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모王某之治은현鄞三月에 其故人호순원胡舜元이 凶服立於門이라가 揖入이어늘 問弔故하니 則喪其父五月이라
居數月에 語吾弟曰 吾釋父之殯하고 跋山浮江하야 從子之兄于海旁하야 願有謁也久矣로되 不敢以言호라
今已不幸卒也라 得子之兄誌而銘之하야 藏之墓中하야
雖吾小人이나 與榮焉이요 無悔焉이니 不知子之兄可不可로다
君子固成人之孝요 而吾與之又舊라 其何顧而辭리오하고 卽取吾所素知者하야 爲之誌而銘之하노라
호씨胡氏世大家로 闔門數百人이요 君有子순원舜元하야 獨招里先生敎之爲士라
형공荊公의 예리銳利하고 엄정嚴正함이 매양 이와 같다.
왕모王某가 은현鄞縣을 다스린 지 3개월이 되었을 때에 친구 호순원胡舜元이 상복喪服을 입고 문 앞에 서 있다가 읍하고 들어오기에, 상복을 입게 된 연고를 물으니, 그 부친의 상을 당한 지 5개월이 되었다고 하였다.
관사館舍에 머물게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가 상기喪期도 마치지 않고 일찍 찾아온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몇 개월이 지나서 그가 내 아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빈殯만 한 대로 놔두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바닷가에 이르러 그대의 형님을 따르면서, 뵙고 말씀드리기를 바란 지 오래되었으면서도 감히 이를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선친께서 생전에 내가 사방으로 다니며 학문을 하게 하여, 봉양하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불행하게도 이미 돌아가셨으니, 그대 형님의 묘지명을 얻어 이를 새겨서 무덤 속에 부장附葬하여,
이로써 이 시대에 드날릴 수 있게 해드리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해드린다면,
비록 내가 소인小人이지만 영예로운 일에 참여할 수 있고 후회가 없을 것인데, 그대의 형님이 가可하다고 하실지 불가不可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내 아우가 이를 알려주었는데 내가 탄복하기를 “과연 이와 같다면 효孝를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군자君子는 진실로 남의 효孝를 이루어주어야 하고, 내가 그와 사귄 지 오래되었으니 내가 어찌 고개를 돌리고 거절할 수 있으랴.” 하고, 즉시 내가 평소에 알고 있는 것을 취하여 그를 위해 지誌를 지어주어 새겨놓을 수 있게 하였다.
군君의 휘諱는 모某이니, 지주池州의 동릉현銅陵縣 사람이다.
정축년丁丑年(977)에 태어났으니 바로 태평흥국太平興國의 연간年間이고, 정해년丁亥年에 졸卒하였으니 이때가 경력慶曆 7년(1047)이다.
아들이 일곱이니 10월에 모某가 군君을 곡수산谷垂山에 안장安葬하였다.
호씨胡氏는 대대로 벌족閥族으로 전 가족이 수백인數百人이며, 군君의 아들 순원舜元에게는 특별히 동향同鄕의 선생을 초빙하여 가르쳐서 선비가 되었다.
그가 졸卒하자 친족들이 혈연의 원근에 따라 시마복緦麻服부터 참최복斬衰服까지 나누어 입고 상례喪禮를 거행하였으니, 순원舜元은 훌륭한 선비라 할 수 있다.
71세를 살았으니, 장수長壽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도다.
내가 그에게 명銘을 지어주니, 길이길이 마멸磨滅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