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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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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首尾二千言如一線이나
然强合乎道者
張操來하여 致足下四月十八日書하니 始復去年十一月書
之說及親戚相知之道하니 吾於足下固具焉不疑어늘
又何逾歲時而乃克也
徒親戚 不過欲其勤讀書하여 決科求仕하고 不爲大過 如斯已矣
告之而不更則憂하고 憂則思復之하며 復之而又不更則悲하나니 悲則憐之
何也
戚也니라
安有以堯舜孔子所傳者而往責焉者哉리오
徒相知 則思責以堯舜孔子所傳者하여 就其道하고 施於物이니 斯已矣니라
告之而不更則疑하고 疑則思復之하며 復之而又不更則去之하나니
何也
外也니라
安有以憂悲且憐之之志而强役焉者哉리오
吾於足下固具是二道하니 雖百復之亦將不已커든 況一二敢怠於言乎리오
僕之言車也 以內可以守하고 外可以行其道어늘
今子之說曰 柔外剛中이라하니
子何取於車之疏耶
果爲車柔外剛中이면 則未必不爲弊車 果爲人柔外剛中이면 則未必不爲恒人이라
夫剛柔無常位하여 皆宜存乎中이라가 有召焉者在外 則出應之
應之咸宜 謂之이니 然後得名爲君子니라
必曰外恒柔라하면 及爲 君子其不克歟
中恒剛이면 則當하고 하며 之事 君子其卒病歟
吾以爲剛柔同體하여 應變若化 然後能志乎道也니라
今子之意近是也 其號非也니라
內可以守하고 外可以行其道 吾以爲至矣어늘 而子不欲焉하니 是吾所以惕惕然憂且疑也니라
今將申告子以古聖人之道하리라
書之言堯曰 이라하고 言舜曰 이라하고 라하고 이라하고 高宗曰 하라하고
武王引天下誅紂하고 而代之位하니 其意宜肆어늘이라하고
周公踐天子之位하여 하고 孔子曰 이라하고 其弟子言曰 라하니라
今吾子曰 自度不可能也라하니
然則自堯舜以下 與子果異類耶
樂放弛而愁檢局 雖聖人與子同이나
聖人能求諸中하여 以厲乎己하고 久則安樂之矣어늘 子則肆之하니 其所以異乎聖者 在是決也니라
若果以聖與我異類 則自堯舜以下 皆宜縱目卬鼻 四手八足 鱗毛羽鬣으로 飛走變化 然後乃可
苟不爲是 則亦人耳어늘 而子擧將外之耶
若然者 聖自聖하고 賢自賢하고 衆人自衆人하여 咸任其意 又何以作言語立道理하여 千百年天下傳道之리오
是皆無益於世하고 獨遺好事者藻繢文字하여 以矜世取譽 聖人不足重也니라
吾以子近上智어늘 今其言曰 自度不可能也라하니 則子果不能爲中人以上耶
吾之憂且疑者以此니라
凡儒者之所取 大莫尙孔子
孔子七十而縱心하니 彼其縱之也 不踰矩而後縱之하니라
今子年有幾
自度果能不踰矩乎
而遽樂於縱也
今夫狙猴之處山 叫呼跳梁하여 其輕躁狠戾異甚이나 然得而縶之 未半日則定坐하여 求食唯人之爲制
其或優人得之하여 加鞭箠하고 狎而擾焉하면 跪起趨走 咸能爲人所爲者하고 未有一焉狂奔掣頓하고 踣弊自絶이라
故吾信夫狂之爲聖也로라
今子有賢人之資하되 反不肯爲狂之克念者하여 而曰我不能이라하니 捨子其孰能乎
凡吾之致書爲說車 皆聖道也
今子曰 我不能爲車之說이라 但當則法聖道而內無愧라야 乃可長久라하니
嗚呼 吾車之說 果不爲聖道耶
吾以內可以守하고 外可以行其道告子어늘 今子曰 我不能翦翦拘拘하여 以同世取榮이라하니 吾豈敎子爲翦翦拘拘者哉
子何考吾說車之不詳也
吾之所云者 其道自堯舜禹湯高宗文王武王周公孔子皆由之어늘 而子不謂聖道하니 抑以吾爲與世同波하여 工爲翦翦拘拘者
以是敎己라하여 固迷吾文하고 而懸定吾意하니 甚不然也
聖人不以人廢言이라
吾雖少時與世同波 然未嘗翦翦拘拘也니라
又子自言 處衆中偪仄擾攘하여 欲棄去不敢하여 猶勉强與之居라하니
苟能是 何以不克爲車之說耶
忍汚雜囂譁하여 尙可恭其體貌하고 遜其言辭어늘 何故不可吾之說
吾未嘗爲佞且僞하니
其旨在於恭寬退讓하여 以售聖人之道하고 及乎人이니 如斯而已矣니라
彼七八聖人者所爲若是로되 豈恒媿於心乎
慢其貌하고 肆其志하여 茫洋而後言하고 偃蹇而後行하며 道人是非하여 不顧齒類 人皆心非之하여 曰 是禮不足者라하고 甚且見罵하리니
如是而心反不媿耶
聖人之禮讓 其且爲僞乎 爲佞乎
今子又以行險爲車之罪하니
夫車之爲道 豈樂行於險耶
度不得已而至乎險이라도 期勿敗而已耳니라
夫君子亦然하여 不求險而利也
故曰 라하고 이라하니 不幸而及於危亂이라도 期勿禍而已耳니라
且子以及物行道爲是耶 非耶
하고 濟天下하니 孔子仁之하니
凡君子爲道 捨是宜無以爲大者也니라
今子書數千言 皆未及此하니 則學古道하고 爲古辭하여 尨然而措於世라도 其卒果何爲乎
是之不爲하고以爲慕하여 棄大而錄小하며 賤本而貴末하여 夸世而釣奇하고 苟求知於後世하여 以聖人之道爲不若二子하니 僕以爲過矣라하노라
彼甘羅者 左右反覆하여 得利棄信하여 使秦背燕之親己而反與趙合하여 以致危於燕이라
天下是以益知秦無禮不信하여 視函谷關若虎豹之窟하니 羅之徒實使然也니라
子而慕之하니 非夸世歟
彼終軍者 誕譎險薄하여 不能以道匡漢主好戰之志하고 視天下之勞 若觀蟻之移穴하여 翫而不戚하고 人之死於者 赫然千里하되 不能諫而又縱踴之하고
己則決起奮怒하여 掉强越하고 하여 欲蠱奪人之國이라가 智不能斷而俱死焉하니
是無異之遇嗾 呀呀而走하여 不顧險阻하고 唯嗾者之從하니 何無己之心也
子而慕之하니 非釣奇歟
二小子之道 吾不欲吾子言之하노라
孔子曰 是聞也 非達也라하시니
使二小子及孔子氏 하리니 是固不宜以爲的也니라
且吾子之要於世者 處耶 出耶
主上以聖明으로 進有道하여 興大化하니 枯槁伏匿縲錮之士 皆思踴躍洗沐하여 期輔堯舜이라
萬一有所不及이라도 丈人方用德藝達於邦家하여 爲大官하여 以立於天下하니 吾子雖欲爲處 何可得也리오
則固出而已矣니라
將出於世而仕어늘 未二十而任其心하니 吾爲子不取也로라
好搏虎라가 卒爲善士하고 狂橫이라가 一旦改節하니 皆老而自克이라
今子素善士 年又甚少하여 血氣未定이어늘 而忽欲爲하여 守而不化하여 不肯入堯舜之道하니 此甚未可也니라
吾意足下所以云云者 惡佞之尤而不悅於恭耳
觀過而知仁하니 彌見吾子之方其中也 其乏者 獨外之圓耳
라하니 吾子其類是歟
佞之惡而恭反得罪로다
聖人所貴乎中者 能時其時也
苟不適其道 則肆與佞同하니 山雖高하고 水雖下라도 其爲險而害也 要之不異
足下當取吾說車하여 申而復之 非爲佞而利於險也明矣리라
吾子惡乎佞而恭且不欲이어늘 今吾又以圓告子하니 則圓之爲號 固子之所宜甚惡
方於恭也 又將千百焉이리라
然吾所謂圓者 不如世之突梯苟冒以矜利乎己者也
固若輪焉이니 非特於可進也 銳而不滯이요 亦將於可退也 安而不挫
欲如循環之無窮이요 不欲如轉丸之走下也
이니 夫豈不以圓克乎
而惡之也리오
吾年十七求進士하여 四年乃得擧하고 二十四求博學宏詞科하여 二年乃得仕하니
其間與恒人爲群輩數十百人이라
當時志氣類足下하여 時遭訕罵詬辱하니 不爲之面이면 則爲之背
積八九年 日思摧其形하고 鋤其氣하여 雖甚自折挫 然已得號爲狂疎人矣
及爲藍田尉하여 留府庭하여는 旦暮走謁於大官堂下 與卒伍無別하고 居曹則俗吏滿前 更說買賣하고 商算贏縮하니라
又二年爲此 度不能去하여 益學老子하여 하니
雖自以爲得이나 然已得號爲輕薄人矣
及爲御史郞官하여는 自以登朝廷 利害益大라하여 愈恐懼하여 思欲不失色於人하니
雖戒礪加切이나 然卒不免爲連累廢逐하니라
猶以前時遭狂疎輕薄之號 旣聞於人하고 爲恭讓未洽이라 故罪至而無所明之하고 到永州七年矣
蚤夜遑遑하여 追思咎過하여 往來甚熟하고 講堯舜孔子之道亦熟하여
益知出於世者之難自任也하니라
今足下未爲僕嚮所陳者하니 宜乎欲任己之志리니
此與僕少時何異리오
然循吾嚮所陳者而由之 然後知難耳리라
今吾先盡陳者 不欲足下如吾更訕辱하고 被稱號하여 已不信於世하고 而後知慕中道하여 費力而多害 故勤勤焉云爾而不已也로라
子其詳之熟之하여 無徒爲煩言往復이면 幸甚이라
又所言書意有不可者하니
令僕專專爲掩匿覆蓋之하여 愼勿與不知者道하니 此又非也니라
凡吾與子往復 皆爲言道 道固公物이라 非可私而有니라
假令子之言非是 則子當自求暴揚之하여 使人皆得刺列하고 卒采其可者하여 以正乎己 然後道可顯達也리라
今乃專欲覆蓋掩匿하니 是固自任其志하고 而不求益者之爲也
君子之過 如日月之蝕이니 又何蓋乎리오
是事 吾不能奉子之敎矣 幸悉之하라
足下所爲書 言文章極正하고 其辭奧雅
後來之馳於是道者 吾子且爲리니 何可當也리오
其說韓愈處甚好
其他但用莊子國語文字太多하여 反累正氣하니
果能遺是 則大善矣리라
憂閔廢錮하고하여 意思懇懇하니 誠愛我厚者
吾自度罪大하니 敢以是爲欣且戚耶
但當把鋤荷鍤하여 決溪泉爲圃以給茹하고 其隙則浚溝池하고 藝樹木하며 行歌坐釣하여 望靑天白雲이니 以此爲適이면 亦足老死無戚戚者
時時讀書하여 不忘聖人之道하고 己不能用이라도 有我信者 則以告之하리라
하여 政事益修
丈人日夕還北闕이면 吾待子郭南亭上하리니 期口言不久矣
至是當盡吾說하리라
今因道人行하여 粗道大旨如此
宗元白하노라


05. 수레 이야기의 의의를 해석한 것에 대해 양회지楊誨之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2천 자에 이르는 문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의 실처럼 이어졌다.
그러나 논리는 에다 억지로 맞춘 것이다.
장조張操가 와서 족하足下의 4월 18일 편지를 전해주기에 뜯어보고 지난해 11월에 보낸 편지의 답장이 이제야 온 것을 알았네.
〈내가 이전 편지에서〉 〈설거說車〉에 관한 설을 말하면서 친척과 벗에 대한 도리를 언급하였는데, 이 두 가지 도리를 내가 족하足下에 대해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네.
그런데 또 어찌 해를 넘겨가며 반론하여 나를 이기려 하는가?
그저 친척일 경우에는, 상대가 부지런히 책을 읽어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하고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이 정도일 뿐이네.
이 말을 고했는데도 고치지 않으면 걱정하고, 걱정하면 다시 말해볼까 생각하고, 다시 말해도 고치지 않으면 슬퍼하니 슬퍼하면 그가 불쌍해지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친척이기 때문이네.
어찌 공자孔子가 전한 를 얻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일이 있겠는가.
그저 벗일 경우에는, 상대가 공자孔子가 전해오는 도를 얻도록 요구하여 그 도를 성취하고 만물에 베풀 것을 생각하니, 이 정도일 뿐이네.
이 말을 고했는데도 고치지 않으면 의심하고, 의심하면 다시 말해볼까 생각하고, 다시 말해도 고치지 않으면 그를 버리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바깥 사람이기 때문이네.
어찌 걱정하고 슬퍼하고 또 불쌍해하는 마음을 그에게 억지로 적용할 일이 있겠는가.
나는 족하足下에 대해 본디 이 두 가지 도리를 모두 갖추고 있으니, 고해주는 일을 비록 백 번을 반복하더라도 그만두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한두 번 말하는 정도를 감히 게을리 하겠는가.
내가 수레에 대해서 말한 의도는 안으로는 를 지킬 수 있고 밖으로는 그 도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이것을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말하였네.
그대는 어찌하여 수레의 이치를 허술하게 취했는가.
과연 수레가 외유내강하게 되면 사용하지 못할 망가진 수레가 되지 않을 수 없고, 과연 사람이 외유내강하게 되면 변변치 않은 평범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대체로 는 일정한 자리가 없이 모두 내면에 존재해 있다가 밖에서 부르는 것이 있으면 나가서 응하는 것이네.
응하는 것이 모두 도리에 적합한 것을 시중時中이라 하니, 그런 다음에 군자君子라고 이름할 수 있다네.
밖은 항상 부드러워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공자孔子가 행한 협곡夾谷에서의 일이나 정공定公무자武子의 누대로 피신하는 경우를 만났을 때, 그리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군주를 위해 충절忠節을 바치는 일이며, 잘못된 군주의 마음을 고치는 일과 백성을 엄숙하게 대하는 일 등을 군자가 능히 이겨내지 못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안이 항상 강하다면, 기운을 가라앉히고 안색을 부드럽게 하며 용의를 단정히 하고 태도를 공순히 하며, 무고하게 벌 받는 사람을 가련하게 여기고 죄수를 부드럽게 신문하는 일 등을 군자가 끝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지 않겠는가.
나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한 몸이 되어 임기응변臨機應變처럼 완전하게 해낸 다음에야 능히 성인의 도에 뜻을 둘 수가 있다고 생각하네.
지금 그대의 뜻은 이에 가깝지만 내세우는 말은 틀렸네.
안으로는 도를 지킬 수 있고 밖으로는 그 도를 행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으뜸으로 여기는데 그대는 수긍하려 하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안절부절 걱정하고 의심하는 이유이네.
이제 거듭 그대에게 옛 성인의 도를 말하고자 하네.
서경書經》에서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했다.”고 하고, 임금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진실하고 독실했다.”고 하였으며, 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고, 은 망설이지 않고 허물을 고쳤고, 고종高宗은 “네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라.”고 하였네.
그리고 문왕文王은 조심하고 신중하며 〈정무에 매진하느라〉 해가 기울도록 밥을 먹을 겨를이 없었고 〈좋은 계책이 떠오르면〉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네.
무왕武王은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서 를 정벌하고 자기가 천자 자리에 대신 앉았으니 그의 마음이 방자할 만하건만 “나 소자小子는 감히 정무를 게을리하고 안일함을 즐길 수 없다.” 했네.
주공周公은 천자의 직무를 대행하는 자리에 올라서 〈어진 인재를 끊임없이 접견하느라 밥 먹을 때나 머리 감을 때 선비가 찾아오면〉 감던 머리를 움켜쥐고 먹던 밥을 뱉었으며, 공자孔子는 “말이 충성스럽고 진실하며 행실이 독실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했고, 그의 제자는 “선생께서는 온화하고 선량하고 엄숙하고 검소하고 겸양하는 덕으로 군주가 예우해주는 것을 얻었다.”고 하였네.
지금 그대는 “스스로 헤아려볼 때 나는 불가능하다.”고 했네.
그렇다면 부터 그 이하 사람들은 그대와 과연 다른 부류인가?
자유롭고 편한 것을 좋아하고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그대와 같네.
그러나 성인聖人중용中庸으로부터 도를 구하여 자기에게 엄격할 수 있고 오래 되면 편안하고 즐거운데 그대는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으니, 그대가 성인聖人과 다른 것은 이 점에 있는 것이 분명하네.
만약 과연 성인聖人과 내가 다른 부류라고 여긴다면, 부터 그 이하 사람들은 모두 눈자위가 세로이고 콧구멍이 위로 트이며 손이 넷이고 발이 여덟이며 비늘, 털, 깃, 갈기가 붙어 있어 달리고 날아다니며 형태가 변화해야 마땅할 것이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시 사람일 뿐인데 그대는 옛 성인聖人들을 모두 부정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성인聖人은 본래부터 성인이고 현인은 본래부터 현인이고 보통 사람은 본래부터 보통 사람이어서 모두 자기 뜻대로 할 것이니, 또 어찌 저술을 하고 도리를 세워 천백 년 후대 천하에 전해지게 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세상에는 무익하고 오직 호사가들이 문자를 수식하여 세상에 자랑하고 명예를 취하는 수단으로만 남겨졌으니 성인은 중시할 대상이 못 될 것이네.
그러므로 “중등 이상인 사람은 상등의 이치를 말해줄 수 있다.”고 하고, 또 “상지上智하우下愚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네.
나는 그대가 상지上智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그대 말이 “스스로 헤아려볼 때 나는 불가능하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그대는 과연 중등 이상인 사람이 될 수 없단 말인가?
내가 걱정하고 의문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네.
유자儒者가 모범으로 취하는 대상 중에 공자孔子보다 위대한 자는 없네.
공자孔子는 일흔이 되어서야 마음이 내키는 대로 놓아두었는데, 그가 마음이 내키는 대로 놓아둔 것은 법도法度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헤아린 뒤에 놓아둔 것이었네.
그런데 지금 그대의 나이는 몇인가?
스스로 헤아려볼 때 과연 능히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가?
그래서 그만 마음을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는가?
부열傅說은 “광인狂人이라도 바른 마음을 가지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했네.
지금 저 원숭이들이 산에 있을 때는 소리치고 떠들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 경박하고 조급하고 거칠고 사납기 짝이 없지만 잡아서 묶어놓으면 반나절도 채 안 되어 조용히 앉아서 먹을 것을 달라며 오로지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른다네.
간혹 조련하는 사람이 데려가 매도 때리고 친근하게 어르고 하면, 무릎을 꿇고 일어나고 달리고 하는 동작을 모두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지, 어느 한 마리도 제멋대로 날뛰거나 쓰러져 까무라치는 놈이 없다네.
그러므로 나는 광인狂人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네.
지금 그대는 현인賢人의 자질을 지니고 있으면서 도리어 광인狂人도 바른 마음을 갖는 그런 노력을 하려 하지 않고 “나는 할 수 없다.”라고 하고 있으니, 그대가 아니면 과연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맹자孟子의 이른바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경우이네.
대체로 내가 보낸 편지와 〈설거說車〉의 내용은 모두 성인聖人의 도이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나는 수레 이야기의 내용을 실천할 수는 없고, 다만 성인聖人의 도를 본받되 안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야만 비로소 그 도가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했네.
거참, 내가 말한 수레 이야기가 과연 성인聖人의 도가 될 수 없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안으로는 도를 지킬 수 있고 밖으로는 도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그대에게 고했는데, 지금 그대는 “나는 남의 비위를 맞춰가며 굽실대면서 세상과 영합하여 영예榮譽를 취하는 일은 못한다.”고 하니, 내가 어찌 그대에게 남의 비위를 맞춰가며 굽실대라고 했는가?
그대는 왜 나의 수레 이야기를 자세히 살피지 않았는가?
내가 말한 도는 고종高宗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에 이르기까지 모두 따랐던 것인데 그대는 성인聖人의 도라고 하지 않으니, 그렇다면 나를 세상과 어울려 남의 비위를 맞춰가며 굽실대는 짓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았는가?
이런 내가 자기를 가르친 것이라고 생각하여 내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마음을 멋대로 단정하였는데,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네.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성인聖人은 어떤 사람이 문제가 있다 하여 그가 한 말까지 폐기하지는 않는다네.
내가 비록 젊었을 때 세상과 어울리긴 했으나 남의 비위를 맞춰가며 굽실댄 적은 없네.
또 그대가 하는 말이 “대중들 속에 처하여 바쁘게 살면서 이들을 버리고 떠나고 싶어도 감히 그러지 못하고 억지로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하였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어찌 수레 이야기의 내용을 실천하지 못하는가?
잡스럽고 어지러운 세태世態를 수용하여 오히려 태도를 공손히 하고 말투를 겸손히 하면서 무엇 때문에 내 이야기가 안 된다는 건가?
나는 일찍이 아첨阿諂위선僞善을 행한 적이 없네.
그 뜻은 공손하고 관대하고 물러나고 양보함으로써 성인聖人의 도를 행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도록 하는 데에 있으니, 그저 이런 것일 뿐이네.
겸양謙讓하였고, 고종高宗경계警戒하였고, 문왕文王조심操心하였고, 무왕武王은 감히 태만怠慢함과 안일安逸함을 즐기지 않았고, 주공周公은 밥 먹을 때나 머리 감을 때 선비가 찾아오면 감던 머리를 움켜쥐고 먹던 밥을 뱉었고, 공자孔子는 69살까지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네.
이상 7, 8명의 성인聖人이 한 행동이 이와 같았으나 어찌 항상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었겠는가.
반면에 오만한 태도와 방자한 생각을 지녀 허풍을 떨면서 말하고 거들먹거리면서 행동하며 남의 장단점을 말하고 동류同類를 돌아보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이 사람은 예의禮義가 없는 자이다.”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욕까지 할 것이네.
이런데도 마음이 도리어 부끄럽지 않겠는가?
성인聖人이 예의를 차리고 겸양하는 것이 과연 위선을 위한 것인가, 아첨을 위한 것인가?
지금 그대는 또 험한 길을 가는 것이 수레의 죄라고 여기고 있네.
수레가 길을 가는데 어찌 험한 길을 가는 것을 즐거워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험한 길에 이르더라도 넘어지지 않기만을 기대할 뿐이네.
군자君子 또한 그와 마찬가지여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익利益을 추구하지 않네.
그러므로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 살지 않는다.”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그의 침묵沈黙이 족히 난세亂世에 살아남을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불행히 위험하고 어지러운 때를 만나더라도 화가 없기만을 기대할 뿐이라네.
그리고 그대는 은택이 만물에 미치고 도를 행하는 것을 옳다고 보는가, 그르다고 보는가?
이윤伊尹은 백성을 살리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고, 관중管仲은 몸에 향을 바르고 목욕을 하고 나서 천하를 제패하였으니, 공자孔子가 어질게 여겼네.
군자가 도를 행함에 있어 이것 말고 더 큰 것은 분명히 없을 것이네.
그런데 지금 그대 편지는 수천 자가 모두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옛 를 배우고 옛 문장文章을 구사하여 거창하게 세상에 베풀더라도 그것을 과연 어디에 쓸 것인가.
이 〈천하를 위하는 도〉를 추구하지 않고 감라甘羅종군終軍을 흠모하여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하며, 근본根本을 경시하고 말단末端을 귀하게 여기면서 세상에 재능을 과시하고 명예를 낚아 후세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추구한 나머지 성인聖人의 도가 저 두 사람만 못하다고 여기니, 나는 잘못이라고 생각하네.
감라甘羅라는 자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이랬다저랬다 변하면서 이익利益을 얻고 신의信義를 버려, 나라로 하여금 친하게 지내던 나라를 등지고 도리어 나라와 연합하여 나라가 위험에 빠지게 했네.
천하가 이로써 나라가 무례하고 신의가 없음을 더욱 알게 되고, 함곡관函谷關을 마치 호랑이굴처럼 보게 되었으니, 감라甘羅의 무리가 사실 그렇게 만든 것이네.
그런데 그대가 흠모하다니, 세상에 재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닌가?
종군終軍이라는 자는 간교하고 경박하여 전쟁을 좋아하는 무제武帝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천하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 보기를 마치 개미가 구멍을 옮겨가는 것처럼 태연하게 여기고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호월胡越 땅에서 죽은 자들이 천릿길에 죽 벌여 있어도 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려하였네.
그리고 자기는 결연히 일어나 노기를 품고 강한 을 뒤흔들기 위해 음탕한 자를 끼고 늙은 부인을 매개체로 삼아 남의 나라를 고혹시켜 빼앗으려 했다가 지혜가 형세를 판단하지 못해 함께 죽었네.
이는 노구盧狗가 조련사를 만나면 멍멍거리고 달리며 위험을 살피지 않고 오직 조련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과 같으니, 어쩌면 그리도 자기의 주견이 없단 말인가.
그런데 그대 같은 사람이 흠모하다니, 큰 명예를 낚으려는 게 아닌가?
소인小人(감라甘羅종군終軍)의 길을 나는 그대가 말하지 않기를 바라네.
공자孔子는 “이는 명예이지 이 아니다.”라고 했네.
두 소인이 공자孔子의 시대에 살았다면 금장琴張이나 목피牧皮 같은 광자狂者의 대열에도 끼지 못했을 것이니, 이는 진정 그대가 목표로 삼을 대상이 아니네.
또한 그대가 세상에 취하려는 것은 은거隱居의 태도인가, 출사出仕의 태도인가?
주상主上께서 현명하신 덕으로 도가 있는 자를 등용하여 큰 교화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바짝 마른 모습으로 숨어 있거나 죄에 걸려 유폐된 선비도 모두 분발하여 몸을 씻고 세상에 나가 같으신 군주를 보좌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네.
만일 그대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장인어른께서 바야흐로 덕망과 재능이 나라에 알려져 고관高官이 되어서 천하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니, 그대가 비록 은거하고자 한다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실 출사의 길만 있을 뿐이네.
장차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것인데 아직 나이 스물도 안 되어 방임하려고 하다니, 나는 그대를 위해 그것을 인정하지 않네.
풍부馮婦는 범을 때려잡기를 좋아했는데 마침내 어진 선비가 되었고, 주처周處는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다가 어느 날 태도를 바꾸었으니, 모두 늙어서도 자신을 이겼네.
지금 그대는 본디 어진 선비이며 나이 또한 매우 젊어 혈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원함阮咸혜강嵇康이 했던 행위를 따라 지키며 바뀌지 않으려 하고 의 길로 들어서려고 하지 않으니, 이는 정말 안 되는 것이네.
내 생각에 족하足下가 이렇게 말한 것은 아첨을 유달리 증오하여 공손하게 구는 것이 달갑지 않기 때문일 뿐이네.
어느 점에서 실수했는지를 보아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으니, 그대가 안은 바르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으며, 부족한 것은 다만 외면의 원만함뿐이라네.
굴원屈原이 “뜨거운 국에 덴 사람은 찬 나물도 불어서 먹는다.”고 했었는데, 그대도 이와 비슷한 것 아닌가?
아첨을 증오하는 것이 지나친 나머지 공손함이 도리어 죄를 얻은 것이네.
성인聖人중용中庸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때그때 법도에 맞게 할 수 있기 때문이네.
만약 그 법도에 맞지 않는다면 방종放縱아첨阿諂이 다 같은 것이니, 산이 비록 높고 물이 비록 낮아도 위험하고 해가 되는 것은 다르지 않네.
족하足下는 마땅히 나의 〈설거說車〉를 꺼내 거듭 반복해서 봐야 하니, 아첨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험난한 길을 뚫고 나가는 데에 이로운 방법임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네.
그대가 아첨을 증오하여 공손함조차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제 내가 또 원만함을 추구하라고 그대에게 말하니, 원만함이란 말은 참으로 그대가 매우 증오하는 것이 마땅하네.
공손함보다도 천백 배는 더욱 증오할 것이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원만함은 세속世俗에서 적당히 어울리며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게 하는 것과는 다르네.
진정 수레의 바퀴와 같아야 한다는 말이니, 나아갈 수 있을 때 막힘없이 빠르게 나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뒤로 물러나야 할 때 좌절하지 않고 안정되게 물러날 수도 있네.
옥고리처럼 끊임없이 돌자는 것이고 탄환처럼 낮은 곳으로 계속 굴러 내려가자는 것이 아니네.
건괘乾卦의 기상처럼 씩씩하게 움직이고, 이괘離卦의 의미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려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하기 위해서는 어찌 원만함으로 험난함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증오한단 말인가.
나는 나이 열일곱에 진사進士에 응시하기 시작하여 4년 만에 합격하였고, 스물넷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기 시작해서 2년 만에 출사할 수 있게 되었네.
그 사이 함께 어울렸던 보통 사람들이 수백 명이었네.
그 당시 포부와 혈기가 족하足下와 비슷해서 수시로 비난과 모욕을 당했는데, 면전에서 당하지 않으면 등뒤에서 당했었네.
이렇게 8, 9년 지나면서 날마다 태도를 잡아 꺾고 기질을 없애기 위해 비록 스스로 매우 억눌렀지만,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이미 받고 있었네.
남전위藍田尉가 되어 공당公堂에 머무를 때는 아침저녁으로 고관高官 아래 달려가 배알하는 것이 군졸들과 다를 바 없었고, 관아에 있을 때는 많은 속리俗吏들과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논하고 이익의 손익을 계산하였네.
그러면서 또 2년 동안 이렇게 혈기를 잡아 눌렀으나 아무래도 제거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노자老子》의 “빛을 감추고 세속에 섞이라.”는 가르침을 더 깊이 배웠네.
그 결과 스스로 이제는 되었다고 여겼으나 경박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이미 받고 있었네.
어사낭관御史郞官이 되어서는 내심 조정에 오르면 〈나의 언행言行에 따른〉 이해관계가 더욱 클 것이란 생각에, 한층 더 두려워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나의 인격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였네.
그래서 언행을 더욱 경계하고 신중히 하였지만 끝내 연루되어 쫓겨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네.
〈내가 그처럼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제멋대로이고 경박하다는 평가가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진데에다, 공손하고 겸양하는 정도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가 가해져도 무고함을 소명하지 못하였고, 영주永州에 온 지 지금 7년이 지났네.
〈그동안〉 밤낮으로 가슴을 졸이는 가운데 지난날의 허물을 회상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보고, 공자孔子의 도 역시 충분히 연구하였네.
그 결과 세상에 나온 자는 스스로 방임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더더욱 알았네.
지금 족하足下는 내가 예전에 겪었던 과정들을 아직 겪지 않았으니, 자기 뜻대로 해보려는 것이 당연하네.
이는 내가 젊었을 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내가 했던 대로 따라 해본 다음에야 어려움을 알 것이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미리 모든 것을 말하는 이유는, 족하足下가 나처럼 비난과 굴욕을 겪고 나쁜 평판을 얻어 이미 세상으로부터 불신을 당하고 난 뒤에 중용中庸의 도를 흠모함으로써 힘을 부질없이 소비하고 피해를 많이 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래서 이렇게 멈추지 않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것이네.
그대는 부디 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여 헛되이 부질없는 말을 중언부언하지 않는다면 매우 좋겠네.
그리고 그대의 편지 내용에 옳지 않은 말이 있네.
나에게 우리 편지를 꼭꼭 숨기고 덮어서 모르는 사람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틀린 일이네.
대체로 나와 그대가 주고받은 편지는 모두 를 말하기 위한 것이며, 도란 본디 공적公的인 것이어서 사적私的으로 소유할 수가 없네.
가령 그대의 말이 옳지 않다면 그대는 마땅히 스스로 널리 드러내어 사람들이 모두 지적하게 하고, 마침내 그중 옳은 것을 채택하여 자기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바른 도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네.
그런데 지금 오로지 덮어 가리려고만 하니, 이는 진정 스스로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남의 도움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네.
대부大夫에게 자기의 의견을 전달하고 일반 백성은 길에서 국정國政을 비판하게 한 일이나, 자산子産향교鄕校를 헐어버리지 않은 일 등은 과연 무엇 때문이겠는가.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월식月蝕과 같으니, 어찌 가릴 수 있겠는가.
이 일은 나는 그대의 가르침을 받들 수가 없으니 양해하기 바라네.
족하足下가 쓴 편지는 문장에 관한 논리가 매우 바르고 말이 심오하고 단아하였네.
후배로서 이 길을 향해 달리는 사람 중에 그대가 장차 포소蒲梢결제駃騠가 될 것이니, 어찌 그대를 당해낼 수 있겠는가.
한유韓愈에 대해 말한 부분은 매우 좋네.
나머지는 《장자莊子》와 《국어國語》의 문자를 사용한 부분이 너무 많아 도리어 바른 기운에 누가 되었네.
만약 이를 버릴 수 있다면 아주 좋을 것이네.
폐기되어 금고禁錮된 처지에 있는 나를 걱정하고 적전籍田의 행사가 폐기된 것을 슬퍼하였는데 그 뜻이 간곡하였으니, 진정 나를 크게 아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네.
나는 나의 죄가 크다는 것을 스스로 짐작하니 감히 이런 일로 기뻐하거나 슬퍼할 수 있겠는가.
다만, 호미를 손에 쥐고 삽을 메고서 시냇물을 터서 텃밭에 물을 대어 먹을 것을 가꾸고, 틈이 나면 못도 파고 나무도 심으며, 거닐면서 노래하고 앉아서 낚시하다가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니 이것으로 낙을 삼아도 역시 아무 슬픔 없이 늙어 죽을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수시로 책을 읽어 성인聖人의 도를 잊지 않고, 나 자신은 세상에 쓰이지 못하더라도 나를 믿어주는 자가 있으면 내 의견을 말해줄 생각이네.
조정에 새 재상이 부임하여 정사가 더욱 잘 다스려지고 있네.
장인어른께서 조만간 북쪽 대궐로 귀환하시게 되면 나는 지나는 길에 들를 그대를 성곽 남쪽 정자 위에서 기다리리니, 만나서 직접 얘기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네.
그때 가서 내 얘기를 마저 다하겠네.
지금 도주道州로 가는 사람이 있어 대략의 뜻을 이와 같이 간략히 썼네.
종원宗元은 고하네.


역주
역주1 與楊誨之疏解車義第二書 : 작자의 나이 39세 때인 元和 6년(811)에 쓴 편지이다. 楊誨之는 작자의 장인인 楊憑의 아들로, 이때 20세 미만이었다. 楊憑은 元和 4년에 京兆尹에서 臨賀尉로 폄직되었는데, 臨賀는 嶺南道 賀州의 속읍으로, 永州 남쪽에 있다. 楊誨之가 臨賀에 있는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 永州에 들렀을 때 작자가 교훈의 의미가 담긴 〈説車〉 한 편을 지어 그에게 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楊誨之가 그 논리를 수긍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여 元和 5년 11월에 해명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뒤에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반박하므로, 이듬해인 이때 재차 이 편지를 쓴 것이다. 淸나라 李光地(1642~1718)가 쓴 〈書柳子厚與楊誨之疏解車義第二書後〉에, 수천 자에 이르는 글자가 하나도 허술한 것이 없다며 문장 수준을 높이 평가한 다음, “내면은 각이 지고 외부는 둥글어야 한다.[方內而圓外]”는 논리는 《易經》의 “敬을 하여 내면의 마음을 정직하게 하고, 義를 하여 외부의 일을 단정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말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평하면서 楊誨之가 수긍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역주2 說車 : ‘수레의 기능을 설명하다’라는 뜻으로, 작자가 처남 楊誨之에게 이상적인 人格을 수양하라는 취지로 지어준 문장의 제목이다. 수레가 무거운 짐을 싣고 사방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수레의 형태가 짐을 싣기에 용이하도록 사각으로 되어 있고, 바퀴의 형태가 어떤 지형이든 굴러갈 수 있도록 둥글기 때문이란 것과, 기타 여러 가지 기능을 말한 뒤에, 사람의 인격 또한 그와 같아야 內外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역주3 二者 : 친척에 대해 취할 도리와 벗에 대해 취할 도리를 말한다.
역주4 時中 : 언제나 法道에 합치되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점이 없다는 뜻으로, 儒家의 중요한 철학 명제이다. 《中庸》에 “君子의 中庸은 군자의 덕을 지니고서 時中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5 遭夾谷武子之臺 : 夾谷은 지금의 山東 萊蕪縣 夾谷峪으로, 祝其라고도 한다. 魯 定公 10년(B.C. 500) 여름에 定公이 齊侯(景公)와 夾谷에서 회합할 적에 齊侯가 萊 지방 사람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定公에게 위협을 가하게 하자, 定公을 모시고 있던 孔子가 齊侯에게 말하기를 “양국의 군주가 우호적인 회합을 하는 자리에 변방의 오랑캐가 무력으로 혼란을 조성하게 하니, 이는 각국의 제후를 호령하는 齊나라 군주가 할 짓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道理로 보나 禮義로 보나 옳지 않다고 하자, 齊侯가 즉시 萊 지방 사람을 철수시켰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定公 10년》 武子之臺는 魯 定公 때의 權臣 季孫氏의 저택 안에 있던 누대이다. 魯 定公 12년에 子路가 季孫氏의 家臣이 되어 費‧郈‧成 등 세 邑의 성곽을 허물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자, 費邑의 가신인 公山不狃와 叔孫輒이 魯나라 도성을 습격하여 定公이 피신해 있는 武子의 누대 아래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자 司寇로 있던 孔子가 魯나라 大夫 申句須와 樂頎에게 지시하여 그들을 무찌르게 함으로써 사태가 안정되었다. 《春秋左氏傳 定公 12년》 禮樂을 중시하는 孔子도 비상시를 만났을 때는 강하게 결단하여 난국을 타개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거론한 것이다. 아래 주석 3), 4), 5)도 나라를 위해 크고 어려운 일을 감당하려면 강한 덕이 필수적이라는 취지를 담고 있다.
역주6 蹇蹇匪躬 : 《周易》 蹇卦에 “왕궁의 신하가 어려운 일을 감당해나가는 것은 자기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王臣蹇蹇 匪躬之故]”라고 하였다.
역주7 革君心之非 : 《孟子》 〈離婁 上〉에 “오직 큰 덕을 지닌 사람만이 군주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惟大人 爲能格君心之非]”라고 하였다.
역주8 莊以莅乎人 : 《論語》 〈衛靈公〉에 나오는 孔子의 말로, 국사를 담당하는 신하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역주9 下氣怡色 : 《禮記》 〈內則〉에 나오는 말로, 자식이 부모가 허물을 고치도록 간할 때 취하는 부드러운 자세와 온화한 표정이다. 아래 주석 7), 8)도 군자가 지녀야 할 부드러운 덕목을 예로 든 것이다.
역주10 濟濟切切 : 《禮記》 〈祭義〉에 나오는 말로, 제사를 지낼 때의 단정하고 겸손한 태도를 말한다. ‘切切’은 《禮記》 〈祭義〉에 ‘漆漆’로 되어 있는데, 글자만 다를 뿐 음과 뜻이 같으므로 작자가 임의로 바꾼 것이다.
역주11 哀矜淑問 : 哀矜은 《書經》 〈周書 呂刑〉에 “황제께서 백성이 무고하게 誅戮을 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겼다.[皇帝哀矜庶戮之不辜]”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淑問은 《詩經》 〈泮水〉에 “皐陶처럼 심문을 잘하는 자에게 泮宮에서 죄수를 바치게 하였네.[淑問如皐陶 在泮獻囚]”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淑問’의 ‘淑’자는 ‘善’자와 같아 잘한다는 뜻인데, 죄수를 심문할 때 강압적이거나 위협적으로 하지 않고 부드럽고 온화하게 함으로써 상대가 감화되어 진실을 토로하게 한다는 뜻이다.
역주12 允恭克讓 : 《書經》 〈虞書 堯典〉에 나온다.
역주13 溫恭允塞 : 《書經》 〈虞書 舜典〉에 나온다.
역주14 禹聞善言則拜 : 《孟子》 〈公孫丑 上〉에 나온다.
역주15 湯乃改過不恡 : 《書經》 〈商書 仲虺之誥〉에 나온다.
역주16 啓乃心 沃朕心 : 《書經》 〈商書 說命 上〉에 나온다.
역주17 惟此文王 小心翼翼 : 《詩經》 〈大雅 大明〉에 나온다.
역주18 日昃不暇食 : 《書經》 〈周書 無逸〉에 나온다.
역주19 坐以待旦 : 《孟子》 〈離婁 下〉에 나온다.
역주20 曰予小子不敢荒寧 : 不敢荒寧은 《書經》 〈周書 無逸〉에 나오는 말로, 본디 周公이 어린 조카 成王을 가르치기 위해 옛날 殷 高宗의 덕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는 武王의 겸손한 덕이 殷 高宗과 같았다는 뜻으로 한 말일 뿐, 그 전거는 없다.
역주21 捉髮吐哺 : 한 번 머리를 감을 때 머리털을 세 번 움켜쥐고, 한 번 밥을 먹을 때 세 번 입 안에 있는 밥을 뱉었다는 뜻인 ‘一沐三捉髮 一飯三吐哺’의 준말로, 周公이 천하의 인재를 갈구했다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史記 魯周公世家》
역주22 言忠信 行篤敬 : 《論語》 〈衛靈公〉에 나온다.
역주23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 《論語》 〈學而〉에 나오는 것으로, 子貢이 스승 孔子의 덕을 찬양한 말이다.
역주24 中人以上 可以語上 : 《論語》 〈雍也〉에 나온다. 지혜가 중등 이상인 사람은 聖人이 쉽게 될 자질이 있다는 뜻이다.
역주25 唯上智與下愚不移 : 《論語》 〈陽貨〉에 나온다. 상등의 지혜가 바뀌어 어리석어지거나, 하등의 어리석음이 바뀌어 지혜로워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堯‧舜과는 함께 악한 짓을 할 수 없고, 桀‧紂와는 함께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역주26 : 탁
역주27 傅說曰 唯狂克念作聖 : 《書經》 〈周書 多方〉에 나오는 것으로, 成王의 말이다. 여기서 傅說의 말이라고 한 것은 작자의 착오로 보인다.
역주28 孟子之所謂不爲也 非不能也 : 《孟子》 〈梁惠王 上〉에 나온다.
역주29 堯舜之讓……孔子之六十九未嘗縱心 : 이 문단의 懸吐는 번역문의 구조와 편의상 다르게 하였다.
역주30 危邦不入 亂邦不居 : 《論語》 〈泰伯〉에 나온다.
역주31 國無道 其黙足以容 : 《中庸》 제27장에 나온다.
역주32 伊尹以生人爲己任 : 商 湯의 재상 伊尹은 천하를 다스리는 중책을 자임하여, 백성 중에 한 사람이라도 堯‧舜의 은택을 입지 않은 자가 있으면 자기가 개천 속으로 떠밀어 넣은 것처럼 생각하였다고 한다. 《孟子 萬章 上》
역주33 管仲釁浴以伯(패)濟天下 孔子仁之 : 管仲은 齊 桓公으로부터 자기 몸을 세 번 씻겨주고 세 번 향료를 발라주는 예우를 받은 뒤에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적인 계책을 올려 齊나라가 제후국을 호령하는 강대국이 되게 하였다. ‘釁’은 바른다는 뜻이고, ‘伯’는 ‘霸’자와 같다. 《國語 齊語》 孔子仁之는 孔子가 “桓公이 諸侯를 규합하되 兵車로 하지 않은 것은 管仲의 힘이니, 누가 그 仁 같겠는가, 누가 그 仁 같겠는가.”라고 말하여, 管仲이 仁의 도를 행한 것을 찬미한 것을 말한다. ‘누가 그 仁 같겠는가’라는 것은 ‘세상에 어느 누가 管仲이 했던 것처럼 仁의 도를 행한 것으로 이름날 자가 있겠느냐.’는 뜻이다. 《論語 憲問》
역주34 : 패
역주35 甘羅終軍 : 甘羅는 戰國 때 下蔡 사람으로, 秦나라 재상 甘茂의 손자이다. 12세 때 秦나라 재상 呂不韋의 家臣이 되었다. 趙나라에 사신으로 나가 趙王을 회유하여 趙나라 성 5개와 燕나라 성 11개를 秦나라에 바치게 한 공으로 上卿에 봉해졌다. 《史記 권71 甘茂列傳》 終軍은 漢나라 濟南 사람으로, 자는 子雲이다. 18세 때 博士弟子로 선발된 뒤에 武帝의 총애를 받아 謁者給事中과 諫議大夫에 발탁되었다. 20여 세 때 자청하여 安國少季와 함께 南越에 사신으로 나가 南越王을 회유하여 漢나라에 入朝하게 하는 데에 성공하였는데, 이 과정에 安國少季의 영향도 있었다. 漢族인 南越王의 太后가 南越王 嬰齊에게 시집가기 전에 安國少季와 간통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安國少季가 과부가 된 太后와 다시 은밀한 관계를 갖고 어미로서 어린 왕을 회유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終軍은 몇 개월 뒤에 이를 반대한 南越 재상 呂嘉에 의해 왕과 太后 및 安國少季와 함께 살해되었다. ‘安國’은 성이다. 《漢書 권64 終軍列傳》
역주36 胡越 : 북쪽 변방의 胡族과 남쪽 변방의 南越을 병칭한 것이다.
역주37 挾淫夫 以媒老婦 : 老婦는 南越王의 太后를 가리키고, 淫夫는 太后가 南越로 시집가기 전에 간통한 적이 있는 安國少季를 가리킨다.
역주38 盧狗 : 韓盧라고도 부른다. 戰國 때 韓나라에서 나는 名犬이다.
역주39 曾不得與於琴張牧皮狂者之列 : 琴張(子張)과 牧皮는 모두 孔子의 제자이다. 狂者는 뜻이 너무 높아 中庸의 도를 넘어선 사람을 말한다. 《孟子》 〈盡心 下〉에 “琴張‧曾晳‧牧皮는 孔子의 이른바 狂者이다.”라고 하였다.
역주40 馮婦 : 春秋 때 晉나라 사람으로, 용감하고 힘이 있어 범을 잘 때려잡다가 뒤에 태도를 바꾸어 어진 선비가 되었다 한다.
역주41 周處 : 西晉 때 吳義 陽羨 사람으로, 자는 子隱이다. 젊었을 때 향리에서 횡포하게 행동하여 세상 사람들이 범, 이무기와 함께 세 가지 해로운 존재로 지목하였는데, 뒤에 잘못을 고쳐 오히려 범과 이무기를 죽이고 學問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역주42 阮咸嵇康之所爲 : 阮咸과 嵇康은 모두 西晉 때 竹林七賢의 일원으로, 호방하여 세상을 嘲笑하고 禮法을 무시하면서 풍류를 즐기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역주43 屈子曰 懲於羹者而吹虀 : 《楚辭》 〈九章 惜誦〉에 나온다.
역주44 乾健而運 離麗而行 : 《周易》 乾卦에 “하늘의 운행이 씩씩하니, 군자가 그 뜻을 본받아 스스로 강하여 쉬지 않는다.” 하였고, 《周易》 離卦에 “離는 붙는다는 뜻이니, 해와 달은 하늘에 붙어 있고 百穀과 草木은 땅에 붙어 있다.” 하였다.
역주45 和其光 同其塵 : 곧 和光同塵으로, 《老子》 제4장에 나온다. 개인의 특성이 용납되지 않는 세상이라 자기의 개성을 자제하고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역주46 士傳言 庶人謗於道 : 《春秋左氏傳》 襄公 14년에 나온다.
역주47 子産之鄕校不毁 : 《春秋左氏傳》 襄公 31년에 나온다. 鄭나라 사람들이 鄕校에 모여 놀면서 執政者들의 잘잘못을 평가하였는데, 鄭나라 大夫 然明이 子産에게 향교를 헐어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子産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그런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일을 마친 뒤에 그곳으로 돌아와 놀고 동시에 執政者들의 잘잘못을 논하고 있다. 政事를 잘한다고 그들이 인정하면 그대로 진행하면 될 것이고, 잘못한다고 하면 그것을 고치면 될 것이니, 그들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역주48 蒲梢駃騠 : 蒲梢는 漢 武帝가 군대를 파견하여 大宛을 정벌하고 얻은 준마 이름으로,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駃騠는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이 수말과 암노새를 교접시켜 낳은 말이다. 거친 사료를 거뜬하게 먹고 노역을 견디며 질병에 강하고 지구력이 좋아 준마로 분류된다. 여기서는 뛰어난 인재를 비유한 것이다.
역주49 籍田之罷 : 元和 5년(810) 11월 9일에 憲宗이 다음 해의 籍田 행사를 하지 말 것을 명함으로 인해 이해에 행사가 중지된 것을 말한다. 籍田은 천자 및 제후가 시범적으로 농사를 짓는 밭이다. 고대에 천자와 제후가 농업을 중시한다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 매년 봄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籍田에서 쟁기를 잡고 시범적으로 밭을 가는 예를 행하였다.
역주50 朝廷更宰相來 : 元和 6년(811) 1월에 李吉甫(758~814)가 재상이 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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