招僊觀이 在安仁郭西四十里하니 始作者와 與其歲月은 予不知也로라 祥符中에 嘗廢하야 廢四五十年에
而道士全自明이 以醫游其邑하니 邑之疾病者賴以治하야 而皆憂其去라
人相與言州하고 出材力하야 因廢基하야 築宮而留之하니 全與其從者一人으로 爲留하야 而觀復興이라
全識予舅氏하니 而因舅氏하야 以乞予書其復興之歲月하다
夫宮室器械衣服飮食은 凡所以生之具요 須人而後具니
而全之爲道士에 人須之而不可以去也하니 其所以養於人也 視其黨에 可以無媿矣요 予爲之書도 其亦可以無媿焉이라
11. 무주撫州 초선관招僊觀을 중축重築한 기記
짧게 구성한 문장 속에 원산遠山의 경태景態가 잘 드러나 있다.
초선관招僊觀은 안인현安仁縣 성곽城郭 서쪽 40리里 되는 곳에 있는데, 처음 세운 사람과 그 시기는 내가 알지 못하고, 상부연간祥符年間에 무너져서 무너진 채로 4, 50년을 지내왔었다.
그 후 도사道士 전자명全自明이 그 고을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치료해 주어 고을 안의 병들었던 사람들이 그 덕택으로 병이 치유治癒되니, 모두들 그가 혹 떠나지나 않을까 근심하게 되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고을에 건의하고 자재와 노동력을 출연하여 무너진 옛 초선관招僊觀의 기초 위에 건물을 다시 축조하고 그곳에 머물게 하니, 전자명全自明이 시종 한 사람과 함께 머물게 되어 초선관招僊觀이 부흥復興되었다.
전자명全自明은 나의 장인어른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장인어른을 통하여 초선관을 다시 일으키게 된 사연과 시기를 글로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대저 궁실宮室과 기물器物들과 의상衣裳과 음식飮食은 생활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것들이고, 사람이 필요로 한 이후에야 갖추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도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으면, 설령 스님과 도사道士라 할지라도 두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명이 도사노릇을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해서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이니, 그가 사람들에게 봉양奉養을 받는 것이 그 동류들에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고, 내가 그를 위해 글을 짓는 것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 때문에 그를 위해 이 글을 지은 것이다.〉
경력慶曆 7년 7월이 초선관招僊觀을 다시 세운 연월年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