覽子厚之所以序西漢이면 而文章之旨를 亦可槪見矣라
自左丘明傳孔氏
하고 太史公述歷古今
하여 合而爲史記
로 迄于今交錯相糺
하여 莫能離其說
하고 獨
國語 紀言不參於事
라
文之近古而尤壯麗는 莫若漢之西京하니 班固書傳之라
吾嘗病其畔散不屬하여 無以考其變일새 欲采比義러니 會年長疾作하여 駑墮愈日甚하여 未能勝也라
搜討磔裂하고 攟摭融結하며 離而同之하되 與類推移하니 不易時月에 而咸得從其條貫이라
森然〈炳然〉
하여 若開
하고 指揮聯累
하고 圭璋琮璜之狀
이 各有列位
하여 不失其敍
하니 雖第其價可也
니라
以文觀之면 則賦頌詩歌書奏詔策辯論之辭畢具하고 以語觀之면 則右史紀言尙書戰國策成敗興壞之說大備하여 無不苞也라
始吾少時
에 有
者 自贊爲是書
하여 吾嘉而敍其意
나 而其書終莫能具
하고 卒俟宗直也
라
故刪取其敍하여 繫于左하여 以爲西漢文類首紀하니라
殷周之前은 其文簡而野하고 魏晉以降은 則盪而靡하니 得其中者漢氏라
武帝尤好焉하여 而公孫弘董仲舒司馬遷相如之徒作하여 風雅益盛하여 敷施天下라 自天子로 至公卿大夫士庶人히 咸通焉이라
於是宣於詔策하고 達於奏議하며 諷於辭賦하고 傳於歌謠하니 由高帝訖于哀平王莽之誅히 四方之文章이 蓋爛然矣라
史臣班孟堅이 修其書할새 拔其尤者하여 充于簡冊하니 則二百三十年間 列辟之達道와 名臣之大範과 賢能之志業과 黔黎之風美列焉이라
若乃合其英精하고 離其變通하며 論次其敍位는 必俟學古者興行之라
於是有能者하여 取孟堅書하여 類其文하고 次其先後하여 爲四十卷하니라
01. 유종직柳宗直이 지은 《서한문류西漢文類》의 서문
자후子厚가 《서한문류西漢文類》에 대해 쓴 서문을 살펴보면 문장의 의의를 또한 대강 알 수 있다.
좌사左史와 우사右史의 일이 뒤섞인 지 오래되었으니, 말과 일이 난잡하여 《상서尙書》와 《춘추春秋》의 취지가 사라졌다.
좌구명左丘明이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에 전傳을 쓰고, 태사공太史公이 고금의 역사를 기술하고 이것을 모아 《사기史記》를 편찬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역사서의 내용이〉 섞이고 꼬이어 어느 누구도 그 형식을 구분하여 서술하지 못했고, 오직 좌씨左氏의 《국어國語》만 말을 기록하고 일은 끼워 넣지 않았다.
《전국책戰國策》과 《춘추후어春秋後語》는 상당히 우사右史의 《상서尙書》 방식을 근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옛 성인聖人의 위대한 도는 없고 대체로 번잡하고 미진한 편이다.
글 가운데 옛글에 가깝고 특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는 한漢나라의 서경西京(前漢)시대의 것만 한 것이 없는데,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그 글이 전해져온다.
나는 일찍이 〈그 글들이〉 흩어지고 이어지지 않아 그 변천을 살필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워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글을 뽑아내려고 하였으나, 마침 나이도 많고 병이 생겨서 아둔함이 날로 심해져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내 아우 종직宗直이 고서古書를 좋아하여 그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완성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들을 자세히 검토한 뒤에 그것을 수집하여 종합하고, 다시 분리하여 합치되 〈문체가 같은 것끼리〉 유별로 조정하였는데, 한 계절이 가기 전에 모두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내용이 풍성하고 빛이 나서 마치 많은 옥玉이 보관된 창고를 여는 듯하고, 이리저리 이어놓은 구성은 옥으로 만든 귀한 제기祭器들이 각기 제자리에 놓여 있어 순서를 잃지 않은 것과 같으니,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해도 될 것이다.
문체로 살펴보면 부賦‧송頌‧시詩‧가歌‧서書‧주奏‧조詔‧책策‧변辯‧논論 등의 글을 모두 갖추었고, 말을 기록한 것으로 살펴보면 말을 기록한 우사右史의 체제로서 《상서尙書》‧《전국책戰國策》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관한 설이 크게 구비되어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 이 책은 학문하는 자의 길잡이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젊었을 적에 노자路子라는 이가 있어 이런 책을 만든다고 스스로 과시하기에 내가 가상히 여겨 그에 관한 생각을 서술했었는데, 그 책은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고 결국 종직宗直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그 서술문을 손질하여 아래에 붙여 《서한문류西漢文類》의 서문으로 삼을까 한다.
은殷‧주周 이전에는 그 글이 간단하여 거칠고, 위魏‧진晉 이후로는 과장되어 무력하니, 그 중용中庸을 얻은 것이 한漢나라의 글이다.
한漢 문제文帝 때에 처음으로 가생賈生을 얻어 유가儒家의 학술을 밝혔다.
한漢 무제武帝가 어느 군주보다도 유가儒家의 학술을 좋아함으로 인해, 공손홍公孫弘‧동중서董仲舒‧사마천司馬遷‧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리가 나와 풍아風雅의 기풍이 더욱 융성해져서 천하에 널리 퍼지니, 천자天子로부터 공公‧경卿‧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에 능통했다.
그리하여 그 기풍이 조책詔策으로 알려지고 주의奏議로 전달되며, 사부辭賦로 풍자되고 가요歌謠로 전파되었으니, 한漢 고제高帝 때부터 애제哀帝‧평제平帝 때와 왕망王莽이 죽을 당시까지 사방의 문장이 모두 찬란하였다.
사관史官인 반맹견班孟堅(班固)이 《한서漢書》를 편수할 적에 그중에 뛰어난 문장을 뽑아 책에다가 채워 넣었으니, 230년 동안 여러 황제들의 훌륭한 법도와 명신名臣들의 큰 본보기, 그리고 현명하고 유능한 자들의 지향과 업적 및 백성의 아름다운 풍속이 그 안에 나열되었다.
〈그 문장 중에서〉 정수를 모으고 형식을 달리한 여러 문체文體를 분류하며 그 배열하는 순서를 이상적으로 정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옛 도를 배운 자가 나와 그 작업을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唐 왕조가 일어나 문치文治를 행하여 정원貞元 연간에 문장이 특히 흥성하였다.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근본을 두고 한대漢代의 문장을 충분히 수용하여 한대漢代와 서로 견줄 만한 수준이 되었다.
이에 유능한 자가 나와서 반맹견班孟堅의 《한서漢書》를 취해 그 문체를 분류하고, 그 선후의 순서를 정하여 40권을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