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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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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2. 영가현군 진씨의 묘지명
次婦之賢 始則於其夫之言하고 夫亡 則於其兄之子之言으로 爲案하니 有法이라
부인婦人현숙賢淑함을 차례로 기술記述하면서, 그 부군夫君이 한 말로 시작하여 부군夫君이 사망한 후의 일은 형의 아들이 말한 것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 법도法度에 맞는다.
陳氏 於蘇州爲大姓이니 夫人者 太子中允諱之武之子 某官贈太常卿諱郁之孫이요 左贊善大夫諱質之曾孫이며 而太常博士之妻也
진씨陳氏소주蘇州대성大姓으로, 부인夫人태자중윤太子中允 지무之武의 따님이고, 모관某官을 지내고 태상경太常卿추증追贈 손녀孫女이며,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증손녀曾孫女이고, 태상박사太常博士 왕군王君 의 아내이다.
聰明順善하야 動有禮法하고 以不及養舅姑也 故於祭祀尤謹하니라
총명聰明하고 성실하게 순종하였으며, 예법禮法에 맞게 행동하였고, 출가出嫁해서는 시부모媤父母가 이미 작고作故하여 봉양奉養할 수 없었으므로, 그분들의 제사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博士祿賜 盡之宗族朋友하고 不足則出衣服簪珥助之호되 而不言하고
박사博士봉록俸祿을 받으면 종족宗族붕우朋友의 접대에 모두 쓰고, 부족하면 의복이나 패물을 팔아 도와드리면서도 이를 입 밖에 들어낸 일이 없었다.
選飾妾御하야 進之不忌 然博士終無子하니
을 곱게 꾸며서 남편을 시침侍寢하도록 바치기를 꺼리지 않았으나, 박사博士는 끝내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蓋吾聞於博士者如此
대체로 내가 박사博士에게 들은 것들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撫博士之兄子하야 如已子하고 哭博士三年 未嘗如陳氏러라
박사博士의 자식들을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감싸 길렀고, 박사博士삼년상三年喪을 치르면서 진씨陳氏처럼 슬퍼한 사람이 없었다.
除喪大貧하니 顯者求以爲妻하고 族人强之호되 不可하고 又强之하니 則涕泣自誓러라
을 마치고 매우 가난하게 지내니, 현달顯達한 사람이 아내로 삼겠다고 청혼請婚을 하였고, 가족들도 강요하였으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으며, 거듭 강요하였지만 눈물을 흘리며 끝내 수절守節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居頃 感疾以死하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蓋吾聞於博士之兄子景元者如此
대체로 내가 박사博士의 아들인 경원景元에게서 들은 것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然夫人之行 非特出於二人之言이라 凡習陳氏王氏者 皆知其爲賢하야 而哀其志러라
그리고 부인夫人의 행실은 다만 두 사람의 말에서 나온 것뿐이 아니라, 진씨陳氏왕씨王氏의 일을 익히 아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의 현숙賢淑함을 알고 있고 그 정절貞節애긍哀矜히 여겼다.
其封曰永嘉縣君이요 其卒於蘇州하니 以治平二年十一月九日 年三十八이라
봉호封號영가현군永嘉縣君이라 하였고, 부인이 소주蘇州에서 한 때가 치평治平 2년 11월 9일이었으며, 향년享年이 38세였다.
其葬以三年十一月某日 從博士於閶門之西原하다
부인의 장례葬禮치평治平 3년 11월 모일某日박사博士를 따라서 여문閭門의 서쪽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銘曰
이에 다음과 같이 을 지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이분을 따랐고, 죽어서도 이분을 따라서 함께 묻혔네.
歸義與命하니 奚傷乎無子리오
운명을 따르며 절의節義를 지켰으니, 자손이 없은들 어찌 슬퍼할 게 있으랴!
역주
역주1 永嘉縣君陳氏墓誌銘 : 本 墓誌銘은 墓主를 下葬한 治平 3년(1066)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王君諱逢 : 王逢(1005~1063)을 높여 부른 것으로, 博識하고 講說에 能하였으며, 《宋史》에 立傳된 인물이다.
역주3 穀也從於此 喪也隨以死 : 《詩經》 〈王風 大車〉에서 “살아 있을 때에는 따로 살다가,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혔네.[穀則異室 死則同穴]”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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