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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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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序世系外 特以虛議揭之於碣하니 亦變調
선원현태군源縣太君하후씨夏侯氏 제주濟州鉅野人이니 상서가부원외랑尙書駕部員外郞之子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상서호부시랑尙書戶部侍郞之孫이요선원현태군선원현태군師諱之曾孫이요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지등주군주사知鄧州軍州事 양하공陽夏公之夫人이요 태상박사太常博士 통판분주군주사通判汾州軍州事之母
年二十三卒하니 後五年항주杭州부양富陽하다
於是時 양하공陽夏公태상시승太常태상시승 秘閣校理하고 태상박사博士 生五歲矣 而其女兄一人 亦幼러라
又十五年강정康定二年 박사博士擧夫人如등주하야 以合於양하공陽夏公之墓하니임천臨川왕모王某書其碣曰
夫人以順爲婦하고 而交族親以謹하며 以嚴爲母 而撫媵御以寬하다
양하공陽夏公之名 天下莫不聞하니 而曰 吾不以家爲恤이나 六年於此者 夫人之相我也라하다
故於其卒 聞者欲其有後러니 而夫人之子 果以才稱於世하니라
嗚呼
양하공陽夏公之事 在太史하니 雖無刻石이라도 吾知其不朽矣로라
若夫夫人之善 不有以表之隧上이면 其能與公之烈 相久而傳乎
박사博士所以屬予之意也
及至後世하야 自當世所謂賢者 於其家不能以獨化어늘 而夫人卓然如此하니 惜乎 其蚤世也
顧其行治컨대 雖列之於하야 以爲後世觀이라도 豈愧也哉


14. 선원현태군 하후씨의 묘갈
세계世系서술敍述한 것 이외에는 다만 자신의 생각만을 묘갈墓碣에 기록하였을 뿐이니, 이는 또한 묘갈문墓碣文변체變體라 하겠다.
선원현태군仙源縣太君 하후씨夏侯氏제주濟州 거야인巨野人이니, 상서가부원외랑尙書駕部員外郞 의 따님이고,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상서호부시랑尙書戶部侍郞 초공譙公 손녀孫女이며, 증태자태사贈太子太師 증손녀曾孫女이고,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지등주군주사知鄧州軍州事 양하공陽夏公 사씨謝氏 부인夫人이며, 태상박사太常博士 통판분주군주사通判汾州軍州事 경초景初의 어머님이다.
23세에 하니, 5년 후에 항주杭州부양富陽하장下葬하였다.
이때에 양하공陽夏公태상시승太常寺丞 비각교리秘閣校理로 있었으며, 태상박사太常博士는 태어난 지 5년이 되었을 때이고, 그의 손위 누님도 또한 어렸다.
그 후 15년이 지난 강정康定 2년에 박사博士부인夫人등주鄧州이장移葬하여 양하공陽夏公합장合葬하였는데, 임천臨川 왕모王某는 그 묘갈墓碣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부인夫人순종順從으로 아내 노릇을 하였고, 친족들을 성심으로 대하였으며, 어머니 노릇은 위엄威嚴 있게 하였으나 비첩婢妾들은 관대하게 감싸주었다.
양하공陽夏公명성名聲이 천하에 알려지지 않은 곳이 없게 되자, 말하기를 “나는 집안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도 결혼 6년 만에 이렇게 된 것은 아내가 나를 잘 도와주어서 된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부인이 하자, 소문을 들은 이들이 그 후손이 잘되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부인의 아들이 과연 재능이 있는 인물로 세상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
아아!
양하공陽夏公사적事績은 역사 기록에 수록되었으므로, 비록 비석碑石에 새겨놓지 않는다 해도, 영원히 전해질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부인夫人선행善行을 만약 묘도墓道에 새겨서 세워놓지 않는다면, 의 업적과 함께 영구히 전해질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박사博士가 나에게 묘갈문墓碣文 지어주기를 부탁한 이유인 것이다.
내가 《시경詩經》을 읽어보니, 나라 사대부士大夫부인夫人들이 몸을 수양修養하고 행동을 신칙申飭하여 예법禮法에 맞게 처신하고 그들의 부군夫君을 보좌하고 권면勸勉할 수 있었으므로, 왕도王道가 이에 힘입어서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이고, 대체로 그 법도法度교화敎化가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니, 그 습속習俗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후세後世에 이르러 이른바 현자賢者라는 사람들도 수신修身을 잘하여 그 집안을 교화敎化시키는 일이 없게 되었는데, 부인夫人만은 우뚝하게 뛰어남이 이와 같았으니, 그런 분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애석할 뿐이다.
그분의 행실行實사적事績을 고찰해보건대, 비록 이를 《시경詩經》의 〈주남周南〉, 〈소남召南〉 속에 나열羅列하여, 후세後世귀감龜鑑으로 삼는다 해도, 어찌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역주
역주1 僊源縣太君夏侯氏墓碣 : 本文의 墓主는 謝絳의 夫人으로, 그의 아들 謝景溫은 王安石과 절친한 친구였고, 그의 딸은 왕안석의 아우 王安禮와 혼인한 사이였다. 本文은 夫君과 合葬한 康定 2년(1041)에 지은 것으로, 당시 왕안석이 21세였고, 왕안석이 지은 200餘 篇의 碑誌類 가운데 가장 일찍 지은 것이다. 墓碣文은 墓碑文의 異體로 실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역주2 譙公 : 冊封받은 封號 譙國公을 지칭하는 듯하나 詳考할 수가 없다.
역주3 謝絳 : 994~1039. 爲人이 修潔溫藉하고 淸廉하였으며 兵部員外郞과 知制誥 등을 역임하였고, 《宋史》에 立傳되었다.
역주4 景初 : 謝景初로, 博學能文하고 詩를 잘 지었으며, 왕안석과 절친한 사이였고, 4個州의 通判과 屯田郞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역주5 予讀詩……而王道賴以成 : 〈毛詩序〉에, 《詩經》의 〈周南〉, 〈召南〉에 수록된 여러 詩의 解說에 婦人의 德을 찬미한 부분이 많은데, 이를 지칭한 것이다.
역주6 : 《詩經》 中의 〈周南〉과 〈召南〉 二風을 지칭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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