揚子之書於莊墨申韓皆有取焉하니 浮圖者 反不及莊墨申韓之怪僻險賊耶아
吾之所取者는 與易論語合하니 雖聖人復生不可得而斥也니라
曰 髡而緇하고 無夫婦父子하며 不爲耕農蠶桑而活乎人이라하니
吾之所以嗜浮圖之言以此니 與其人游者도 非必能通其言也니라
且凡爲其道者는 不愛官하고 不爭能하며 樂山水而嗜閑安者爲多라
吾病世之逐逐然唯印組爲務以相軋也하니 則舍是其焉從이리오
今浩初閑其性하고 安其情하며 讀其書하여 通易論語하고 唯山水之樂을 有文而文之라
則其賢於爲莊墨申韓之言하여 而逐逐然唯印組爲務以相軋者에 其亦遠矣로다
유가儒家를 신봉하는 한퇴지韓退之는 나의 좋은 벗인데, 그는 일찍이 내가 불가佛家의 학설을 좋아하는 것을 지적하고 내가 승려들과 교유하는 것을 책망하였다.
최근에 농서隴西 이초李礎가 동도東都 낙양洛陽으로부터 이곳에 왔는데 퇴지退之는 또 그의 편에 편지를 보내와 나를 탓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송원생서送元生序〉를 보았는데 불가佛家를 배척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불가佛家의 학설 중에는 분명히 배척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가끔 《역경易經》‧《논어論語》와 부합되기도 한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것을 좋아하니 사람의 성정性情을 담박하게 순화시키는 점에 있어서는 공자孔子와 그 도道가 다르지 않다.
퇴지退之가 유가儒家 학설을 좋아하는 정도는 양웅揚雄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양웅揚雄이 쓴 책에는 장자莊子‧묵자墨子‧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에 대하여 모두 취한 바가 있으니, 불가佛家의 학설이 오히려 괴벽하고 사악한 장자莊子‧묵자墨子‧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은데도 배척하는 이유는〉 외지의 오랑캐 지역에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겨우 외지의 오랑캐 지역에서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도를 믿지 않고 배척한다면 내지의 악래惡來와 도척盜跖을 벗으로 사귀고 외지의 계찰季札과 유여由余를 천시하자는 것인가?
이것은 사람들이 표방하는 ‘허명虛名을 버리고 실제實際를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취하는 것은 《역경易經》‧《논어論語》의 도리와 서로 부합되는 점이니, 성인聖人이 다시 나온다 해도 불가佛家의 도를 배척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승려는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으며 부부와 부자간의 인륜관계를 중시하지 않고, 밭을 갈거나 누에를 치는 일이 없이 남들에게 의지해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퇴지退之는 그 겉모습에 대해 분개하고 그 내면의 본질은 돌아보지 않으니, 이는 돌덩이란 것만 알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보석寶石은 모르는 것이다.
내가 불가佛家의 말을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니, 불교도들과 교유하는 것도 내가 반드시 불가佛家의 학설을 모두 잘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대체로 불교佛敎를 신봉하는 사람은 벼슬을 좋아하지 않고 능력을 다투지 않으며 산수山水를 좋아하면서 한가하고 편안한 것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오직 벼슬을 추구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서로 배척하는 작태를 유감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불가佛家의 가르침을 버리고 그 무엇을 따르겠는가.
내가 승려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호초浩初는 심성이 차분하고 정서가 안정되었으며 책 읽기를 좋아하여 《역경易經》‧《논어論語》에 통달하였는가 하면, 오직 산수山水를 감상하는 것을 흥취로 삼고 문장으로 이와 같은 산수를 찬미하였다.
그리고 이들 부자父子가 모두 불교佛敎를 신봉하여 심성을 수양하면서 지내고 담박하여 〈공명功名과 봉록俸祿을〉 추구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 장자莊子‧묵자墨子‧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의 학설을 신봉하여 오직 벼슬을 추구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서로 배척하는 자들과 견주어볼 때 그들보다 훨씬 낫다고 하겠다.
이제 〈이초李礎가 있는 곳에〉 가거든 내 이 서문을 그에게 보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북쪽 낙양洛陽으로 가는 인편을 통해 이 서문을 퇴지退之에게 부쳐줬으면 한다.
그가 이 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는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