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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1)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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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一通問書 自不可及
하노이다
昔者 幸以先人之故 得望步趨하고 伏蒙撫存敎道 如親子姪이로소이다
而去離門牆 凡五六年이어늘 一介之使 一書之問 不徹於하니 誠以苛禮不足報盛德이요 空言不能輸欲報之實이니 顧不知執事察不察也로소이다
去年得邑海上하야 塗當出越하야 而問聽之繆 謂執事在焉이러니 比至越而後 知車馬在杭이로소이다
行自念父黨之尊이요 而德施之隆이어늘 去五六年而一書之不進하고 又望門不造하니 雖其心之勤企而欲報者猶在 而執事之見察 其可必也리잇가
且悔且恐하야 不知所云이로소이다
輒試陳不敏之罪於左右 顧猶不敢必左右之察也러니
不圖執事遽然貶損手敎하시고 重之蜀牋兗墨之賜하시며
文辭反復하야 意指勤過하시니 然後知大人君子 仁恩溥博하야 度量之廓大如此로소이다
小人 無状하야 不善隱度하고 妄自悔恐하야 而不知所以裁之也니이다
一官自綴하야 勢不得去하니 欲趨而前이나 其路無由니이다 唯其思報하야 心尙不怠하노이다


06. 시랑侍郞에게 올린 편지
일반적인 한 통의 문안편지로는 미칠 수 없는 경지의 글이다.
는 아뢰나이다.
지난 날 선친先親의 장례를 도와주신 연고로 어르신을 뵐 수 있었고, 감싸 보살펴 주시고 가르쳐 인도하시기를 마치 친 자질子姪처럼 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후 문하門下를 떠나서 5, 6년 사이에는 한 사람의 심부름꾼도, 한 통의 문안편지도 올리지를 못했는데, 진실로 번쇄煩碎한 예절로는 성덕盛德을 보답하기에 부족하고, 빈 말로는 보답하고자 하는 실상實狀을 전할 수가 없어서였으니, 다만 집사執事께서 이를 살펴 주실지 살펴 주시지 않으실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지난해에 바닷가 고을인 은현鄞縣을 맡게 되었을 때에, 가는 길이 월주越州를 통과하게 되어 집사執事께서 그곳에 계시니 뵙고 문안을 올릴 수 있으리라고 잘못 생각하였다가, 월주에 가까이 이른 이후에야 집사執事께서 항주杭州에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바로 아버지 연배年輩의 존귀한 어른이시고 은덕을 베푸심이 융숭하셨는데 5, 6년이 지나도록 편지 한 장 올리지 않고 또 문하에 찾아가 뵙지도 않았으니, 비록 마음으로 절실하게 생각하고 보답하고자 함이 있었다 해도 집사執事의 보살핌을 받을 것을 기필期必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한편으로는 뉘우치고 한편으로는 한탄하면서 말씀드릴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이에 오로지 집사執事불민不敏했던 죄를 말씀 올리면서도, 오히려 집사執事께서 반드시 이를 살펴 주시리라고 감히 기대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황공스럽게도 집사執事께서 손수 쓰신 가르침을 주시는 편지와, 이에 더하여 땅에서 생산된 아름다운 종이와 땅에서 제조한 좋은 먹까지 보내주셨습니다.
보내주신 글에 거듭 지극히 은근하신 뜻을 전해 주시니, 비로소 대인大人 군자君子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가 끝없이 넓으시고 도량의 광대하심이 이와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인은 보잘 것 없어서 헤아리기를 잘 하지 못하고 망연히 뉘우치고 두려워하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나의 관직에 스스로 얽매여서 형편상 떠날 수가 없으니, 달려가 뵙고자 해도 방법이 없어서 오직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하며, 그 마음만은 오히려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나이다.


역주
역주1 上郞侍郞書 : 이 글은 知鄞縣事가 된 이듬해에 郎 侍郞에게 올린 것으로, 郎 侍郞은 郎簡(975~1063)을 지칭한다. 그가 尙書工部侍郞으로 致仕하였으므로 郎 侍郞이라 指稱한 것이다.
역주2 隷人之聽 : 여기서 隷人은 상대방의 下人을 이르는 말로, 상대방을 恭敬하는 뜻을 보이기 위해 상대방의 下人에게 말을 들려준다 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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