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觀오자서子胥出死亡逋竄之中하야 以객경客寄之一身이러니 卒以說오吳하야 折不測之초楚하고 仇報恥雪하야 名振天下하니 豈不壯哉아
及其危疑之際에 能自慷慨하야 不顧萬死하고 畢諫於所事하니 此其志 與夫自恕以偸一時之利者론 異也라
강정康定二年에 予過所謂서산胥山者라가 周行廟庭하고 嘆오吳亡千有餘年에 事之興壞廢革者를 不可勝數로되 獨오자서子胥之祠 不徙不絶하니 何其盛也오
蓋亦오자서子胥之節이 有以動後世하고 而愛尤在於오吳也일새라
後九年에 낙안樂安장공蔣公爲항주杭使에 其항주州人力而新之어늘 余與爲銘也하노라
뛰어난 안목으로 전개한 논리가 오랜 옛날부터 많은 이들이 품어왔던 의문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살펴보건대 오자서伍子胥가 죽음과 도피생활에서 벗어나 객경客卿으로 일신一身을 의탁하였는데, 끝내는 오吳나라를 설득하여 흉악한 초楚나라를 꺾어서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어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게 하였으니, 어찌 장하다 아니할 수 있으랴!
그가 의심을 받게 된 위태로운 때에도, 스스로 강개慷慨한 의지를 가지고 만 번 죽음을 돌보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모두 간諫하였으니, 이는 그의 의지가 스스로 핑계를 대면서 한때의 이익이나 도모하는 자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도 옛 사대부士大夫들에 대해 평론하시면서 관이오管夷吾(管仲)와 장무중臧武仲 같은 무리들처럼 진실로 선善에 뜻을 두어서 당세當世에 도움이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간 과실이 있다 해도 전부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으니, 그렇다면 오자서伍子胥의 의리를 또한 어찌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강정康定 2년(1041)에 내가 이른바 오자서伍子胥의 사당祠堂이 있는 서산胥山이라는 곳을 지나다가 사당祠堂의 뜰을 한 바퀴 돌아보고서, 오吳나라가 망亡한 지 천여 년이 되었고, 일이 일어났다 무너졌다 폐지되었다 바뀌었다 한 것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도, 유독 오자서伍子胥의 사당만은 옮겨가지도 않았고 제사가 끊기지도 않았으니, 어쩌면 그다지도 성盛하게 받들었던 것인가 하고 탄복하였다.
이것이 어찌 오자서伍子胥의 신령神靈만이 오吳나라가 흥기興起할 바를 도모해서일 뿐이겠는가?
아마도 또한 오자서伍子胥의 절의節義가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킴이 있고, 사랑함이 더욱 오吳나라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 9년이 지나서 낙안樂安 장공蔣公께서 항주杭州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에, 그 고을 사람들이 인력人力을 동원하여 이를 새롭게 수축修築하였는데, 나는 이에 참여하여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
위대偉大한 오자서伍子胥는 절의節義를 실행하려 끝까지 달아나서,
드디어 책봉冊封받은 신하臣下가 되자, 발분發奮하여 몸을 돌보지 않았고,
간諫하는 말이 용납되고 계책計策이 실현되어, 오吳나라를 융성하게 하였네.
그 몸이 쫓겨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오吳나라 도성都城은 잠시 후에 폐허廢墟가 되었고,
지혜智慧 있는 사람으로 혼암昏暗한 군주君主에게 죽었지만, 충성심은 변함없이 남아 있었네.
천 년이 된 사당祠堂이 처음 지었을 때 그대로이네.
오직 충성忠誠스러운 그 마음 드러낸 것이고, 오직 효성孝誠스러운 그 신의信義 드러낸 것이네.
나는 비명碑銘을 사당祠堂 뜰에 새겨놓아, 세월이 지나도 속일 수 없음을 보이고자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