행하고 강자强者가 약자弱者를 위협한다면, 이런 행위는 경전과 성인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주례周禮》의 “분규를 조정하는 관원은 백성 상호간의 원망을 관장한다.”는 항목에, “일반적으로 사람을 죽였더라도 도리에 합당한 경우에는 복수하지 못하게 하고 복수한 자는 처형한다.
이 원칙을 위반하고 복수할 경우 전국에서 모두 그를 원수로 간주한다.” 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또 어떻게 각자의 부모를 위해 서로 복수하겠습니까.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아비가 부당하게 처형당했을 경우 자식이 복수할 수 있지만, 아비가 정당하게 처형당했는데도 자식이 복수한다면 이는 서로 죽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수를 한다면 국가를 위해 재앙을 제거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이와 같은 규정에 의거하여 상호간에 죽이는 것을 판결한다면 예법에 부합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수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은 효도孝道이고,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은 의리義理입니다.
서원경徐元慶은 예법을 넘지 않고 효도를 실천하고 의롭게 죽으려 하였으니, 그는 필시 이치에 통달하고 도를 깨달은 자일 것입니다.
이치에 통달하고 도를 깨달은 사람이 어찌 국법을 적으로 삼아 복수하겠습니까.
그런데 의견을 제시한 자는 반대로 그를 처형할 자로 여기어 형벌을 남용하고 예법을 파괴하였으니, 이와 같은 건의는 국법으로 삼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청컨대 황상皇上께서는 신의 주의奏議를 법령에 첨부하고 앞으로 이와 같은 안건을 판결할 일이 있으면, 이전 진자앙陳子昂의 건의대로 처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의 문장은 매우 근엄하여 허술한 글자가 한 자도 없다.”
“논리가 정밀하고 문장이 공교하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국어國語》에 버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