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之時에 士之在下者는 無求於上하고 上之人은 日汲汲惟恐一士之失也라
古者士之進은 有以德하고 有以才하고 有以言하고 有以曲藝러니라
今徒不然
하야 自
等
으로 而下之至于
히 其進退之 皆有法度
라
古之所謂德者才者는 無以爲也요 古之所謂言者도 又未必應今之法度也라
誠유사有豪傑不世出之士라도 不自進乎此면 上之人弗擧也요 誠進乎此나 而不應今之法度면 유사有司弗取也하니 夫自進乎此는 皆所謂枉己者也니라
然而今之士는 不自進乎此者를 未見也하니 豈皆不如古之士自重以有恥乎아
古者
에 하고 士之未命也
엔 則
하니 其父母妻子裕如也
라
하야 觀游止處
에 師師友友
하야 絃歌
요순堯舜之道
하야 自樂也
라
磨礱鐫切하고 沈浸灌養하야 行完而才備면 則曰 上之人其舍我哉아하며 上之人이 其亦莫之能舍也하니라
今也에 地不井하고 國不學하고 黨不庠하고 遂不序하고 家不塾이라
士之未命也엔 則或無以裕父母妻子하고 無以處하며 行完而才備호되 上之人이 亦莫之擧也하니 士安得而不自進이리오
使今之士로 不若古는 非人則然이라 勢也니 勢之異면 聖賢之所以不得同也니라
士之進退 不惟其德與才요 而惟今之法度나 而有司之好惡 未必今之法度也라
今之有司 非昔之有司也요 後之有司 又非今之有司也니 有司之好惡 豈常哉아
以言取人이면 未免失也로되 取焉而又不得其所謂言하니 是失之失也어든 況又重以有司好惡之不可常哉아
양숙명楊叔明之兄弟
는 以父任
京官
하니 其勢非吾所謂無以處
요 無以裕父母妻子
로되 而有不得已焉者也
라
自枉而爲진사進士하고 而又枉於有司하니 而又若不釋然이라
옛날에는 사士로서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윗사람에게 벼슬 얻기를 청하는 일이 없었고,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날마다 한 사람의 유능한 사士라도 잃을까 염려하여 분주히 노력하였다.
옛날에 사士가 벼슬에 나아감은, 덕행德行으로 벼슬에 나아가거나, 재능才能으로 벼슬에 나아가거나, 좋은 말이 채납採納되어 벼슬에 나아가거나, 자질구레한 기예로 벼슬에 나아가는 일 등이 있었다.
지금은 한갓 그렇지가 않아서, 수재과秀才科로부터 아래로 내려와 명법과明法科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모두 법法으로 정한 제도制度가 있다.
그렇게 되니 옛날의 이른바 덕행德行이 있는 사람이나 재능才能이 있는 사람은 진출할 수가 없고, 옛날의 이른바 좋은 건의建議를 한 사람도 반드시 지금의 법도法度에 맞아 등용되지는 않게 되었다.
진실로 세상에 흔히 나올 수 없는 호매豪邁하고 걸출傑出한 사士가 있다 해도 스스로 벼슬에 진출하지 않는다면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찾아서 등용하지 않고, 진실로 벼슬에 진출하려 해도 지금의 법도法度에 알맞지 않으면 유사有司가 취取하지 않으니, 이에 스스로 진출하려 하는 사람은 모두 이른바 자기를 굽힌 자들이다.
맹자孟子께서는 “자기를 굽히고서 남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의 사士들은 이렇게 자기를 굽히고서 스스로 벼슬에 나아가고자 하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하여 모두 옛날의 사士가 자중自重하면서 부끄러워함이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되었는가?
옛날에는 천하天下의 토지土地에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사士가 임용任用되기 전에는 일정한 농토와 택지를 주어서 백성이 되게 하니, 그 부모와 처자가 넉넉하게 생활할 수가 있었다.
가家로부터 국國(國都)에 이르기까지 교육기관인 숙塾과 서序와 상庠과 학學이 있어서, 관유觀遊하는 사람이나 집안에 거처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스승을 받들고 벗과 우애롭게 지내어, 요순堯舜의 도道를 금슬琴瑟에 맞추어 노래하며 스스로 즐겁게 지내었다.
그리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침잠沈潛하여 수양修養을 쌓아서 덕행德行이 완미完美해지고 재능才能이 갖추어지면, 말하기를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나를 버리는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윗자리에 있는 사람도 그런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었다.
지금은 천하天下의 토지土地에 정전법井田法을 행하지 않고, 국도國都에는 학學을 두지 않고, 당黨에는 상庠을 두지 않고, 수遂에는 서序를 두지 않고, 가家에는 숙塾을 두지 않고 있다.
사士가 임용되기 전에는 혹 부모와 처자를 넉넉하게 살게 할 수가 없고 거처할 곳도 없으며, 덕행德行을 완비完備하고 재능才能을 갖추었어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또한 등용하지를 않으니, 사士들이 어떻게 스스로 벼슬에 나아가고자 힘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의 사士들로 하여금 옛날의 사士와 같지 않게 한 것은,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시대의 추세이니, 시대의 추세가 바뀌면 성현聖賢도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맹자孟子께서 왕공王公을 만나지 않은 것이나, 공자孔子께서 계씨季氏의 하급관리 노릇을 한 것을, 이를 시대의 추세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士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이 그 덕행德行과 재능才能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법도法度 때문이지만, 담당자가 좋아하고 싫어함은 지금의 법도法度와도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사士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지금의 법도法度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담당자가 좋아하고 싫어함에 달려 있게 되었다.
지금의 담당자가 옛날의 담당자와 다르고, 뒷날의 담당자는 또 지금의 담당자와 다를 것이니, 담당자의 좋아하고 싫어함이 어찌 일정한 기준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사士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이 틀림없이 끝내 기필할 규범規範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는 말만을 살펴보고 사람을 등용하면 실수를 면할 수가 없는데, 등용하고서 또 이른바 그가 말한 것을 시행할 수도 없게 하니, 이는 실책失策 중의 실책失策인데, 더구나 또 이에 더하여 담당자가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정한 기준이 없음에랴!
사士는 그만둘 수 있는 형세가 있는데, 그만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만두지 않는다면 도道가 있음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양숙명楊叔明의 형제는 아버지 때문에 모두 서울의 벼슬자리를 맡았으니, 그 형세가 내가 이른바 거처할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부모처자를 넉넉히 살게 할 수 없는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자신을 굽혀서 진사進士가 되고, 또 담당자에게 몸을 굽히니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않는 듯하였다.
두 사람은 본시 늘 도道를 실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또한 나와는 붕우朋友로 사귀는 사이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깨닫지 못함이 있을까 두려워서 〈진설進說〉을 지어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