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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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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魏晉以下誄竝藻麗 子厚自爲機杼하여 亦有可觀이라
維唐元和六年八月日 衡州刺史東平呂君卒하여 爰用十月二十四日 藁葬於之野
嗚呼 君有智勇孝仁하여 惟其能 可用康天下하고 惟其志 可用經百世어늘
不克而死하니 世亦無由知焉이라
君之卒 二州之人哭者逾月이라
湖南人重飮酒로되 不酒去樂하고 會哭於神所而歸
余居永州하여 在二州中間이라
其哀聲交於北南하고 舟船之下上 必呱呱然하니 蓋嘗聞於古而觀於今也
君之志與能不施於生人하고 知之者又不過十人이라
世徒讀君之文章하고 歌君之理行하며 不知二者之於君其末也
嗚呼 君之文章 宜傳於百世 今其存者 非君之極言也 獨其詞耳 君之理行 宜及於天下 今其聞者 非君之盡力也 獨其跡耳
萬不試而一出焉하되 猶爲當世甚重이라
若使幸得出其什二三이면 巍然爲偉人하여 與世無窮하리니 其可涯也리오
君所居官爲第三品이니 宜得諡於이라
余懼州吏之逸其辭也하여 私爲之誄하여 以志其行하노라
其詞曰
麟死魯郊하여
濯濯
潔其儀
冠仁服義하고
櫓書詩
忠貞繼佩하고
智勇承綦
跨騰商周하여
堯舜是師
道不勝禍하니
天固余欺
鬼神齊怒하고
妖孼咸疑
何付之德하고
嗚呼哀哉
命姓惟呂하니
勤唐以力하고
輔寧萬邦하니
周以降德하여
伊祖之則이라
嗣濟厥武하니
前書是式이라
至於化光하여
爰耀其特하니
春秋之元
儒者咸惑이어늘
君達其道하여
卓焉孔直이라
聖人有心
敷施變化하여
動無不克이라
推理惟公하고
舒文以翼이라
宣於事業하여
與古同極이라
道不苟用이나
資仕乃揚하니
進於禮司
奮藻含章하고
休問用張이라
錯綜逾光하고
超都諫列하여
帝殊爾能하고
人服其智
戎悔厥禍하여
盛選邦良이나
難乎始使
君登御史하여
風動海壖하여
皇威以致
甲玆郞吏하여
制用經邦하여
時推重器
周官匪易
鮮云能備어늘
君自他曹로되
載出其技하여
筆削自任하니
糾佞肅邪하고
諂諛具畏
民服休嘉하니
恩疎若昵하고
惕邇如遐
而撫於家
載其愉樂하여
申以舞歌
賦無吏迫하고
威不刑加하여
浩然順風하니
從令無譁
蠶外邑하되
我繭盈車하고
雜耕隣邦하되
我黍之華
旣字其畜하고
亦藝其麻하니
鼛鼓斯屛하되
人喜其多
興良廢邪하여
考績旣成
王用興嗟하여
言進其律이라
號呼南竭하고
謳謠北溢하여
欺吏悍民
先聲如失이라
逋租匿役
歸誠自出하고
兼幷旣息하니
罷羸乃逸이라
惟昔擧善
이러니
今我興仁
化爲齊人이라
惟昔富人
이러니
今我厚生
不竭而足이라
邦思其弼하고
人戴惟父어늘
善胡召災하고
仁胡罹咎
俾民伊祜어늘
而君不壽하니
矯矯貪凌
乃康乃茂
嗚呼哀哉
廩不餘食하고
藏無積帛이로되
內厚族姻하고
外賙賓客이라
恒是이라가
逮玆하니
僮無凶服하고
嗚呼哀哉
君昔與余
講德討儒하니
之奧
希聖爲徒
志存致君하여
笑詠唐虞하고
揭玆日月하여
以耀群愚
疑生所怪하고
怒起特殊하여
齒舌嗷嗷
雷動風驅
良辰不偶하여
卒與禍俱하니
直道莫試하고
嘉言罔敷하여
佐王之器
窮以郡符
秩在三品하니
宜諡王都
諸生群吏
尙擁良圖
故友咨懷하여
累行陳謩하고
是旌是告하니
永永不渝
嗚呼哀哉


05. 형주자사衡州刺史 동평東平 여군呂君에 대한 뇌문誄文
시대 이후 뇌문誄文은 모두 화려하였으나, 유자후柳子厚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문장을 지어 또한 살펴볼 만하다.
나라 원화元和 6년 8월 모일에 형주자사衡州刺史 동평東平 여군呂君이 죽어 10월 24일에 강릉江陵 들판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아, 은 지혜와 용기와 효성과 인자함을 지녀 그의 재능은 천하를 편안하게 할 수 있었고, 그의 포부는 먼 후대까지 경영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세상 사람들 또한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다.
도주자사道州刺史로서 치적을 인정받아 형주자사衡州刺史로 전보되었다.
이 죽자, 두 사람들이 한 달이 넘도록 곡을 했다.
호남湖南 사람들은 평소에 사일社日을 중시하여 술을 마셔왔지만, 이달 상무일上戊日에는 술도 마시지 않고 음악도 폐지하고서 토지신의 제단에 모여 곡을 한 뒤에 돌아갔다.
나는 영주永州에 있는데 영주永州는 두 의 중간에 있다.
그 슬퍼하는 소리가 남북쪽에서 번갈아 들려오고 배가 오르내릴 적에도 반드시 애처롭게 울어대는 소리가 들리니,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로만 듣다가 이제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의 포부와 재능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지지 않았고, 그것을 아는 자 또한 열 사람을 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의 문장을 읽거나 의 치적만 노래할 뿐이며, 이 두 가지가 에게 있어서는 지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아, 의 문장은 마땅히 먼 후대에 전해질 만한데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이 지닌 정력을 다 쏟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글일 뿐이고, 의 치적은 마땅히 온 천하에 미쳐갈 만한데도 지금 들려오는 것은 이 지닌 재능을 다 쏟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피상적인 자취일 뿐이다.
만 가지 재능 가운데 하나도 제대로 시험해보지 못했는데도 오히려 당대에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인물로 드러났다.
만약 다행히 10분의 2, 3만이라도 발휘했다면 우뚝하게 위대한 인물이 되어 세상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니, 어찌 그 파장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군이 재임했던 관직은 3품이므로 당연히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받을 수 있다.
나는 의 관리가 의 행적을 올리는 글에서 중요한 내용을 빠뜨릴까 염려하여 개인적으로 뇌문誄文을 써 그 행적을 기록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 들판에서 기린이 죽어,
그 영험을 천하에 펴지 못했네.
빛나고도 밝으신 우리 님이여,
그 의표 어인 일로 깨끗이 했나?
을 갓으로 를 옷으로 삼고,
서경書經》 《시경詩經》 옛글을 방패로 하며,
충성과 곧은 절개 허리에 차고,
지혜와 결단력을 신발끈 삼아,
상탕商湯 문왕文王을 뛰어넘어서,
임금 임금을 스승 삼았네.
허나 가 재앙을 이기지 못해,
하늘이 진정 나를 속이었으니,
신령들은 일제히 노기를 품고,
요괴들은 모두가 의아해했네.
어인 일로 큰 덕을 부여하고서,
뒤이어 펼칠 때를 빼앗아갔나?
아, 애통하여라.
임금이 라는 성을 주시니,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온 천하 제후국을 안정시키자,
유려국有呂國에 봉해져 보답받았네.
태사太師이신 대성인 태공太公에 대해,
나라 때 은덕을 크게 내리어,
대 물리며 오후五侯를 정벌케 하니,
이는 의 조상들 법이었는데,
후손들이 그 자취 이어받으니,
옛글의 가르침을 준수했다네.
이제 또 화광化光에게 이르러서는,
뛰어남이 더 한층 빛이 났으니,
춘추春秋》에서 말하는 심오한 뜻을,
유자儒者들은 모두가 헤맬 뿐인데,
만은 그 도리를 통달했기에,
그 지조 남다르게 강직했다네.
성인聖人이라 공자孔子의 숨은 생각을,
스스로 궁리하여 이해한 뒤에,
매사에 임기응변 시행을 하니,
언제나 올바르게 이루어졌네.
공정한 마음으로 정사 행하고,
뛰어난 문장으로 날개를 다니,
이로써 큰 사업을 행했더라면,
옛날의 명인들과 같았으리라.
쓰이지 못했다 해도,
벼슬길에 나서자 이름났으니,
예부禮部의 하급시험 참가해서는,
뛰어난 문장 솜씨 발휘하였고,
큰 시험에 응시해 잇달아 급제,
심오한 학문 경지 펼쳐 보였네.
백가百家의 옛 서적을 교감하면서,
검토하는 과정에 학문 빛나고,
간관諫官 반열 승진해 올라가서는,
밀봉한 상소문을 누차 올리니,
황제가 그 능력을 달리 보셨고,
사람들이 그 지혜 탄복하였네.
서융西戎이 지난 잘못 회개하고서,
우호友好로 아들 보내 모신다 하자,
뛰어난 사절使節감을 고르다 보니,
처음 보낼 적임자 쉽지 않았네.
이 이때 어사御史의 자리에 올라,
부사副使정사正使 도와 직무 수행해,
해변이라 먼 지역 교화시켜서,
그로써 황제 위엄 떨치었다네.
돌아와 부세賦稅 행정 총괄할 때는,
여러 낭관郞官 중에서 으뜸 관리라,
비용 지출 절제로 나라 경영해,
당시에 큰 인물로 중시되었네.
신하들 올린 상소 처리하는 일,
주관周官》에도 허투루 아니 여겼고,
한대漢代전주牋奏 문서 고과하는 일,
그 재능 갖춘 사람 드물었는데,
은 다른 에서 왔으면서도,
마침내 그 재능을 드러내서는,
오류의 수정작업 맡아 행하니,
유자儒者들 틀린 주장 바뀌었다네.
정랑正郞으로 형부刑部의 법을 맡았고,
어사중승御史中丞 천거로 부관副官이 되자,
사악한 사람들이 자숙하였고,
아첨하는 자들이 두려워했네.
도주道州로 자리 옮겨 정사 행하자,
선정으로 백성들 감복했으니,
소원한 자 친한 듯 은혜 베풀고,
측근은 먼 것처럼 경계하였네.
실은 보면 방 안에 들어앉아서,
개인 가사 돌봄과 비슷했으나,
백성들은 마음이 즐겁다 못해,
다시 또 춤을 추고 노래하였네.
세금 걷는 관리는 독촉이 없고,
형벌 가해 위엄을 아니 부리어,
순한 바람 불듯이 은혜 베푸니,
아무런 불평 없이 명에 응했네.
바깥 읍은 누에가 실을 뽑는데,
우리네는 고치가 수레에 그득,
이웃 고을 밭갈이 한창 하는데,
우리네는 기장이 꽃을 피웠네.
집집마다 가축을 먹여 키우고,
곳곳마다 삼밭을 일궈 가꾸니,
재촉하는 북소리 아니 울려도,
풍족함에 사람들 기뻐하였네.
부유하게 한 뒤에 교화를 펴자,
선한 마음 생기고 간교 사라져,
치적의 고과에서 우등을 하니,
군왕께서 감탄을 금치 못하며,
형주衡州 고을 자사刺史로 승진시키어,
관작이라 등급을 올려주었네.
처량한 신음소리 에서 멎고,
흥겨운 노랫소리 에서 넘쳐,
속여먹던 관리며 사나운 백성,
자사刺史 부임 소문에 넋이 나갔네.
세금 납부 피하고 숨겼던 것을,
승복하여 스스로 꺼내 바치고,
토지 겸병 호족豪族의 횡포 사라져,
지치고 약한 자들 편해졌다네.
옛날엔 훌륭한 자 등용했을 때,
도적이 외국으로 달아났지만,
지금 우리 수령이 인정仁政 베풀자,
교화되어 선량한 백성 되었고,
옛날엔 백성들을 도와줄 적에,
관아 창고 곡물로 구제했지만,
지금 우리 수령이 민생에 힘써,
관곡 아니 풀어도 넉넉하였네.
조정에선 시종신 삼으려 하고,
백성들이 부모로 받들었는데,
함이 어이하여 재앙 부르고,
함이 어이하여 화를 만났나?
백성에게 많은 복 끼치려는데,
아뿔싸 우리 이 세상 떠나니,
뻔뻔해 욕심 많고 침탈하는 자,
마음이 편해지고 많아지겠네.
아, 애통하여라.
곳간에는 남겨둔 식량이 없고,
창고에는 쌓아둔 비단 없어도,
안으로는 척족들 후히 대하고,
밖으로는 빈객들 도와줬다네.
언제나 가난하게 살아오다가,
마침내 세상 하직 맞이했으니,
하인은 상복조차 입을 게 없고,
장지 또한 고향이 아니었다네.
아, 애통하여라.
은 옛날 나와 함께 서로 어울려,
도덕을 강론하고 유학 토론해,
시중時中이라 깊은 뜻 깨우치고서,
성인聖人을 배우려는 무리 되었네.
우리 임금 성군을 만들 뜻으로,
자나 깨나 요순堯舜만 노래하면서,
그 뜻을 일월日月처럼 높이 내걸어,
우매한 자들에게 비춰 보였네.
허나 괴이한 데서 의심이 나고,
특별히 다른 데서 분노 이는 법,
소인배 어지럽게 떠들어대니,
천둥에 폭풍소리 다름없었네.
불행히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해,
마침내는 화근이 함께했기에,
품었던 바른 도를 시험 못하고,
하고픈 좋은 말을 하지 못한 채,
군왕을 보좌해줄 그릇으로서,
고을 관리 자사刺史로 마치었다네.
관작의 품계로는 3품이라서,
마땅히 조정 시호諡號 내릴 만한데,
그런데도 유생과 지방 관리들,
아직도 좋은 시도 못하고 있네.
나는야 옛 벗으로 느낀 게 있어,
여러 줄 문장으로 계책을 쓰고,
이와 같이 세상에 널리 알리니,
의 사실 영원히 전해가리라.
아, 애통하여라.


역주
역주1 : 작자의 나이 39세 때인 元和 6년(811) 永州司馬로 있으면서 쓴 작품이다.
呂君은 呂溫(772~811)으로, 자는 和叔인데 化光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山西 永濟인 河中府 河東縣 사람이다. 德宗 貞元 14년(798)에 進士에 급제하고 이듬해 博學宏詞科에 급제한 뒤에 王叔文의 비호 아래 校書郞‧左拾遺‧侍御史‧刑部郞中을 역임하였다. 永貞 때 王叔文과 柳宗元 등 개혁을 주도한 동지들이 모두 처벌받아 조정에서 쫓겨났으나, 그때 그는 吐蕃에 사신으로 나가 억류되어 있었으므로 화를 면했다. 나중에 재상 李吉甫와 사이가 좋지 않아 道州刺史로 쫓겨났다가 다시 衡州刺史로 옮겨 재직 중에 죽었다. 《新唐書 권160 呂溫列傳》 誄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로, 문체의 하나이다.
역주2 江陵 : 唐나라 때 荊州 관아의 소재지로, 지금의 湖北 지역이다.
역주3 君由道州以陟爲衡州 : 呂溫이 貞元 3년(787)에 재상 李吉甫와 틈이 벌어져 道州刺史로 폄직되었다가, 5년(789)에 치적이 드러나 衡州刺史로 전보되었다. 衡州는 지금의 湖南 衡陽으로, 唐나라 때 江南道에 속해 있었다.
역주4 : 社日의 약칭으로, 민간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 드리는 날이다. 1년에 春社와 秋社 두 社日이 있다. 秋社는 입추 이후 다섯 번째 돌아오는 戊日에 있는데, 여기서는 秋社를 가리킨다. 《荊楚歲時記》에 “社日에는 사방 이웃들이 모여 고기와 술을 준비하여 나무 밑에 집을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먼저 신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 그 제물을 나눠 먹는다.” 하였다.
역주5 是月上戊 : 上戊는 그달의 첫 번째에 든 戊日을 이르는바, 여기서는 元和 6년 8월 8일 무자일을 가리킨다.
역주6 太常 : 太常寺의 약칭이다. 太常寺에서는 국가에서 행하는 五禮의 의식을 관장하고 동시에 王ㆍ公 및 3품 이상 관원의 諡號에 관한 초안을 만든다.
역주7 麟死魯郊 其靈不施 : 魯 哀公 14년(B.C. 481)에 어떤 사람이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 한 마리를 잡았다. 孔子가 상서로운 기린이 사냥꾼에게 잡힌 것을 두고 자기가 추구하는 周나라의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될 수 없음을 상징한 것으로 간주하여 탄식하기를 “나의 길이 막다른 곳에 이르렀구나.” 하고, 그가 편수하던 《春秋》를 그해에 중단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呂溫을 기린에 견주어 그가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상서로운 기린이 魯나라 들판에서 허무하게 잡혀죽은 것에 견준 것이다. 《史記 孔子世家》
역주8 夫子 : 본디 스승의 대명사로 쓰이나 여기서는 呂溫을 가리킨다.
역주9 (故)[胡] : 저본에는 ‘故’로 되어 있으나, 何焯의 《義門讀書記》에 근거하여 ‘胡’로 바로잡았다.
역주10 (于)[干] : 저본에는 ‘于’로 되어 있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干’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奪其時 : 呂溫이 4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12 命姓惟呂……受胙爾國 : 전설에 의하면, 共工氏의 從孫이자 齊나라 太公 呂尙의 조상인 伯夷가 堯임금을 도와 四嶽을 관장하고 夏禹를 도와 홍수를 다스렸다 하여, 그를 有呂國에 봉하고 侯伯으로 명했으며 姓은 姜, 氏는 有呂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呂氏가 생긴 시초라 한다. 伯夷가 四嶽을 관장하였다 하여 四嶽이 伯夷의 별칭으로 사용된다. 侯伯은 사방 제후의 우두머리이다. 唐은 堯임금의 국호이고 胙는 보답한다는 뜻으로, 四嶽이 이전에 쌓은 공덕에 대한 보답을 有呂國에 봉해진 것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國語 周語 下, 鄭語》
역주13 維師元聖 : 師는 太師의 약칭이고 元聖은 대성인이란 뜻으로, 太師를 지낸 呂尙을 가리킨다. 呂尙이 80세 때 渭水의 북쪽에서 낚시하며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西伯이던 文王이 사냥을 나왔다가 만나 함께 대화를 나눠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우리 太公께서 당신을 바란 지 오랩니다.”라고 말하고, 수레에 태우고 돌아와 太師로 삼았다. 이로 인해 그를 太公望ㆍ姜太公ㆍ呂望ㆍ尙父라고도 한다. 太公은 文王의 아버지 季歷을 가리킨다. 《史記 권32 齊太公世家》
역주14 世征五侯 : 《春秋左氏傳》 僖公 4년에, 齊나라 재상 管仲이 “옛날 召康公께서 우리나라 선대 임금 太公에게 명하기를 ‘五侯와 九伯을 네가 책임지고 정벌하여 周 왕실을 보좌하라.’고 했다.”라고 말하여, 齊나라가 천자를 대신해 각국의 제후들을 감시하고 정벌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설명하였다. 齊나라는 太公 呂尙이 처음 봉해 받은 나라이다. 五侯는 公ㆍ侯ㆍ伯ㆍ子ㆍ男 등 다섯 등급의 관작이고, 九伯은 九州의 長이다.
역주15 聖人有心 由我而得 : 聖人은 孔子를 가리킨다. 呂溫이 처음에 《春秋》에 정통한 陸質로부터 《春秋》를 배웠는데, 나중에 스스로 궁리하여 그 속에 담긴 孔子의 생각을 터득하였다는 것이다.
역주16 決科聯中 : 呂溫이, 貞元 14년(798)에 尙書左丞 顧少連이 知禮部貢擧가 되어 보인 進士試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中書舍人 高郢이 知貢擧가 되어 보인 博學宏詞科에 또 급제하였다.
역주17 署讐百氏 : 署讐는 서적을 정리하고 교감한다는 뜻이고, 百氏는 諸子百家를 말한다. 呂溫은 博學宏詞科에 급제한 뒤에 곧바로 集賢殿校書郞이 되어 각종 서적을 정리하고 교감하는 업무를 맡았다.
역주18 超都諫列 屢皂其囊 : 呂溫은 王叔文ㆍ韋執誼와 친분이 두터워 그들의 천거로 貞元 19년(803)에 左拾遺로 발탁되었다. 拾遺는 황제의 시종신으로, 諫言을 올리는 일도 맡기 때문에 諫列이라 한 것이다. 皂囊은 검은 천으로 만든 자루로, 기밀을 요하는 상소문을 올릴 때 사용한다.
역주19 戎悔厥禍 款邊求侍 : 戎은 西戎으로, 吐蕃을 가리킨다. 款邊은 변방 국경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뜻이고, 求侍는 吐蕃에서 그 나라의 왕자를 唐나라 왕실로 보내 황제를 받들어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는 뜻이다. 곧 국경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뜻이 진심임을 보이기 위해 왕자를 볼모로 잡혀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역주20 君登御史 贊命承事 : 御史는 殿中侍御史의 약칭이다. 貞元 20년(804) 6월에 秘書監 張薦은 吐蕃弔祭使가 되고 呂溫은 工部郞中으로 副使에 충원되었다. 贊命承事는 副使가 되어 正使를 받들어 보좌한다는 뜻이다.
역주21 來總征賦 : 征賦는 賦稅와 같은 말로, 농지세ㆍ조세 등 각종 세금의 총칭이다. 呂溫이 元和 원년(806)에 사행길에서 돌아와 戶部員外郞이 된 것을 말한다.
역주22 諸臣之復 : ‘신하들이 국사에 관해 아뢴 것’이란 뜻으로, 상소문 따위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周禮》 〈天官 冢宰〉에 宰夫가 맡는 직무를 서술하는 내용 가운데 “외국사절의 訴請과 신하들이 국사에 관해 아뢴 것, 만백성이 올린 글에 관한 일 등을 관장한다.[……以待賓客之令 諸臣之復 萬民之逆]”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역주23 漢課牋奏 : 課는 고과, 곧 시험해본다는 뜻이고, 牋奏는 書劄‧奏章과 같은 것으로, 문관이 일상적으로 상부에 보고하는 表文 등의 문서를 말한다. 東漢 順帝 永建 초에 尙書令 左雄(?~138)이 건의하기를 “조정의 문관에 대해서는 그가 평소에 수행할 牋奏 작성법을 시험해보고, 아울러 정부기관으로 보내 현장에서 실습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後漢書 권61 左雄列傳》
역주24 君自他曹……群儒革議 : 他曹는 다른 부서라는 뜻으로, 呂溫이 司封員外郞으로 전보되기 이전에 戶部員外郞으로 재임했던 戶部를 말한 듯하다. 筆削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竹簡이나 木版에 쓴 글자가 잘못되었을 때 칼로 깎아내고 그 자리에 붓으로 다른 글자를 쓴 데서 나온 말로, 잘못된 글자, 더 나아가 남의 틀린 주장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呂溫이 司封員外郞으로 있으면서 뛰어난 문장 솜씨를 발휘하고 참신한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儒者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바꾸게 했다는 것이다.
역주25 正郞司刑 : 呂溫이 刑部郞中이 된 것을 가리킨다. 正郞은 郞中을 말한다.
역주26 邦憲爲貳 : 竇群(760~814)이 국법을 규찰하는 御史中丞으로 있으면서 呂溫을 천거하여 그의 부관인 御史知雜事로 삼았다. 貳는 副와 같은 뜻으로, 부관을 말한다.
역주27 遷理於道 : 元和 3년(805) 10월 呂溫이 道州刺史가 된 것을 말한다.
역주28 實閉其閣 : 閣은 여기서는 閨閤의 뜻으로 내실의 작은 문, 더 나아가 방 안을 가리킨다. 漢 武帝 때 汲黯이 道家 서적을 읽어 백성을 다스릴 때 드러내지 않고 단순한 방식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가 東海太守로 부임해서는 밖에 나오지 않고 방 안에 누워 지시만 했는데도 1년 만에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呂溫이 道州刺史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고을을 다스린 일이 汲黯의 경우와 같았음을 말한 것이다. 《漢書 권50 汲黯列傳》
역주29 (繇)[絲] : 저본에는 ‘繇’로 되어 있으나, 《柳河東集》의 註에 근거하여 ‘絲’로 바로잡았다.
역주30 始富中敎 : 《論語》 〈子路〉에 “孔子가 衛나라에 갔을 때 冉有가 수레를 몰았는데, 孔子가 ‘인구가 많기도 하다.’ 하였다. 冉有가 ‘인구가 많은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부유하게 해줘야 한다.’ 하고, 또 ‘부유해진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 하였다.”라고 한 데서 인용하였다. 呂溫이 고을 행정을 그처럼 하였다는 것이다.
역주31 陟於嶽濱 : 呂溫이 道州刺史에서 衡州刺史로 자리를 옮긴 것을 가리킨다. 嶽濱은 衡嶽, 곧 衡山의 물가로, 衡州를 가리킨다.
역주32 惟昔擧善 盜奔於隣 : 春秋 때 晉나라 士會가 太傅로 등용되자, 晉나라의 도적들이 秦나라로 도망갔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宣公 16년》
역주33 惟昔富人 或賑之粟 : 春秋 때 평소에 백성들을 잘 대해주던 宋나라 公子鮑가 나라에 기근이 들자, 관아에 있는 곡식을 모두 꺼내 나눠줬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春秋氏左傳 文公 16년》
역주34 懸罄 : 懸磬으로도 쓴다. 집안에 아무것도 없고 들보만이 흡사 경쇠를 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의미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26년에 “집은 경쇠를 걸어놓은 것 같고 들판에 푸른 풀이 없으니, 무엇을 믿고 두려지 않겠는가.[家如縣磬 野無靑草 何侍而不恐]”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35 易簀 : 簀은 대자리이다. 春秋 때 孔子의 제자 曾參이 죽을 임시에 그가 깔고 누워 있는 자리가 너무 화려해 분수에 맞지 않는다 하여, 아들 曾元에게 자기를 부축해 일으키고 대자리로 바꾸도록 명한 뒤에 바뀐 자리에서 곧 숨을 거두었다. 《禮記 檀弓 上》 후대에 훌륭한 인물이 죽는 것을 비유하는 전고로 사용한다.
역주36 葬非舊陌 : 呂溫이 매우 가난하여, 지금의 山西 永濟인 그의 고향 河中으로 운구해 갈 비용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그가 죽은 衡州에서 가까운 湖北 江陵 땅에 임시로 묻었다는 말이다.
역주37 時中 : 《中庸》 제2장에 孔子가 “군자의 中庸은 인품이 군자이면서 하는 일이 時宜에 부합되기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고 한 데서 나온 것으로, 모든 행위가 그때 처한 시기의 도리에 적합하여 中庸의 도를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는 이상적인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孔子의 경지로, 儒家에서 최상의 덕목으로 간주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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