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1. 태상박사 정군의 묘표
荊公卒無一言許可 其間極有分寸處
형공荊公이 끝까지 그를 인정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지극히 세세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德安鄭湜 書其父太常博士諱詒字正臣之行治伐閱世次하야 因其妹壻廣陵朱介之하야 以來請曰
덕안인德安人 정식鄭湜이 그의 부친인 태상박사太常博士 정신正臣한 일, 공적功績경력經歷, 이어 내려온 가계家系차서次序 등을 기록해서, 그의 매부妹夫광릉인廣陵人 주개지朱介之에게 주어 보내어 다음과 같이 하였다.
鄭氏故家滎陽이라가 有善果者卒於唐江州刺史하야 而子孫爲德安人이라
정씨鄭氏과거過去형양滎陽에 살았는데, 선과善果라는 분이 계셔서 당대唐代강주자사江州刺史로 계시다가 사거死去하였으므로, 자손子孫덕안인德安人이 되었습니다.
自善果至胵七世 生裔하야 爲樂淸縣令하니 君之大父也
선과善果로부터 에 이르기까지 7이고, 그분이 를 낳았는데, 낙청현령樂淸縣令을 지냈으니, 조부祖父가 됩니다.
裔生柬하니 君之父也 以詩書敎授鄕里하고 而終不仕
을 낳았으니, 그분이 부친父親이고, 향리鄕里에서 시서詩書를 가르치고 끝내 벼슬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君以景祐四年進士 爲洪州都昌縣主簿 於是令老矣하야 事皆決於君하니 而都昌至今稱以爲能하고 又爲廬州合肥縣尉 盜發輒得이라 故其後無敢爲盜者하다
경우景祐 4년(1037)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홍주洪州 도창현都昌縣주부主簿가 되었을 때에 현령縣令이 늙어서 일을 모두 에게 결정하도록 위임하였는데, 도창都昌에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능함을 칭찬하고 있으며, 또 여주廬州 합비合肥현위縣尉로 있을 때에 도둑이 일어나면 즉시 잡아들이니, 그 때문에 그 뒤부터는 감히 도둑질하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又爲同州朝邑縣令하니 案簿書하야 度民力所堪以均賦役하야 而人不困하고
또 같은 조읍현령朝邑縣令이 되었을 때에, 때마침 섬서陝西 지방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문서文書를 살펴보고 백성들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헤아려서 부역을 고르게 부과하여, 인민이 곤고困苦를 겪지 않게 하였습니다.
又掌集慶軍書記할새 歲旱호되 轉運使不欲除民租하고 以屬其守하며 而使君出視어늘 君以實除民租如法하다
다시 집경군集慶軍장서기掌書記가 되었을 때에, 한발旱魃이 들었는데도, 전운사轉運使가 백성들의 조세租稅를 면제해주려 하지 않고, 그 수령守令들에게 징수徵收를 재촉하면서 으로 하여금 나가서 이를 살피도록 하니, 실상實狀을 따져서 법에 정해진 규정대로 백성들의 조세를 감면해주었습니다.
又遷秘書省著作佐郞하고 知南康軍南康縣이라가 移知梧州하다
다시 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으로 옮겼고, 남강군南康軍 남강현南康縣지사知事가 되었다가 오주梧州지사知事로 옮겼습니다.
方是時 하니 吏多避匿하야 卽不往이어늘 君獨亟往하야 治城塹하고 集吏民以守하야 而州無事하니
바로 그때에 농지고儂智高을 일으키니, 관리官吏들 가운데 이를 피해 숨고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은 홀로 즉시 부임하여 성참城塹을 수리하고 관리와 백성을 모아서 을 지켰으므로 고을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經略使擧君以知賓州하고 再遷至太常博士而歸하다
경략사經略使빈주賓州지사知事로 천거하였고, 다시 옮겨서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爲陵臺令 召見하니 言事稱旨하야한대 未赴하고 以嘉祐三年三月二十四日卒하니 年六十이라
능대령陵臺令이 되었을 때에 황상皇上께서 불러 보시고, 그가 하는 말과 일이 뜻에 맞았으므로, 비의緋衣으로 장식한 어대魚袋를 하사하셨는데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우嘉祐 3년 3월 24일에 하니, 향년享年이 60이었습니다.
君前夫人張氏 後夫人吳氏 子男三人이니 其長則湜也 次沿이요 次深이며 女四人이니 其三人已嫁矣하니 董振何贄朱介之 其壻也
전부인前夫人장씨張氏이고, 후부인後夫人오씨吳氏이며, 아들이 셋인데, 장남長男이고, 다음이 沿이고, 다음이 이며, 딸이 넷인데, 그 가운데 셋은 이미 출가出嫁하였으니, 동진董振하지何贄주개지朱介之가 그 사위들입니다.
君爲人 孝友諒直하야 得人一善이면 若己出하고 能振窮急호되 而自養尤儉約하다
은 사람됨이 효성孝誠우애友愛가 있고 신실信實하고 정직正直하여, 남의 한 가지 선행善行을 얻게 되면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받아들이고, 곤궁困窮하고 위급危急한 사람을 구제救濟하면서도 자신의 생활은 더욱 검약儉約하게 하였습니다.
自賓州歸 所齎無南方一物하니 其平生所爲如此
빈주賓州에서 돌아올 때에 남방南方의 물건을 하나도 휴대하고 온 것이 없었으니, 그가 일생 동안 행한 바가 이와 같았습니다.
今旣以某年某月某日 葬君德安之永泰鄕谷步里호되 而未有以碣諸墓也일새 敢因介之以告하노라
이제 그해 모월某月 모일某日덕안德安영태향永泰鄕 곡보리谷步里안장安葬하였으나, 무덤에 묘갈墓碣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개지介之를 통해서 이를 아룁니다.” 하였다.
介之於余爲外姻이요 而其妻能道君之實하야 將懼泯沒而無聞하야 數涕泣屬其夫하고 求得余之一言以表之墓上이라
개지介之는 나와 인척姻戚간이고, 그의 부인夫人행적行績을 말하면서 장차 묻혀 없어져버려서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에게 부탁을 하였고, 나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무덤 위에 묘표墓表를 세울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한 것이다.
蓋余嘗奉使江東하야 泝九江하고 上廬山하야 愛其山川하야 而問其州人士大夫之賢而可與游者호되 莫能言也러니 今湜能言其父之賢如此하니 問其州人與之游仕於此者 乃以爲良然이로다
내가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강동江東 땅을 지날 때에, 구강九江을 거슬러올라가 여산廬山에 올라서는 그 산천山川을 사랑하여, 그 고을 출신의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훌륭한 사람으로, 함께 유람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제 이 그 부친父親현명賢明함이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고을 사람으로 이곳에서 벼슬하고 유람할 수 있는 사람을 묻는다면 곧 진실로 이와 같은 이를 천거하였을 것이라고 여긴다.
嗟乎
아아!
鄭君誠如此하니 豈特一鄕之善士歟
정군鄭君이 진실로 이와 같았으니, 어찌 다만 한 고장의 훌륭한 선비에 그칠 뿐이겠는가?
而其子男與女子 又能如此 故爲序次其說하야 使表之墓上하노라
그리고 그 아들과 딸이 또 능히 이와 같이 원하고 있으니, 그 이야기를 차례로 서술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덤 위에 묘표墓表를 세위 이를 드러내게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太常博士鄭君墓表 : 本 墓表의 墓主 鄭詒는 嘉祐 3년(1058)에 卒하였다 하고, 安葬한 시기는 記載되지 않아서 언제 表를 지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嘉祐 3년에서 4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墓表는 墓碑와 같고, 死者의 행적을 기술하여 墓前에 세우는 것이므로 墓表라 칭한다. 明 徐師曾의 《文體明辯序說》 〈墓表〉에는 “考察해보건대 墓表는 東漢 때부터 시작되었고……그 文體는 碑碣과 동일하며 벼슬이 있거나 없거나 구별 없이 누구나 쓸 수 있으니, 碑碣이 死者의 등급에 따른 제한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按墓表自東漢始……其文體與碑碣同 有官無官皆可用 非若碑碣之有等級限制也]” 하였다.
역주2 陝西兵事起 : 康定 元年(1040)에 宋의 서쪽에 있던 西夏의 王 趙元昊가 陝西路의 延州와 保安 一帶를 침범한 일을 지칭한다.
역주3 儂智高爲亂 : 儂智高가 宋에 叛旗를 들고 邊境을 侵擾한 것이 皇祐 4년(1052)이다.
역주4 緋衣銀魚 : 緋衣는 淺紅色의 官服으로 5品官 朝散大夫 이상이 입을 수 있는 것이고, 銀魚는 銀으로 장식한 魚袋를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