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之著者爲經이요 翼而成之者爲論이니 其流而來者는 百不能一焉이나
而今之言禪者
는 有流盪舛誤
를 迭相師用
하고 妄取空語
하여 而脫略
하고 顚倒眞實
하여 以陷乎己
하고 而又陷乎人
이라
觀經得般若之義
하고 讀論悅
之理
하여 晝夜服習而身行之
라
有來求者
면 則爲講說
하니 從而化者 皆知佛之爲大
와 法之爲廣
과 菩薩大士之爲雄
과 修而行之者爲
과 蕩而無之者爲
라
吾病世之傲逸者는 嗜乎彼而不求此라 故爲之言하노라
09.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는 침상인琛上人을 송별하는 서문
한창려韓昌黎가 문창사文暢師에게 준 문장의 취지보다 못하고 견해 또한 지리멸렬하다.
부처의 자취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남아 있는 것은 부처의 말씀이다.
말씀을 저술한 것이 경經이고 이것을 도와 완성한 것이 논論인데, 그것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법法 중에 지극한 것은 《반야경般若經》보다 더한 것이 없고, 경經 중에 큰 것은 《열반경涅槃經》보다 더한 것이 없다.
세상의 상사上士 가운데 장차 이를 경유하여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이 경經과 논論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선禪을 말하는 자들은 기준이 없어 잘못된 것을 서로 번갈아 준수하고, 멋대로 부질없는 말을 취하여 방편方便을 도외시하고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고 또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트린다.
또 교리의 본체에 대해서는 능히 말하면서도 그 응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들은 본체와 응용 두 가지는 잠시라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분리하면 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의 〈식견이 있는 자가〉 크게 우려하는 바이다.
그는 경經을 보고 반야般若의 의미를 깨달았고 논論을 읽고 삼관三觀의 이치를 기뻐하여 밤낮으로 익히고 몸소 그것을 실천하였다.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진리를 설명해주니, 그로 인해 교화된 사람은 모두 부처의 크심과 불법佛法의 광활함과 보살대사菩薩大士의 웅대함을 알게 되었고, 불법을 수행한 자는 공空이 되고, 방탕하여 아무것도 없는 자는 애礙가 된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침상인琛上人은 증상만增上慢을 하는 자와는 다르다.
이런 자들과 다른데도 〈훌륭하다는〉 이름을 얻지 못한 경우는 나는 없다고 본다.
그는 장차 그 도道를 넓혀서 멀리까지 파급시키려 하기 때문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도성에서 이곳으로 왔다가 또 남으로 가서 계림桂林으로 나가려고 하니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세상의 오만하고 방종한 자들이 자신의 방식만 좋아하고 이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걱정되므로 이 서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