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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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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이라
見與董生論周易九六義 하여 以爲라하여 而以爲新奇하니
彼畢子董子何膚末於學而遽云云也
都不知一行僧承하여 而果以爲新奇하니 不亦可笑矣哉
韓氏注 曰 乾一爻三十有六策이라하니 則是取其過揲四分而九也 坤之策一百四十有四 曰 坤一爻二十四策이라하니 則是取其過揲四分而六也
孔穎達等作正義論云九六有二義하니
其一者曰 이요 其二者曰 老陽數九 老陰數六이니 二者皆變用하고 周易以變者占이라하니라
鄭玄注易에도 이라 故云九六也라하니라
所以老陽九 老陰六者 九過揲得老陽하고 六過揲得老陰이니 此具在正義乾篇中이니라
亦若此하고 而又詳備니라
何畢子董子之不視其書하고 而妄以口承之也
君子之學 將有以異也어든 必先究窮其書 究窮而不得焉이면 乃可以立而正也어늘
今二子尙未能讀韓氏注孔氏正義하니 是見其道聽途說者
又何能知所謂易者哉리오
足下取二家言觀之 則見畢子董子膚末於學而遽云云也리라
足下所爲書 則諾이나
則此說乃穎達說也 非一行僧畢子董子能有異者也
無乃卽其謬而承之者歟
觀足下出入筮數하고 考校左氏컨대 今之世罕有如足下求易之悉者也
然務先窮昔人書하여 有不可者而後革之 則大善하리니
謹之勿遽하라
宗元白하노라


03. 《주역周易구육설九六說을 논하는 내용으로 유우석劉禹錫에게 보낸 편지
명확하다.
동생董生과 《주역周易》의 의 의미에 대해 토론한 것을 보니, 〈은〉 를 취하여 변한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필중화畢中和일행승一行僧을 이어 이 설을 얻은 것으로, 공영달孔穎達와는 다르다.”고 하며 신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필자畢子동자董子는 어찌 학문을 피상적으로 익히고서 함부로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일행승一行僧한씨韓氏공씨孔氏의 설을 이어받은 것을 전혀 모르고 그만 신기하게 생각하였으니, 또한 가소롭지 않습니까.
한씨韓氏는 “은 216이다.”라는 내용에 주석을 달기를 “의 한 는 36이다.” 하였으니, 이는 네 개씩 세어나갔을 때 결과가 9가 된 것을 취한 것이고, “은 144이다.”라는 내용에 주석을 달기를 “의 한 는 24이다.” 하였으니, 이는 네 개씩 세어나갔을 때 결과가 6이 된 것을 취한 것입니다.
공영달孔穎達 등이 지은 《주역정의周易正義》에 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을 겸할 수 있고, 을 겸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노양老陽의 수는 이고, 노음老陰의 수는 이니, 이 둘은 모두 변용하고 《주역周易》은 변하는 것으로 점을 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현鄭玄의 《주역주周易注》에도 변하는 것으로 점을 치기 때문에 구육九六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양구老陽九’와 ‘노음육老陰六’이란 을 아홉 번 세어 노양老陽을 얻고 여섯 번 세어 노음老陰을 얻은 것이니, 이는 모두가 《주역정의周易正義건편乾篇에 실려 있습니다.
주간자周簡子의 설도 이와 같은데 좀 더 상세합니다.
어찌 필자畢子동자董子는 그 책을 보지 않고 제멋대로 입으로 전한단 말입니까.
군자君子가 학문을 하면서 남과 다른 주장을 하려면 반드시 우선 그 책을 연구해야 하니, 연구하고도 얻는 게 없으면 새로운 이론을 세워서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 두 사람은 아직 한씨韓氏공씨孔氏의 《주역정의周易正義》를 읽지 못했으니, 이는 오다가다 길에서 주워들은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 어찌 이른바 《주역周易》을 알 수 있겠습니까.
족하足下께서 두 학자가 한 말을 구하여 살펴본다면 필자畢子동자董子가 학문을 피상적으로 익히고서 함부로 운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족하足下가 쓴 글에서 원개元凱가 세 《주역周易》을 함께 인용한 것을 부정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명가名價공영달孔穎達과 비교하면 누가 더 드러나느냐.’라고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고 한 부분은 〈인정할 수 없으니,〉 이 설은 곧 공영달孔穎達의 설이지 일행승一行僧필자畢子동자董子가 능히 남다른 견해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견해라고 한 것은〉 그의 잘못된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족하足下서수筮數를 다루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대조 고찰하는 것을 보니, 지금 세상에서 족하足下처럼 《주역周易》을 세심하게 연구하는 자가 드뭅니다.
그러나 힘써서 먼저 옛사람들의 책을 연구해보고 옛사람의 설이 옳지 않은 것을 발견한 뒤에 바꾼다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
부디 삼가고 경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종원宗元은 고합니다.


역주
역주1 與劉禹錫論周易九六說書 : 劉禹錫(772~842)은 彭城 사람으로, 자는 夢得이다. 進士에 급제하고 또 博學宏詞科에 급제하였다. 작자와 함께 王叔文의 永貞革新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뒤에 司馬로 貶謫된 이른바 八司馬 가운데 한 명이다. 뒤에 連州刺史로 자리를 옮겼고, 裴度의 적극적인 천거로 集賢院學士‧太子賓客까지 지냈다. 古文에 조예가 깊고 五言詩를 잘 지었다. 劉禹錫이 〈辯易九六論〉에서, 陽爻는 모두 九가 되고 陰爻는 六이 되는 이유에 대해 그의 벗 董侹(?~812)이 대답한 내용을 인용한 뒤에, 그의 말이 이치에 부합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믿어주지 않아 서글프다고 개탄하였다. 이 편지는 작자가 그 글을 읽어보고 董侹이 鄭玄의 注와 韓康伯의 注, 그리고 孔穎達의 《周易正義》 등 先儒의 설을 두루 연구해보지 않고 주장한 것이므로, 과연 믿을 만한지 의문스럽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시기는 元和 7년(812) 이전으로 추정되며, 劉禹錫은 朗州司馬로 있고 작자는 永州司馬로 있을 때이다.
역주2 取老而變 : ‘老’는 老陽‧老陰을 가리킨다. 《周易》 乾卦 ‘初九’의 孔穎達 疏에 “七은 少陽이 되고 八은 少陰이 되는데 이들은 본질로서 변하지 않고, 九는 老陽이 되고 六은 老陰이 되는데 이들은 문채로서 변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老陽의 수는 九이고, 老陰의 수는 六이므로 陽爻를 九, 陰爻를 六이라 한다는 것이다.
역주3 畢中和承一行僧得此說 : 畢中和는 작자와 동시대 인물로, 揲蓍法(蓍草占을 칠 때 산가지를 세어 卦를 만드는 법)을 깊이 연구하였다는 것 이외의 사적은 알 수 없다. 一行(673 또는 683~727)은 唐나라 때의 天文學家이자 高僧으로, 본명은 張遂이다. 劉禹錫의 〈辯易九六論〉 말미에 “董生이 한 말은 畢中和에게 뿌리를 두었고 中和는 그의 스승에게 뿌리를 두었는데, 그 스승의 학문은 一行에게 뿌리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역주4 孔穎達疏 : 《周易正義》에서 孔穎達이 쓴 疏를 가리킨다. 孔穎達(574~648)은 唐나라 冀州 衡水 사람으로, 자는 沖達 혹은 仲達이라고도 한다. 문장을 잘 짓고 曆法을 통달하였으며, 國子博士‧國子司業‧國子祭酒를 역임하였다. 황제의 명으로 顔師古 등과 함께 《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역주5 韓氏孔氏說 : 韓氏는 晉나라 韓康伯, 孔氏는 孔穎達을 가리킨다. 說은 《周易正義》에서 韓康伯이 쓴 注와 孔穎達이 쓴 疏를 뜻한다.
역주6 乾之策二百一十有六 : 《周易》 〈繫辭 上〉에 나온다. 策은 점을 칠 때 사용하는 蓍草이다.
역주7 陽得兼陰 陰不得兼陽 : 《周易正義》 乾卦 初九의 疏에 나오는데, 이 구절 앞에 “乾體는 3획이고 坤體는 6획이다.[乾體三畫 坤體六畫]”라는 구가 더 있다.
역주8 亦稱以變者占 : 《周易正義》 권1 乾卦의 “初九는 잠긴 용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初九 潛龍勿用]”라고 한 부분의 주석이다.
역주9 周簡子之說 : 簡子는 周弘正(496~574)의 시호이다. 그는 南朝 陳나라 사람으로, 자는 思行이다. 10세 때 《周易》과 《老子》에 통달하고 20세 때 國子監에서 《周易》을 가르쳤으며, 《周易講疏》‧《莊子疏》 등을 저술하였다.
역주10 非元凱兼三易者 : 元凱는 杜預(222~284)의 자이다. 西晉 때 京兆 杜陵 사람이다. 武帝 때 鎭南大將軍‧都督荊州諸軍事로 吳를 멸망시킬 기반을 조성하였고, 太康 원년(280)에 吳를 공격하여 남방 州郡의 항복을 받아낸 공으로 當陽縣侯에 봉해지고 司隷校尉까지 지냈다. 나중에 經籍에 몰두하여 학식과 견문이 넓어졌다. 특히 《春秋左氏傳》을 좋아하여 《春秋左氏傳集解》를 저술하였다. 三易은 세 종류의 《周易》으로, 《連山易》‧《歸藏易》‧《周易》의 합칭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9년에 “穆姜이 東宮에서 죽었다. 처음 그곳에 가 시초점을 쳐 艮卦의 八을 만났다.”라고 한 부분의 ‘艮卦의 八을 만났다.’라는 것에 대해 杜預가 점치는 기준이 서로 다른 《周易》을 함께 적용하여 해석하였는데, 劉禹錫이 그의 〈辯易九六論〉에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시초점을 칠 때 《周易》은 변하는 爻인 九와 六, 곧 老陽과 老陰을 가지고 점을 치고, 《連山易》과 《歸藏易》은 변하지 않는 爻인 七과 八, 곧 少陽과 少陰으로 점을 치기 때문이다.
역주11 若曰孰與穎達著 : 劉禹錫이 쓴 〈辯易九六論〉에 있는 내용 중에 앞뒤의 문구는 생략하고 일부만 인용한 것으로, 이 문구만으로는 본의가 드러나지 않는다. 〈辯易九六論〉에서 劉禹錫이 “내가 董生과 九와 六의 의미에 관해 토론하였는데, 그의 설이 참으로 이치에 부합되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또 左氏의 두 책(《國語》와 《春秋左氏傳》)의 내용과 대조해보니 마치 형체와 그림자가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팔을 내저으며 하는 말이 ‘董生의 名價를 孔穎達과 비교하면 누가 더 드러나고 재주를 元凱(杜預)와 비교하면 누가 더 뛰어난가?’라고 한다. 해가 가고 날이 가도 董生의 설을 제대로 아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劉賓客文集 권7 論 下》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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