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曆七年十一月丁丑에 余自縣出하야 屬民使浚渠川하고 至萬靈鄕之左界하야 宿慈福院하다
戊寅에 升雞山하야 觀碶工鑿石하고 遂入育王山하야 宿廣利寺하고 雨不克東하다
辛巳에 下靈巖하야 浮石湫之壑以望海하야 而謀作斗門于海濱하고 宿靈巖之旌敎院하다
癸未에 至蘆江하야 臨決渠之口하고 轉以入于瑞巖之開善院하야 遂宿하다
質明에 與其長老瑞新으로 上石望玲瓏巖하야 須猿吟者久之라가 而還食寺之西堂하다 遂行하야 至東吳하야 具舟以西라가
質明에 泊舟堰下하고 食大梅山之保福寺莊하다 過五峰하고 行十里許하야 復具舟以西하야 至小溪以夜中하다
質明에 觀新渠及洪水灣하고 還食普寧院하다 日下昃에 如林村이라가 夜未中에 至資壽院하다
質明에 戒桃源淸道二鄕之民以其事하니 凡東西十有四鄕이라 鄕之民이 畢已受事어늘 而余遂歸去하다
현령縣令으로 근무할 때에 이와 같이 하였으니, 속된 관리들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경력慶曆 7년(1047) 11월 정축일丁丑日(7일)에 내가 현청縣廳에서 나와 백성들이 농수로農水路를 준설浚渫하는 것을 관찰하고 만령향萬靈鄕의 동쪽 경계境界에 이르러 자복원慈福院에서 유숙留宿하였다.
무인일戊寅日(8일)에 계산鷄山에 올라 수문水門을 만드는 기술자가 돌을 다듬는 것을 관찰하고, 드디어 육왕산育王山으로 들어가 광리사廣利寺에서 묵었는데, 비가 내려서 더는 동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신사일辛巳日(11일)에 영암靈巖으로 내려가 부석추浮石湫의 골짜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닷가에 갑문閘門을 축조할 일을 도모하고 영암靈巖의 정교원旌敎院에서 묵었다.
계미일癸未日(13일)에 노강蘆江에 이르러 농수로의 입구를 터놓은 것을 굽어 살펴보고, 길을 바꾸어서 서암瑞巖의 개선원開善院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묵었다.
갑신일甲申日(14일)에는 천동산天童山을 유람하고 경덕사景德寺에서 묵었다.
동이 틀 무렵에 그곳의 장로長老들과 함께 해돋이를 보고자 바위에 올라 영롱한 경관을 바라보는데 원숭이가 오래도록 울어댔고, 내려와서 절의 서당西堂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떠나서 동오東吳에 이르러 배를 구해 타고 서西로 향하였다.
날이 샐 무렵에 배를 언덕 아래에 대고 대매산大梅山에 있는 보복사保福寺의 전사田舍에서 식사를 하고 오봉산五峰山을 지나 10리里 정도를 가서, 다시 배를 구해 타고 서쪽으로 향하여 소계小溪에 한밤중에 도착하였다.
동이 틀 무렵에 새로 만든 농수로 및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물굽이를 살펴보고 보령원保寧院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였으며, 해가 기울 녘에 임촌林村으로 가서 한밤이 되기 전에 자수원資壽院에 도착하였다.
동이 틀 무렵에 도원桃源과 청도淸道 두 향鄕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하였고, 동서東西로 모두 14향鄕이 있는데, 그 향鄕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모두 완료하였으므로 내가 드디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