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厚最失意時에 最得意書니 可與太史公與任安書相參하여 而氣似嗚咽蕭颯矣라
予覽蘇子瞻安置海外時詩文及復故人書면 殊自曠達하니 蓋由子瞻晩年深悟禪宗이라 故獨超脫較子厚相隔數倍라
伏蒙賜書하니 誨諭微悉重厚이라 欣踊恍惚에 疑若夢寐라
伏念得罪來五年에 未嘗有故舊大臣이 肯以書見及者하니 何則고
殘骸餘魂이라 百病所集이요 痞結伏積하여 不食自飽라
或時寒熱
이면 水火互至
하여 內消肌骨
하니 非獨
爲也
라
忽奉敎命하니 乃知幸爲大君子所宥하여 欲使膏肓沈沒로 復起爲人하니
過不自料하여 懃懃勉勵하되 唯以中正信義爲志하고 以興堯舜孔子之道하여 利安元元爲務하고 不知愚陋不可力彊하니
其素意如此也라 末路厄塞臲兀하여 事旣壅隔하고 狠忤貴近하여 狂疎繆戾하여 蹈不測之辜라
加以素卑賤暴起領事하니 人所不信이요 射利求進者 塡門排戶이라가 百不一得이라
以此大罪之外에 詆訶萬端이 旁午搆扇하고 便爲敵讐하여 協心同攻하고 外連彊暴失職者하여 以致其事라
年少氣銳에 不識幾微하며 不知當否하고 但欲一心直遂라가 果陷刑法하니 皆自所求取得之라
又不能卽死하여 猶對人言語하며 求食自活하여 迷不知恥하여 日復一日이라
煢煢孤立
하여 이나 荒陬中少士人女子
하여 無與爲婚
이요 世亦不肯與罪人親昵
이라
每當春秋時饗에 孑立捧奠하고 顧眄無後繼者하여 懍懍然欷歔惴惕하니 恐此事便已에 摧心傷骨하여 若受鋒刃이라
自譴逐來로 消息存亡이 不一至鄕閭일새 主守者固以益怠라
晝夜哀憤
하여 懼便毁傷
하고 芻牧不禁
하여 以成大戾
라
想田野道路에 士女遍滿하고 皂隷庸丐 皆得上父母丘墓하여 馬醫夏畦之鬼도 無不受子孫追養者라
城西有數頃田과 樹果數百株하니 多先人手自封植이라
家有賜書三千卷하여 尙在善和里舊宅이로되 宅今已三易主하니 書存亡不可知라
立身一敗에 萬事瓦裂하고 身殘家破하여 爲世大僇하니 復何敢更望大君子撫慰收卹하여 尙置人數中耶아
是以當食不知辛醎節適하고 洗沐盥漱動逾歲時하여 一搔皮膚에 塵垢滿爪하니 誠憂恐悲傷을 無所告愬以至此也라
自古賢人才士 秉志遵分
이라가 被謗議不能自明者
라
今已無古人之實爲而有其詬하니 欲望世人之明己라도 不可得也라
하고 하니 此誠知疑似之不可辯
이라 非口舌所能勝也
라
今以恇怯淟涊하고 下才末伎로 又嬰恐懼痼病하니 雖欲慷慨攘臂하여 自同昔人이나 愈疎闊矣라
賢者不得志於今이면 必取貴於後니 古之著書者皆是也라
雖欲秉筆覼縷나 神志荒耗하여 前後遺忘하여 終不能成章이라
往時讀書에 自以不至觝滯러니 今皆頑然하여 無復省錄이라
每讀古人一傳에 數紙已後는 則再三伸卷하여 復觀姓氏라가 旋又廢失하니 假令萬一除刑部囚籍하여 復爲士列이라도 亦不堪當世用矣리라
但以通家宗祀爲念하여 有可動心者어든 操之勿失하라
姑遂少北하여 益輕瘴癘하고 就婚娶하여 求胤嗣라가
有可付託하여 卽冥然長辭면 如得甘寢하여 無復恨矣리라
02. 경조윤京兆尹 허맹용許孟容에게 부친 편지
유자후柳子厚가 가장 실의에 빠졌을 때 쓴 가장 만족스러운 편지로,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이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와 서로 견줄 만하여 그 분위기가 슬픔에 겨워 목이 메일 정도로 처량하다.
내가 소자첨蘇子瞻(蘇軾)이 멀리 해변海邊에 안치되었을 때 쓴 시문詩文과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건대 매우 소탈하고 호방하였으니, 그 이유는 자첨子瞻이 만년에 선종禪宗의 교리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현실을 초탈한 정도가 자후子厚에 비해 몇 갑절이나 되어서이다.
종원宗元은 오장五丈 좌전座前에 재배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삼가 내려주신 편지를 받아보니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말씀이 자세하고 후덕하였으므로 뛸 듯이 기쁘고 어리둥절하여 꿈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편지를 받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뛰는 가슴을 스스로 진정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제가 죄를 짓고 이곳에 온 지 5년이 지났지만 벗이나 대신들 중에 편지를 보내온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저에게 가해진 죄책과 비방이 겹쌓여 저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이 도처에 깔려 있으므로 진정 그들로 하여금 이상하다는 생각과 두려운 느낌을 갖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처럼 멍해져서 문밖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으며, 제가 범한 허물로 인해 심각한 우수사려憂愁思慮에 휩싸였습니다.
상처받은 몸과 영혼이라 온갖 병이 한 몸에 모여들었고, 뱃속에 더부룩하게 체증이 가라앉지 않아 음식을 먹지 않아도 절로 배가 부릅니다.
간혹 오한과 신열이 일어날 때는 수기水氣와 화기火氣가 번갈아 기승을 부려 몸 안의 살과 뼈를 녹이고 있으니, 건강이 좋지 않은 이유가 장독瘴毒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뜻밖에 가르침을 받고 보니, 다행히도 대군자大君子께서 관용을 베풀어주시어 병이 고황膏肓에 깊이 든 자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 사람이 되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평소에 무슨 명성이 있었기에 감히 이와 같은 은혜를 입는단 말입니까.
종원宗元은 젊은 시절부터 이미 죄를 지은 그들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당초에 그들의 재능이 남들과 다른 것을 특이하게 여겨 그들과 함께 인의仁義를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면서 정성을 다해 노력하되, 오직 정직正直과 신의信義를 신조로 삼고 요堯‧순舜과 공자孔子의 도를 일으켜 세워 만백성을 이롭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를 목표로 삼았을 뿐, 우매하고 고루한 사람이 억지로 힘써서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제 본디 생각은 그러하였는데 결국에는 험난한 상황에 처해 추진하던 일이 이미 막힌데다 존귀한 근신近臣의 비위를 크게 거슬러 가면서 함부로 행동하고 순리順理를 어김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게다가 본디 신분이 낮은 사람이 갑자기 기용되어 국사國事를 관리하니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았고, 이익을 탐하고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문안으로 몰려들었으나 백 가지 중에 하나도 얻어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하루아침에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자 다시 원망과 비방을 날조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큰 죄목 이외에 갖가지 악담이 어지럽게 불어나 곧 저의 원수가 되어 한마음으로 공격하고 밖으로는 포악하고 관직을 잃은 자들과 연합하여 그 사건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어르신께서 보고 들으신 일입니다.
이것을 감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했었는데 저의 심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다시 이 편지에다 적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해도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상을 받는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그 동지들은 요행히도 사면을 받고 각자 좋은 자리를 얻어 하는 일도 없이 가만히 앉아 녹봉을 먹고 있으니, 조정의 은덕이 실로 너무 후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어찌 감히 폐기되어 금고禁錮에 처해진 처벌에서 벗어나 기대 밖의 은택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나이가 어려 혈기가 앞선 나머지 위험이 닥치기 전에 미리 그 조짐도 모르고, 진행하는 일이 합당한지의 여부도 알지 못하면서 오직 일편단심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가다가 결국 형벌에 걸려들었으니, 이는 모두 제가 자초해 얻은 것입니다.
종원宗元은 여러 당인黨人 가운데 죄상이 가장 심하여 신령神靈이 벌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죽지 못하여 사람들을 마주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거리를 구해 스스로 연명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른 채 하루하루 날짜를 넘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하고 있는 데에는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 유씨柳氏가 성을 얻은 이후 2,500년 동안 대대로 종가宗家의 맥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범상치 않은 죄를 안고 동남방 오랑캐의 고장에 머무르고 있노라니, 지대가 낮아 습도가 높고 안개 기운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어느 날 갑자기 죽어 골짜기에 버려져서 조상의 혈통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전전긍긍 통한痛恨을 품어 심장이 뜨겁게 끓어오릅니다.
혈혈단신 외로운 몸으로 아직 자식을 두지 못했는데 황량하고 외진 지역에 선비의 딸이 적어 혼인을 맺을 만한 곳이 없고, 있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죄인과 친밀한 관계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종통宗統을 잇는 중책이 실낱같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매년 봄가을 두 철마다 조상에게 제향祭享을 올릴 적에는 저 혼자 외롭게 서서 제물祭物을 올리며 고개를 돌려 돌아보면 제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낼 자가 없어 가슴이 뜨끔해져 근심과 두려움의 한숨을 쉬니, 이 제사를 올리는 일이 앞으로 곧 중단될 것만 같아 마치 칼날에 찍힌 듯이 심장이 무너지고 뼛속이 아픕니다.
이는 분명히 어르신께서도 저와 함께 근심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일일 것입니다.
조상의 묘지가 만년성萬年城 남쪽에 있는데 선대의 제사를 주관할 만한 다른 자제가 없어 제가 일방적으로 그 부근의 마을 사람에게 제사를 대신 지내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폄적貶謫되어 쫓겨난 이후 저의 생사에 관한 소식이 한 번도 시골마을에 전해지지 않았으니, 제사를 주관하고 묘역을 수호하는 자가 필시 더욱 태만히 할 것입니다.
저는 밤낮으로 서글프고 화가 북받쳐서 혹시 묘역의 송백松柏을 손상하고 가축의 방목을 금하지 않아 큰 문제를 만들지 않았나 두렵습니다.
근대의 예법禮法은 성묘省墓를 중시하는데 저는 지금 성묘하지 못한 지 4년이 지났습니다.
매번 한식寒食을 만나면 북쪽을 향해 오랫동안 소리쳐 울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쥐어박곤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날에는 들판이나 도로에 남녀가 가득하고 남의 집 노복이나 품팔이하는 자, 그리고 거지까지도 모두 부모의 무덤에 올라가서 마의馬醫(말을 돌보는 수의獸醫)나 농부의 혼령조차 자손의 제향을 받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와 같은 소망을 이룰 수 없으니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장안성長安城 서쪽에 농토 수백 묘와 과일나무 수백 그루가 있는데 대부분 돌아가신 부친께서 손수 북돋워주고 재배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황폐해지고 혹시 남들이 베어 가지 않았을까 걱정되지만 더 이상 어떻게 돌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친지로부터 기증받은 책 3,000권이 아직 선화리善和里 옛 집에 있지만 그 집이 지금 이미 세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으니, 책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넘겨준 사람이나 받은 우리나 모두 소중히 여기는 것이기에 항상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일이 한번 실패하자 세상만사가 와해되어 몸은 쇠약해지고 가정은 깨져서 세상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사람이 되었으니, 또 어찌 감히 다시 어르신과 같은 대군자大君子께서 위로하고 거두어 일반인의 반열 속에 놓아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음식을 먹을 때마다 맵거나 짠 맛이 적당한지 그 맛을 모르고 목욕하고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는 것도 매번 몇 개월을 넘겨 한 번 피부를 긁으면 때가 손톱에 그득할 정도이니, 이는 근심과 두려움, 그리고 슬픈 심정을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로부터 어진 덕을 지닌 사람과 재능이 있는 선비 중에 이상理想을 견지하고 본분本分을 지키다가 남들의 비방을 당해 자기의 무고함을 스스로 해명하지 못한 자들이 무려 수백 명에 이릅니다.
그래서 형이 없는데 형수를 훔쳤다느니, 아버지를 여윈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을 때렸다느니 하는 비방을 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호걸이 그 무고함을 분명하게 가려내주어 마침내 역사서에 빛이 나게 하였습니다.
관중管仲은 도적을 만났지만 그를 천거하여 공신이 되게 하였고, 광장匡章은 불효자란 이름을 얻었지만 맹자孟子가 그를 예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옛사람의 그와 같은 내실은 없으면서 비방만 있으니, 세상의 어떤 사람이 저의 무고함을 밝혀주길 기대하더라도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직불의直不疑는 금金을 사서 같은 방의 동료에게 갚았고, 유관劉寬은 수레에서 내려 소를 시골사람에게 돌려주었으니, 이로써 진위眞僞의 구별이 애매모호하여 가려낼 수 없는 일은 입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정첨鄭詹은 진晉나라에 구속되었다가 마침내 죽지 않았고, 종의鍾儀는 남방의 음악을 연주하였다가 결국 조국으로 돌아왔고, 숙향叔向은 옥중에 갇혔다가 화를 면하게 될 것을 스스로 예견하였고, 범좌范座는 지붕 용마루에 걸터앉았다가 죽을 처지에서 살아났고, 괴통蒯通은 팽형烹刑을 당하기 직전 솥귀를 부여잡고 있다가 제齊나라의 상객上客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창張蒼과 한신韓信은 도끼로 참형에 처해질 처지에 놓였다가 마침내 장수며 재상 자리를 거머쥐었고, 추양鄒陽은 옥중에서 편지를 올려 스스로 살아났고, 가생賈生은 쫓겨났다가 다시 선실宣室로 불려 들어갔고, 예관倪寬은 북방으로 배척되어 죽을 고생을 하다가 나중에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고, 동중서董仲舒와 유향劉向은 하옥되어 사형을 당할 뻔하다가 한漢나라 유학儒學의 종장宗匠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품성과 재능이 뛰어나 논변이 거침없으며 사고가 기발하고 건실한 인물들이라 스스로 역경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겁이 많아 나약한 기질과 볼품없는 재능에다 또 두려움으로 심장이 떨리는 고질에까지 걸렸으니, 비록 용기를 내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스스로 옛사람처럼 똑같이 해보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어색할 뿐입니다.
현능賢能한 자가 당대에 뜻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후세에 존중받을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니 옛날에 글을 저술한 자들은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종원宗元도 최근에 이와 같은 일에 종사하고 싶습니다만 역량이 부족하고 재능이 졸렬하여 그렇다 할 장점과 이해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붓을 잡고 하나하나 기술하려고 해도 정신이 어지럽고 어두워 뒷부분을 쓰는 동안에 앞부분을 잊어버려 끝내 완전한 문장을 만들지 못합니다.
지난날 글을 읽을 적에는 스스로 막히는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는다고 여겼었는데 이제는 머리가 둔해져서 더 기억을 잘하지 못합니다.
매번 옛사람이 기록한 한 편의 글을 읽노라면 두세 장 이후부터는 곧 두 번 세 번 앞 권을 펴 다시 작자의 성씨姓氏를 살펴보고 잠시 뒤에 또 잊어버리니, 가령 만에 하나 제 이름이 형부刑部의 죄수 명부에서 삭제되어 다시 사류士類의 반열에 끼이게 된다 해도 이 세상에 쓰이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쓸데없는 곳이라 해도 애처로운 마음을 가져주시고, 보답을 받지 못할 곳이라 해도 은덕을 내려주십시오.
제가 오직 어르신께 원하는 것은, 우호적인 정분을 유지해온 가문의 제사를 받들어 모실 사람을 염두에 두시어, 속마음을 터놓고 부탁할 만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기회를 단단히 붙잡고 놓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고향 장안長安으로 돌아가 조상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선친先親이 살던 집에 기거하며 남은 세월을 보내는 것은 감히 바라지 못합니다.
그저 원하는 것은 귀양지를 중원中原과 가까운 북쪽으로 조금 옮겨 장독瘴毒의 위험이 좀 더 경감되고 장가를 들어 대를 이을 자식을 얻는 일이 용이해졌으면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가문의 장래를 맡길 자식만 있다면 곤하게 잠든 것처럼 조용히 이 세상을 하직하고 더 이상 유감이 없겠습니다.
제 편지의 내용이 잡다하여 제 의도를 원만하게 서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제 생각을 더듬어보시면 군자君子께서 분명히 저의 폐부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