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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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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창무군절도사 시중을 지낸 조목공의 행장
瑋多兵略하니 公序亦有生色이라
조위曹瑋군사적軍事的 지략智略이 뛰어났는데, 이 또한 이를 행장行狀선명鮮明하게 서술敍述하였다.
公諱瑋 字寶臣이니 眞定府靈壽縣人이라
이고, 보신寶臣이며, 진정부眞定府 영수현인靈壽縣人이다.
젊어서 음서蔭敍천평군天平軍무령군武寧軍아내도우후牙內都虞候역임歷任하였다.
盜據河西銀夏等州하고 後又擊諸部하야 幷其衆이라
지도至道 연간年間이계천李繼遷하서河西은주銀州, 하주夏州 등을 탈취奪取하여 이곳에 웅거雄據하였고, 에는 또 여러 부족部族들을 쳐서 그 무리들을 병합하였다.
李繼隆范廷召等 數出無功이어늘 而朝廷終棄靈武하니 繼遷遂强하야 屢入邊州爲寇하니라
이계륭李繼隆범정소范廷召 등이 여러 차례 출병出兵을 하였지만 을 세우지 못하자, 조정朝廷에서 마침내 영무靈武포기抛棄하니, 이계천李繼遷은 더욱 강성해져서 변경邊境의 고을을 여러 차례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當是時하야 公爲東頭供奉官閤門祗侯하니 年十九 太宗問大臣誰可使當繼遷者오하니 以公應詔한대
이때를 하여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니, 나이가 열아홉이었는데, 태종太宗께서 대신大臣들에게 누가 이계천李繼遷을 감당해 대적할 만한가 물으시니, 무혜왕武惠王께서 아드님인 을 천거하였다.
太宗以知渭州 而欲除諸司使以遣之하니 武惠王爲公固讓이어늘 乃以本官知渭州하다
태종太宗께서 이에 지위주사知渭州事로서 제사사諸司使를 겸하게 하여 파견하고자 하자, 무혜왕武惠王께서 을 위해 굳게 사양하고 본래의 관직인 지위주知渭州만을 담당하게 하였다.
眞宗卽位하야 改內殿崇班‧閤門通事舍人‧西上閤門副使라가 移知鎭戎軍하다
진종眞宗께서 즉위卽位하시자 내전숭반內殿崇班,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서상합문부사西上閤門副使로 관직을 바꾸어 임명하였다가 지진융군知鎭戎軍으로 전임시켰다.
當是時하야 繼遷虐使其衆하니 人多怨者어늘 公卽移書하야 言朝廷恩信撫納之厚以動之하니 羌人得書하고 往往感泣이라
이때를 당하여 이계천李繼遷이 그 무리들을 잔학殘虐하게 혹사酷使하니 무리들 가운데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이 곧 공문公文을 보내어 조정朝廷에서 은혜恩惠신의信義를 베풀어 진무鎭撫하고 하게 받아들이겠다고 설득하여 그들을 감동시키니, 강족羌族들이 글을 얻어 읽어보고 더러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於是 康奴諸族 皆內附하다
이렇게 되자 강노康奴의 여러 강족羌族들이 모두 귀부歸附하였다.
六年 繼遷死하고 其子德明求保塞어늘
함평咸平 6년(1003)에 이계천李繼遷이 죽자 그 아들 이덕명李德明내부來附할 뜻을 밝히면서 변방邊方을 보호할 지위를 줄 것을 청하였다.
公上書言繼遷 擅中國要害地하야 終身旅拒하야 使謀臣狼顧而憂러니 方其國危子弱하니 不卽捕滅이면 後更盛强하야 無以息民이라하다
이에 이 글을 올려서 이계천李繼遷중국中國요해처要害處점거占據하고 죽을 때까지 무리를 모아 항거하여, 일을 도모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근심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그 나라가 위태롭고 자식은 어리니, 이런 때에 즉시 잡아 죽이지 않으면, 후에 다시 강성해져서 인민들이 편히 쉴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當是時하야 朝廷欲以恩致德明하야 寢其書不用하다
그러나 이때에 조정朝廷에서는 은혜를 베풀어 이덕명李德明을 끌어들이고자 하여, 그 건의를 묵살하고 채납採納하지 않았다.
而河西大族延家妙等 遂拔其部人來歸한대 諸將猶豫하야 未知所以應이어늘
그리고 하서河西대족大族연가묘延家妙 등이 그 부족部族들을 모두 인솔하고 와서 귀부歸附하려 하자, 제장諸將들이 머뭇거리며 어찌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公曰 德明野心去就尙疑하니 今不急折其羽翮하고 而長養就之 其飛必矣리라하고
께서 “이덕명李德明야심野心거취去就를 아직 믿을 수가 없으니, 지금 급히 그 날개를 꺾어놓지 않고 이를 길러주어 뜻을 이루게 한다면, 그 무리들이 훨훨 날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고,
卽自將騎士하야 入天都山하야 取之內徙하니
즉시 자신이 기병騎兵들을 거느리고 천도산天都山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데려와 내지內地로 옮겼다.
德明由此遂弱하야 而至死不敢窺邊하니라
이덕명李德明이 이 때문에 드디어 세력이 약화되어, 죽을 때까지 감히 변방邊方을 엿보지 못하게 되었다.
元年 召還하야 除西上閤門使邠寧環慶路兵馬都鈐轄兼知邠州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元年(1008)에 을 불러들여서 서상합문사西上閤門使, 경로병마도검할慶路兵馬都鈐轄 지빈주사知邠州事에 제수하였다.
하고 遷東上閤門使高州刺史라가 再移眞定府定州路都鈐轄하고 已而又以爲涇原路都鈐轄兼知渭州하다
황상皇上께서 동행東行하여 봉선封禪의 의식을 거행하시고, 동상합문사東上閤門使, 고주자사高州刺史로 옮겼다가, 다시 진정부眞定府 정주로定州路 도검할都鈐轄로 옮겼고 그 후 다시 경원로涇原路 도검할都鈐轄 지위주知渭州에 임명하였다.
公乃圖涇原環慶兩路山川城郭 戰守之要以獻하니 眞宗留其一樞密院하고 而以其一付本路하야 使諸將出兵 皆按圖議事하다
이 이에 경원涇原환경環慶 양로兩路산천山川성곽城郭전수戰守요충지要衝地지도地圖에 표시하여 바치니, 진종眞宗께서 그 지도地圖 한 부는 추밀원樞密院에 보관하고, 한 부는 해당 송부送付하여,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출병시出兵時에는 그 지도地圖를 참고하여 일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하고 遷四方館使하다
황상께서 분음汾陰에서 후토后土제사祭祀를 지낸 후 사방관사四方館使로 옮겼다.
章理驕於武延鹹泊하고 撥臧掘强於平涼이어늘 公皆誅之하니 而汧渭之間 遂無一羌犯塞하니라
처음 장매章埋무연武延함박천鹹泊川에서 저항하고, 발장拔臧평량平涼에서 강성하게 버티고 있었는데, 께서 이들을 모두 주멸誅滅하니, 견수汧水위수渭水 사이는 드디어 강족羌族이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한 번도 없게 되었다.
八年 遷英州團練使라가 知秦州하니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에 영주단련사英州團練使로 옮겼다가 지진주知秦州가 되었다.
秦西南羌唃厮囉宗哥立遵始大하야 遵獻方物하고 求稱하다
진주秦州 서남西南강족羌族 추장 곡시라唃厮囉종가입준宗哥立遵강대强大해지기 시작하여, 종가입준宗哥立遵방물方物을 바치고 찬보贊普라는 칭호稱號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公上書言호되 夷狄無厭하니 足其求 必輕中國하리라하니 大臣方疑其事라가 會得公書하고 遂不許하고 而猶以爲保順軍節度使하다
이에 이 조정에 글을 올려 진언進言하기를 “오랑캐들은 욕심이 끝이 없으니, 그 요구를 이루게 되면 반드시 중국을 깔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대신大臣들이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다가, 때마침 공의 상서가 이르자 마침내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고, 전례前例를 따라서 보순군절도사保順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公曰 我狃遵矣 又將爲寇하리니 吾治兵以俟爾호리라하더니 遵使其舅賞樣丹招郭厮敦爲鄕導어늘
공께서 “내가 종가입준宗哥立遵을 잘 아는데, 다시 우리 국토를 침구侵寇할 것이니, 우리는 군사軍士를 조련하여 이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종가입준宗哥立遵이 그의 외숙外叔 상양단賞樣丹을 시켜서 오래 전에 귀부歸附숙호熟戶의 추장 곽시돈郭厮敦을 불러 향도嚮導로 삼아서 침구侵寇해왔다.
公卽誘樣丹捕厮敦이면 而許以一州하니 樣丹終殺厮敦이어늘
이에 이 즉시 상양단賞樣丹을 설득하여 곽시돈郭厮敦을 사로잡으면 그가 다스리던 고을을 영유領有하도록 허락하겠다고 하니, 상양단賞樣丹이 마침내 곽시돈郭厮敦을 죽였다.
公遂奏以爲潁州刺史하고 而樣丹亦擧南市城以獻하다
상양단賞樣丹영주자사潁州刺史로 임명하기를 주청奏請하였고, 상양단賞樣丹이 또한 남시성南市城을 빼앗아 이를 바쳤다.
先是張吉知秦州 生事熟戶多去爲遵耳目이러니 及公誅樣丹 卽皆惶恐避逃어늘
이보다 앞서 장길張吉진주秦州지사知事로 있을 때에 숙호熟戶 노릇을 하던 강족羌族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종가입준宗哥立遵 쪽에 붙어서 간첩間諜활동을 하며 사단을 일으켰는데, 상양단賞樣丹(郭厮敦의 오기誤記인 듯함)을 처형하자 모두 두려워하며 황급히 도피하였다.
公許之入贖自首 還故地한대 而至者數千人이요 後遂帖服하야 皆爲用하다
이 그들 가운데 속전贖錢을 납부하고 자수自首한 자들에게 옛날 살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니, 고지故地로 되돌아온 사람들이 수천數千에 이르렀고, 그 에는 드디어 순복順服하여 이들을 모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至明年 囉遵果悉衆號十萬이라하야 寇三都어늘
이듬해가 되자 곡시라唃厮囉종가입준宗哥立遵의 예측대로 무리를 총동원하여 10만 대군이라 칭하면서 삼도곡三都谷으로 침구侵寇하였다.
公帥三將破之하고 追北至沙州하니 所俘斬以萬計
이 세 장수를 거느리고 이들을 격파하고 패배한 적군을 추격하여 사주沙州에 이르니, 사로잡거나 죽인 적군이 만여萬餘 이었다.
事聞 除客省使康州防禦使하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객성사客省使 강주방어사康州防禦使제수除授되었다.
其後又破滅馬波叱臘鬼留等諸羌하니 囉遵遂以窮孤하야 逃入磧中이어늘 而公斥境하야 置弓門威遠凡十寨하니 自是秦人無事矣러라
그 후에 또 마파질랍馬波叱臘귀류鬼留강족羌族의 추장들을 격파擊破하여 없애버리니, 곡시라唃厮囉종가입준宗哥立遵이 드디어 궁곤窮困해지고 고립孤立되어 사막沙漠 가운데로 달아났는데, 농상隴上 지역의 영토를 개척하고 궁문弓門위원威遠 등 모두 열 곳에 성채城寨를 세우니, 이때부터 진주秦州 사람들이 전쟁에 시달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三年 召還하야 除華州觀察使라가 以西人之恃公也 復以爲鄜延路馬步軍都部署하다
천희天禧 3년(1019)에 중앙으로 불러들여 화주관찰사華州觀察使제수除授하였다가, 서쪽 변방 사람들이 을 신뢰하고 의지하므로 다시 부연로마보군도부서鄜延路馬步軍都部署에 임명하였다.
四年 遂除宣徽北院使鎭國軍節度觀察留後簽署樞密院事러니 用事하야 稍除不附己者
4년에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 진국군절도관찰유후鎭國軍節度觀察留後 첨서추밀원사簽署樞密院事제수除授되었는데, 정진공丁晉公국권國權을 휘두르면서 자기편에 붙지 않는 사람들을 차츰차츰 제거하였다.
旣貶하고 卽指公爲黨하야 改宣徽南院使라가 出爲環慶路都署하고 又降容州觀察使知萊州러니
구래공寇萊公폄출貶黜시키고 나서는 을 그의 당여黨與로 지목하여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로 바꾸었다가 환경로도부서環慶路都部署로 내보냈고, 또다시 용주관찰사容州觀察使 지내주知萊州강임降任시켰다.
晉公貶 乃以公爲華州觀察使知靑州하다
그 후 정진공丁晉公폄직貶職을 당하게 되자, 곧 화주관찰사華州觀察使 지청주사知靑州事로 삼았다.
三年 除彰化軍節度觀察留後知天雄軍이라가 又移知永興軍이러니 而詔使來朝하야 至則除昭武軍節度使而復還之하다
천성天聖 3년(1025)에 창화군절도관찰유후彰化軍節度觀察留後 지천웅군知天雄軍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지영흥군知永興軍으로 옮겼는데, 조서詔書를 내려 조정朝廷으로 불러들여 도착하자마자 소무군절도사昭武軍節度使를 제수하고 다시 임지任地로 돌아가게 하였다.
天聖五年 以疾病求知孟州하야 得之러니 會言事者 以公宿將有威名하니 不當置之閒處라하야 乃以爲眞定路馬步軍都部署知定州하다
천성天聖 5년에는 질병疾病을 이유로 지맹주사知孟州事가 되기를 청하여 뜻을 이루었는데, 때마침 일의 처리에 대하여 진언한 사람이 있어서, 이 역전의 장수로서 위명威名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 한가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니, 이에 진정로마보군도부서眞定路馬步軍都部曙 지정주知定州로 바꾸었다.
七年 換彰武軍節度使하고 八年正月 薨于位하니 年五十八이라
7년에 창무군절도사彰武軍節度使로 바뀌었고, 8년 정월正月에 그 지위에 계시면서 하셨으니, 향년享年이 58세였다.
皇帝爲罷朝兩日하고 贈侍中하며 諡曰武穆이라하다
황제皇帝께서는 을 위해 양일간兩日間 조정朝廷의 업무를 중단하셨고, 시중侍中으로 추증追贈하고 무목武穆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셨다.
公爲將幾四十年 用兵未嘗敗衂하고 尤有功於西方하다
장수將帥 노릇을 하신 것이 거의 40년인데, 전쟁에 일찍이 패배한 일이 없었고, 서방西方 강족羌族과의 전쟁에 더욱 공로가 컸다.
舊羌殺中國人하고 得以羊馬贖死 如羌法이어늘 公以謂如此非所尊中國而愛吾人이라하야 奏請不許其贖하다
에는 강족羌族이 중국 사람을 죽이고서 양이나 말을 바치면 사형을 면해주기를 강족羌族대로 하였는데, 께서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중국中國을 높이고 우리 인민人民을 아끼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셔서, 속죄贖罪를 허용하지 말 것을 주청하였다.
又請補內附羌하야 以爲上軍主하고 假以勳階爵秩如하니 至今皆爲成法하니라
내부內附한 여러 강족羌族의 추장을 보임補任하여 해당 종족種族상군주上軍主로 삼고 훈계勳階작질爵秩왕관王官하도록 해주기를 청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모두 으로 정해져서 시행되고 있다.
陝西歲取邊人하야 爲弓箭手而無所給이어늘 公以塞上廢地 募人爲之하고 若干畝 出一卒하고 若干畝 出一馬하며 至其稅斂發兵戍守하야는 至今邊賴以實하고 所募皆爲精兵하니라
섬서陝西 지방에서는 매년 국경國境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궁전수弓箭手로 부리면서도 대가代價를 지급한 일이 없었는데, 변경邊境의 농사를 짓지 않는 땅을 주기로 하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 일을 하도록 하고, 약간 를 지급받았으면 병정兵丁 한 사람을 내고, 약간 를 지급받았으면 말 한 을 내도록 하였는데, 그때에 제정된 세렴稅斂발병發兵수수戍守에 관한 제도는 변경邊境 지방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이를 근거로 시행施行하고 있으며, 이렇게 모집한 사람들이 모두 정병精兵이 되었다.
在渭州 取隴外籠干川築城하야 置兵以守하고 曰後當有用此者리라하더니
지위주知渭州로 계실 때에 농외隴外 땅을 하여 농간천籠干川을 쌓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게 하고 “뒷날에 마땅히 이 유용有用하게 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셨는데,
及李元昊叛兵數出 卒以籠干川爲德順將軍하고 而自隴以西公所措置 人悉以爲便也러라
이원호李元昊반군叛軍이 빈번하게 출몰함에 이르러 마침내 농간천성籠干川城덕순군德順軍지휘소指揮所가 되었으며, 농성隴城 이서以西 지방에 께서 조치해놓으신 일들을 후인後人들이 모두 편리하게 활용하였다.
自三都之戰으로 威震四海하니 唃厮囉聞公姓名이면 卽以手加顙하니라
삼도곡三都谷의 전투 이후부터 위명威名이 온 천하에 진동하니, 곡시라唃厮囉까지도 성명姓名을 들으면 계신 곳을 향하여 손을 이마에 대고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在天雄 契丹使過魏地할새 輒陰勒其從人하야 無得高語하고 疾驅至하야 多憚公不敢仰視러라
께서 지천웅군知天雄軍으로 계실 때에, 거란契丹사신使臣위주魏州 땅을 지나가면서 종자들을 단속하여 큰 소리로 떠들지 못하게 하였고, 급히 말을 몰고 가면서 많은 이들이 을 두려워하여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契丹旣請盟 眞宗於兵事尤重愼하야 手詔詰難하야 至十餘反호되 而公每守一議하야 終無以奪하니라
거란契丹화약和約하자 이를 들어주고는, 진종眞宗께서 전쟁에 관한 일을 더욱 신중하게 처리하셔서, 변방邊方의 일에 대한 보고가 있게 되면 손수 조서詔書를 내려 힐난詰難하시면서 십여 차례씩 되돌려 보내셨으나, 께서 번번이 같은 주장을 고수固守하니 끝내 그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眞宗後愈聽信하야 有論邊事者 往往密以付公可否하니라
진종眞宗께서는 그 후에 더욱 신뢰信賴하고 건의建議를 받아들여, 변방邊方의 일에 관한 의론議論이 있게 되면 왕왕往往 은밀하게 에게 가부可否의 판단을 맡겼다.
好讀書하야 所如 必載書數兩하고 兼通春秋公羊穀梁左氏傳호되 而尤熟于左氏하니라
은 글 읽기를 좋아하셔서 가는 곳마다 서적을 몇 수레씩 싣고 갔으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에 두루 능통하였고,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정통精通하셨다.
始娶潘氏馮翊郡夫人하니 忠武軍節度使同中書門下平章事之子
처음에 반씨潘氏부인夫人으로 맞이하여 풍익군부인馮翊郡夫人이 되셨는데,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한국공韓國公 의 따님이시다.
後娶沈氏安國太夫人하니 故相之孫이요 之子
심씨沈氏를 맞이하여 안국태부인安國太夫人이 되셨는데, 옛 재상宰相이었던 좌복사左伏射 손녀孫女이고, 광록소경光祿少卿 계종繼宗의 따님이시다.
子男四人이니 禮賓使知儀州러니 當元昊叛時 以策說大將호되 不能用하고 反罪之하야 遷韶州以死하다
아들이 넷인데, 예빈사禮賓使 지의주사知儀州事로 있다가 이원호李元昊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계책을 내어 대장大將을 설득하였으나 채납採納되지 못하고, 도리어 벌을 받아서 소주韶州좌천左遷되었다가 사망死亡하였다.
終內殿崇班하고
내전숭반內殿崇班으로 벼슬을 마쳤다.
供備庫副使 拒元昊于瓦亭이라가 戰死하니 贈寧州刺史하고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로 있을 때에 와정천瓦亭川에서 이원호李元昊의 반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니, 영주자사寧州刺史추증追贈되었다.
右侍禁이라
우시금右侍禁이다.
一女子 適四方館使榮州刺史王德基하다
딸이 하나인데, 사방관사四方館使 영주자사榮州刺史왕덕기王德基에게 출가하였다.
孫五人이니 東頭供奉官이요 右侍禁閤門祗候 이요 이라
손자孫子가 다섯인데,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이고, 우시금右侍禁 합문지후閤門祗候이며, 삼반봉직三班奉職이고, 우반전직右班殿直이다.
역주
역주1 彰武軍節度使侍中曹穆公行狀 : 曹穆公은 曹瑋(973~1030)를 지칭하며, 諡號가 武穆이므로 穆公이라 칭한 것이다. 曹瑋의 行狀은 王安石 外에 宋庠도 撰하였다. 彰武軍은 延州(現 延安)에 治所를 두었던 軍鎭이다.
역주2 少以蔭爲天平武寧二軍牙內都虞候 : 曹瑋의 父 曹彬(931~999)이 北宋 開國의 元勳으로 큰 功이 있었기 때문에 曹瑋가 蔭敍로 벼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牙內都虞候의 牙內는 節度使의 官府 안을 지칭한다.
역주3 至道 : 宋 太宗의 年號(995~997)이다.
역주4 李繼遷 : 羌族의 추장으로 宋에 대한 叛服이 無常하여 근심을 끼쳤던 인물이다.
역주5 武惠王 : 曹瑋의 父 曹彬의 封號이다.
역주6 咸平 : 宋 眞宗의 연호(998~1003)이다.
역주7 大中祥符 : 宋 眞宗의 연호(1008~1016)이다.
역주8 東封 : 眞宗이 大中祥符 元年 10월에 五嶽 가운데 東嶽인 泰山에서 封禪의 의식을 행한 것을 지칭한다.
역주9 祀汾陰 : 漢 武帝가 汾陰에서 寶鼎을 얻고 이곳에 后土祠를 세운 일이 있는데, 宋 眞宗이 大中祥符 4년 2월에 이곳에서 土地神인 后土에 제사를 지냈다.
역주10 贊普 : 最高 部族長을 칭하는 것으로, 可汗과 같은 의미이다.
역주11 熟戶 : 오랑캐로서 中國에 歸附하여 中華文明에 동화된 部族을 칭한다.
역주12 隴上 : 現 甘肅省 일대이다.
역주13 天禧 : 宋 眞宗의 연호(1017~1021)이다.
역주14 丁晉公 : 晉國公에 封해졌던 丁謂(966~1037)이다.
역주15 寇萊公 : 萊國公에 封해졌던 寇准(961~0123)이다.
역주16 天聖 : 宋 仁宗의 연호(1023~1031)이다.
역주17 : 저본에는 ‘類’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18 王官 : 중국에서 임명한 관원을 말한다.
역주19 卽有邊事 : 저본에는 ‘卽有邊’으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事’자를 보충하였다.
역주20 韓國公美 : 많은 戰功을 세워 韓國公에 封해졌던 潘美(925~991)를 지칭한다.
역주21 左僕射倫 : 沈倫(909~987)으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역주22 光祿少卿繼宗 : 繼宗은 沈繼宗으로 光祿少卿으로 벼슬을 마쳤다.
역주23 三班奉職 : 下級武官의 官名이다.
역주24 右班殿直 : 三班奉職 바로 윗 등급의 관명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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