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晉以下誄竝藻麗나 子厚自爲機杼하여 亦有可觀이라
維唐元和六年八月日
에 衡州刺史東平呂君卒
하여 爰用十月二十四日
에 藁葬於
之野
라
嗚呼라 君有智勇孝仁하여 惟其能은 可用康天下하고 惟其志는 可用經百世어늘
湖南人重
飮酒
로되 에 不酒去樂
하고 會哭於神所而歸
라
其哀聲交於北南하고 舟船之下上에 必呱呱然하니 蓋嘗聞於古而觀於今也라
世徒讀君之文章하고 歌君之理行하며 不知二者之於君其末也라
嗚呼라 君之文章은 宜傳於百世나 今其存者는 非君之極言也요 獨其詞耳며 君之理行은 宜及於天下나 今其聞者는 非君之盡力也요 獨其跡耳라
若使幸得出其什二三이면 巍然爲偉人하여 與世無窮하리니 其可涯也리오
余懼州吏之逸其辭也하여 私爲之誄하여 以志其行하노라
05. 형주자사衡州刺史 동평東平 여군呂君에 대한 뇌문誄文
위魏‧진晉 시대 이후 뇌문誄文은 모두 화려하였으나, 유자후柳子厚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문장을 지어 또한 살펴볼 만하다.
당唐나라 원화元和 6년 8월 모일에 형주자사衡州刺史 동평東平 여군呂君이 죽어 10월 24일에 강릉江陵 들판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아, 군君은 지혜와 용기와 효성과 인자함을 지녀 그의 재능은 천하를 편안하게 할 수 있었고, 그의 포부는 먼 후대까지 경영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세상 사람들 또한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다.
군君은 도주자사道州刺史로서 치적을 인정받아 형주자사衡州刺史로 전보되었다.
군君이 죽자, 두 주州 사람들이 한 달이 넘도록 곡을 했다.
호남湖南 사람들은 평소에 사일社日을 중시하여 술을 마셔왔지만, 이달 상무일上戊日에는 술도 마시지 않고 음악도 폐지하고서 토지신의 제단에 모여 곡을 한 뒤에 돌아갔다.
나는 영주永州에 있는데 영주永州는 두 주州의 중간에 있다.
그 슬퍼하는 소리가 남북쪽에서 번갈아 들려오고 배가 오르내릴 적에도 반드시 애처롭게 울어대는 소리가 들리니,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로만 듣다가 이제 눈으로 직접 보았다.
군君의 포부와 재능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지지 않았고, 그것을 아는 자 또한 열 사람을 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군君의 문장을 읽거나 군君의 치적만 노래할 뿐이며, 이 두 가지가 군君에게 있어서는 지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아, 군君의 문장은 마땅히 먼 후대에 전해질 만한데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군君이 지닌 정력을 다 쏟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글일 뿐이고, 군君의 치적은 마땅히 온 천하에 미쳐갈 만한데도 지금 들려오는 것은 군君이 지닌 재능을 다 쏟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피상적인 자취일 뿐이다.
만 가지 재능 가운데 하나도 제대로 시험해보지 못했는데도 오히려 당대에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인물로 드러났다.
만약 다행히 10분의 2, 3만이라도 발휘했다면 우뚝하게 위대한 인물이 되어 세상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니, 어찌 그 파장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군이 재임했던 관직은 3품이므로 당연히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받을 수 있다.
나는 주州의 관리가 군君의 행적을 올리는 글에서 중요한 내용을 빠뜨릴까 염려하여 개인적으로 뇌문誄文을 써 그 행적을 기록한다.
《서경書經》 《시경詩經》 옛글을 방패로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