比得足下於客食中하야 窘窘相造謝나 不能取一日之閑하야 以與足下極所欲語者어늘 而舟卽東矣라
足下詩
에 하니 夫君子之於學也
에 固有志於天下矣
라
然先吾身而後吾人이니 吾身治矣면 而人之治不治는 係吾得志與否耳라
孔子之說이 如此어늘 而或以爲君子之學이 汲汲以憂世者는 惑也라
惑於此
하야 而進退之行
이 不得於孔子者有之矣
라 故
이니라
有難予者曰 然則聖人은 忘天下矣오하야늘 曰 是不忘天下也라하니라
象曰 拔茅貞吉은 志在君也라하니 在君者는 不忘天下者也요 不可榮以祿者는 知命也니라
吾雖不忘天下나 而命不可必合이니 憂之인들 其能合乎아
然仕於其時하야 而不得其志하니 不得以不憂也어니와
仕不在於天下國家
와 與夫不仕者
는 未始有憂
니 之類是也
니라
라하니 豈如彼所謂憂天下者
의 僕僕自枉而幸售其道哉
리오
今窮於下하야 而曰 我憂天下라하고 至於慟哭者면 無乃近救鄕隣之事乎아
孔子所以極其說於知命不憂者는 欲人知治亂有命하야 而進不可以苟니 則先王之道得伸也니라
世有能諭知命之說이로되 而不能重進退者有矣니 由知及之오도 仁不能守之也니라
始得足下文하고 特愛足下之才耳러니 旣而見足下衣刓屨缺호되 坐而語에 未嘗及己之窮하고 退而詢足下하니 終歲食不葷호되 不以絲忽妄售於人하니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대하여 논한 부분에 또한 근거가 있다.
모某는 봉원逢原 족하足下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이 편지를 올립니다.
근자에 족하足下께서 여사旅舍에 기거寄居하시는 중에 만나 급박하게 서로 인사를 올리기는 하였으나, 하루 동안의 시간도 낼 수가 없어서 족하와 나누고자 하는 말을 다 하지 못하였는데, 제가 탄 배는 이미 동쪽으로 떠나버렸소.
근간에 족하의 시詩를 열람해보고, 내심內心에 의문이 생겼으므로 감히 알려주지 않을 수가 없소.
족하의 시詩에 ‘창생蒼生을 위해 눈물을 흘리게 됨을 탄식한다.’는 말이 있는데, 대저 군자君子가 학문을 함에 있어서 본시 목표가 천하天下의 제도濟度에 있는 것이오.
그리고 먼저 내 몸을 수양한 이후에 우리 백성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내 몸이 수양되었다 해도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을 수도 있고 다스릴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은, 내가 뜻을 실현할 기회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오.
내 몸도 오히려 명命에 매어있는 것이니, 천하를 다스림이 명命에 달려 있지 않을 수 있겠소?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명命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군자君子라 할 수가 없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도道가 장차 행해지게 되는 것도 명命이고, 도道가 장차 행해지지 않게 되는 것도 명命이다.” 하셨소.
공자孔子의 주장이 이와 같은데, 혹 군자君子가 닦는 학문이 세상의 근심에 급급汲汲해한다면 이는 미혹된 것이라고 생각하오.
이런 일에 미혹되어 벼슬에 나가고 물러나는 행위가 공자孔子의 주장과 합치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공자께서는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었다.[孔不可暖席]”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오.
나는 홀로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애당초 근심이 있지 않다고 생각하오.
나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성인聖人은 천하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리고 지내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천하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은 것이오.” 하였소.
《주역周易》 비괘否卦의 상사象辭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폐색閉塞된 시기時期에는 절검節儉하는 덕행德行으로 위난危難을 피하고, 영화로운 지위에 올라 후厚한 녹祿을 받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긴다.” 하였고,
그 초육初六 효사爻辭에, “띠풀의 뿌리가 서로 당기며 지하에 어려 있듯이, 나아가지 않고 정도正道만을 지키기를 동류同類들과 함께 한다면 바르고 길吉하게 된다.” 하였으며,
그 상사象辭에, “나아가지 않고 정도正道를 고수固守함이 바르고 길吉한 것은, 뜻이 군주君主에게 있어서이다.” 하였으니, 뜻이 군주에게 있다는 것은 천하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은 것이며, 영화로운 지위에 올라 후록을 받는 것을 불가하게 여기는 것은 명命을 아는 것이오.
내가 비록 천하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고 있다 해도 명命이 반드시 그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니, 이를 근심한다고 해서 부합하게 되겠소?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속세를 떠나 은둔하여 지내면서 번민함이 없다.”
“천도天道의 운행을 즐기고 성명性命을 자연自然에 맡기므로 근심함이 없다.” 한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오.
《시경詩經》 시詩 삼백편三百篇 가운데 〈백주柏舟〉, 〈북문北門〉 같은 유類에는 근심함이 있소.
그러나 그 당시에는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이를 근심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을 뿐이오.
벼슬을 함이 천하 국가를 위함에 있지 않거나 아예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애당초 근심할 일이 없었으니, 〈군자양양君子陽陽〉, 〈고반考槃〉 등이 이런 유類의 시詩들이오.
설령 근심함이 있는 시詩들도 성인聖人은 근심함이 없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는 될 수가 없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윤伊尹은 천하天下의 뭇 서민庶民들 가운데 그 은택恩澤을 입지 못한 사람을 보게 되면, 마치 자기가 떠밀어서 도랑 가운데 빠지게 한 것처럼 여겼다.” 하였으니, 천하天下에 대하여 근심하였다고 말할 만하오.
그러나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초빙하였을 때에 오히려 안한安閒 무욕無慾한 태도로 말하기를, “나는 농토 사이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요순堯舜의 도道를 즐기고 있노라.” 하였으니, 어찌 저 이른바 천하를 근심하는 자라 하고, 자신은 분주하게 그릇된 일을 행하면서 그 도道를 실현하기를 희구하는 자와 같을 수 있겠소?
또한 우禹와 직稷과 안회顔回의 도道가 같았음을 주장하면서, “이웃 마을에 싸우는 사람이 있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갓끈을 늘어뜨리고 가서 구해 주는 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하셨으니,
이제 아랫자리에서 궁곤하게 지내면서, “나는 천하의 일을 근심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통곡을 하는 자가 있다면, 이웃 마을의 일에 참견하려는 사람과 유사하지 않겠소?
공자께서 천명을 알아서 근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극진하게 하신 소이所以가 사람들로 하여금 천하天下의 치란治亂에 명命이 있으므로 벼슬에 나아감을 구차하게 추구해서는 안 됨을 알게 하고자 해서였으니, 그렇게 한다면 선왕先王의 도道가 펼쳐질 수 있을 것이오.
세상에는 지명知命에 대한 이론은 명료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진퇴進退를 신중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지혜智慧는 이에 미치면서도 인仁으로 이를 지킬 수 없는 사람도 있소.
처음 족하足下의 편지를 받고는 특별히 족하의 재능을 아꼈을 뿐이었는데, 그런 후에 족하가 해진 옷을 입고 찢어진 신을 신고 있으면서도 앉아서 대화를 할 때에 일찍이 자신의 궁곤窮困에 대하여 언급한 일이 없음을 보았고, 물러나서 족하를 살펴보니 일 년 내내 소박한 음식을 먹되 털끝만큼도 남에게 함부로 잘 보이려 아첨하거나 자랑하지 않았소.
세상에 스스로 굳건한 뜻을 세운 분으로 족하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나는 그 때문에, 지혜로운 경지에 도달하였고 인덕仁德은 또한 이 신조信條를 지킬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여, 모某가 배워 알고 있는 바를 족하足下께 알려드리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