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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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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覽子厚書由貶謫永州柳州以後 大較竝從中來
故其爲書多悲愴嗚咽之旨하여 而其辭氣瓌詭跌宕하니 譬之 令人斷腸者也
至其中所論文章處하여는 必本之乎道하여 當與昌黎竝驅 故錄其可誦者二十九首하니라


내가 살펴보건대 유자후柳子厚 편지의 투식은 영주永州유주柳州폄적貶謫된 이후부터 대체로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답임소경서答任少卿書〉와 양운楊惲의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의 양식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그가 쓴 편지는 서글퍼 오열하는 뜻이 다분하여 그 말투가 기이하고 호방하니, 비유하자면 호가胡笳소리를 듣고 새곡塞曲을 접할 때 사람으로 하여금 애가 끊어질 듯 처량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중 문장에 관해 논한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에 그 근간을 두어 마땅히 창려昌黎(韓愈)와 선두를 다툴 만하기 때문에 읽을 만한 것 29수를 초록하였다.


역주
역주1 : 이 비평문을 쓴 茅坤 자신을 말한다. 뒤에도 제목 아래 실린 비평문은 모두 茅坤이 쓴 것이다.
역주2 司馬遷答任少卿及楊惲報孫會宗書 : 司馬遷의 〈答任少卿書〉는 〈柳柳州文抄引〉 주 5) 참조. 楊惲(?~B.C. 56)은 자가 子幼로, 司馬遷의 외손자이다. 霍光의 아들의 모반을 미리 고발한 공으로 平通侯에 봉해지고 中郞將으로 승진하였다. 청렴하고 의리를 좋아하여 재직하는 동안 郎官의 해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청탁과 뇌물이 자행되는 풍조를 막았다. 나중에 太僕 戴長樂의 모함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평민이 되었는데, 초야에서 처자를 거느리고 농사에 힘써 부유해진 가운데 풍류를 즐기며 즐겁게 살았다. 그러자 그의 벗인 安定太守 孫會宗이 주위의 비난 여론을 고려하여 근신하라는 취지의 편지를 보내왔다. 楊惲은 답장에서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가족과 함께 곤경을 치렀다는 것과, 관리는 국가를 위해 전념하고 평민은 생계를 위해 전념하는 법이므로 각기 입장에 따라 추구하는 것도 다르다고 반박하였다. 《文選 권41 報孫會宗書》 司馬遷과 楊惲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억울하고 처량한 처지를 토로하여 상대편의 동정을 구했듯이, 司馬遷이나 楊惲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柳宗元 또한 그들처럼 하였다는 것이다.
역주3 聽胡笳聞塞曲 : 胡笳는 漢나라 때 張騫이 서역에서 들여왔다고 하는 중국 북방 민족의 관악기이고, 塞曲은 변방의 악곡이다. 고향을 멀리 떠나 변방에 머물러 고독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타향의 생소한 음악을 들으면 고향을 그리는 향수에 젖어 서글퍼지기 때문에, 슬픈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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