亦可見古之欲兼詩與文이나 而竝盛者는 亦世所難이니
然而闕其文采
면 固不足以竦動時聽
하고 夸示後學
이니 立言而朽
는 不由也
라
文有二道
하니 辭令褒貶
은 本乎
者也
며 導揚諷諭
는 本乎
者也
라
著述者流
는 蓋出於書之
과 易之
와 하니 其要在於高壯廣厚
하고 詞正而理備
하니
比興者流
는 蓋出於虞夏之詠歌
와 殷周之
하니 其要在於麗則淸越
하여 言暢而意美
하니
其後
以著述之餘
로 攻比興而莫能極
하고 以比興之隙
으로 窮著述而不克備
라
其餘各探一隅하여 相與背馳於道者는 其去彌遠하니 文之難兼이 斯亦甚矣라
若
者
는 少以
著聲於時
하니 其炳耀尤異之詞 諷誦于文人
하여 滿盈于江湖
하고 達于京師
하니라
學富識遠하고 才涌未已하여 其雄傑老成之風이 與時增加라
其季年所作尤善
하니 其爲鄂州新城頌 諸葛武侯傳論
과 餞送梓潼陳衆甫 汝南周愿 河東裴泰 武都符義府 泰山羊士諤 隴西李鍊凡六序
와 廬山禪居記 辭李常侍啓 遠遊賦 七夕賦
는 皆
之選已
라
嗚呼라 公旣悟文而疾하고 旣卽功而廢하며 廢不逾年에 大病及之하여
卒不得窮其工竟其才하여 遺文未克流于世하고 休聲未克充於時라
故得奉公元兄命하여 論次篇簡하고 遂述其制作之所詣하여 以繫于後하노라
이 서문을 살펴보면 옛사람들이 시詩와 문文을 짓는 솜씨를 겸비하려고 하였지만, 이 두 가지가 모두 뛰어난 자는 세상에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문文의 작용은 사령辭令과 포폄褒貶 및 도양導揚과 풍유諷諭뿐이다.
비록 그 말이 저열하고 거친 문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문채文采가 없다면 실로 당시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없고 또 후학에게 과시할 수도 없으니, 이론을 내세우더라도 생명력이 없는 문장은 군자君子가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자는 문장의 근본사상을 견지하는 동시에 반드시 문채를 빌려 그것을 표현한다.
성인聖人에 의해 창작된 것은 경經이라 부르고, 재능 있는 사람이 경經의 뜻을 드러내 밝힌 글은 문文이라 부른다.
문文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사령辭令과 포폄褒貶은 저술류著述類의 산문散文에 근원을 두었고, 도양導揚과 풍유諷諭는 비흥류比興類의 시가詩歌에 근원을 두고 있다.
저술류著述類의 문장은 《상서尙書》의 모謨‧훈訓 등의 문체와 《주역周易》의 상사象辭‧계사繫辭 및 《춘추春秋》의 공자孔子가 수정한 문장에서 나왔으니, 그 특징은 기세가 웅장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문구가 엄정하고 도리가 충분한 것에 있다.
이로 인해 간책簡冊에 써서 서적으로 수장收藏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비흥류比興類의 작품은 우虞‧하夏시대의 노래와 은殷‧주周시대의 풍風‧아雅에서 나왔으니, 그 특징은 곱고 규칙적이며 소리가 맑고 우렁차 언어가 유창하고 정취가 아름다운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읊조리고 외워 널리 전파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이 두 종류의 작품은 그 의도와 의의를 살펴볼 때 서로 달라 합치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글을 짓는 사람은 통상적으로 한쪽에만 뛰어나고 두 방면에 두루 능한 이는 드물다.
그중 어느 누가 이 두 방면에 다 뛰어나 명성을 독차지한 자가 있으면 그를 문예가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비록 옛날 예악禮樂 교화敎化가 융성했던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동시에 출현할 수는 없었다.
당唐나라가 개국한 이후 위의 두 방면을 겸비한 인물로 찬양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은 곧 재동梓潼 진습유陳拾遺이다.
그 뒤에 연국공燕國公 장문정張文貞이 저술류著述類의 문장을 쓰는 여가를 이용하여 비흥류比興類의 작품을 썼으나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장곡강張曲江은 비흥류比興類의 작품을 쓰는 여가를 이용하여 저술류著述類의 문장에 힘을 쏟았으나 완전한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그 나머지는 각기 한 방면을 탐구하여 서로 반대의 길을 내달려 더욱더 멀어졌으니, 문文의 두 영역을 겸하기란 또한 매우 어렵다.
양군楊君 같은 이는 젊었을 적에 시가詩歌로 당대에 명성을 얻었으니, 그 아름답고 특이한 시구詩句는 문인들에 의해 낭송되어 그 명성이 강호에 널리 퍼졌고 도성에까지 파급되었다.
만년에는 각종 문체에 대해 두루 깨우쳤는데, 서술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학문이 풍부하고 식견이 원대하며 재능이 끊임없이 용솟음쳐 웅건하고 노련한 기풍은 날로 더해갔다.
말년의 작품은 더욱 좋았으니, 〈악주신성송鄂州新城頌〉‧〈제갈무후전론諸葛武侯傳論〉과 재동梓潼 진중보陳衆甫, 여남汝南 주원周愿, 하동河東 배태裴泰, 무도武都 부의부符義府, 태산泰山 양사악羊士諤, 농서隴西 이련李鍊을 송별하는 여섯 편의 서序, 그리고 〈여산선거기廬山禪居記〉‧〈사이상시계辭李常侍啓〉‧〈원유부遠遊賦〉‧〈칠석부七夕賦〉 등은 모두 그의 문학작품 중에 우수한 것들이다.
이리하여 진군陳君의 뒤를 따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저술著述과 시가詩歌 두 방면의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공公은 여러 문체의 핵심을 깨닫더니 병을 얻었고 이미 성공에 거의 접근하더니 글쓰기를 중단하였으며, 붓을 놓은 지 한 해가 되기 전에 중병이 들었다.
그리하여 끝내 그 조예를 더 깊게 하고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함으로 인해, 남긴 작품이 세상에 널리 유포되지 못하고 아름다운 명성이 당대에 충만하지 못하였다.
우리들 문예文藝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애석해하고 슬퍼할 일이다.
종원宗元은 선대에 두 가문 간에 우호적인 교분이 있었기에 어릴 적에 공을 만나뵈었다.
그러므로 공의 맏형의 명을 받들어 그의 작품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편집하고 이제 그의 창작이 얻어낸 성취를 기술하여 문집의 후면에 붙인다.
나는 일찍이 자후子厚의 시詩는 창려昌黎보다 낫고, 자후子厚의 문文은 창려昌黎보다 한 걸음이 못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대체로 천균千鈞의 무게가 나가는 쇠뇌는 함부로 쏘기가 어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