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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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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오자서의 묘명
隻眼之論 足破千古之疑
뛰어난 안목으로 전개한 논리가 오랜 옛날부터 많은 이들이 품어왔던 의문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予觀子胥出死亡逋竄之中하야 以客寄之一身이러니 卒以說吳하야 折不測之楚하고 仇報恥雪하야 名振天下하니 豈不壯哉
내가 살펴보건대 오자서伍子胥가 죽음과 도피생활에서 벗어나 객경客卿으로 일신一身을 의탁하였는데, 끝내는 나라를 설득하여 흉악한 나라를 꺾어서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어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게 하였으니, 어찌 장하다 아니할 수 있으랴!
及其危疑之際 能自慷慨하야 不顧萬死하고 畢諫於所事하니 此其志 與夫自恕以偸一時之利者 異也
그가 의심을 받게 된 위태로운 때에도, 스스로 강개慷慨한 의지를 가지고 만 번 죽음을 돌보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모두 하였으니, 이는 그의 의지가 스스로 핑계를 대면서 한때의 이익이나 도모하는 자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도 옛 사대부士大夫들에 대해 평론하시면서 관이오管夷吾(管仲)와 장무중臧武仲 같은 무리들처럼 진실로 에 뜻을 두어서 당세當世에 도움이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간 과실이 있다 해도 전부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으니, 그렇다면 오자서伍子胥의 의리를 또한 어찌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康定二年 予過所謂胥山者라가 周行廟庭하고 嘆吳亡千有餘年 事之興壞廢革者 不可勝數로되 獨子胥之祠 不徙不絶하니 何其盛也
강정康定 2년(1041)에 내가 이른바 오자서伍子胥사당祠堂이 있는 서산胥山이라는 곳을 지나다가 사당祠堂의 뜰을 한 바퀴 돌아보고서, 나라가 한 지 천여 년이 되었고, 일이 일어났다 무너졌다 폐지되었다 바뀌었다 한 것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도, 유독 오자서伍子胥의 사당만은 옮겨가지도 않았고 제사가 끊기지도 않았으니, 어쩌면 그다지도 하게 받들었던 것인가 하고 탄복하였다.
豈獨神之事吳之所興이리오
이것이 어찌 오자서伍子胥신령神靈만이 나라가 흥기興起할 바를 도모해서일 뿐이겠는가?
蓋亦子胥之節 有以動後世하고 而愛尤在於吳也일새라
아마도 또한 오자서伍子胥절의節義가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킴이 있고, 사랑함이 더욱 나라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後九年 樂安蔣公爲杭使 其州人力而新之어늘 余與爲銘也하노라
그 뒤 9년이 지나서 낙안樂安 장공蔣公께서 항주杭州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에, 그 고을 사람들이 인력人力을 동원하여 이를 새롭게 수축修築하였는데, 나는 이에 참여하여 다음과 같이 을 지었다.
烈烈子胥 發節窮逋하야
위대偉大오자서伍子胥절의節義를 실행하려 끝까지 달아나서,
遂爲冊臣하니 奮不圖軀하고
드디어 책봉冊封받은 신하臣下가 되자, 발분發奮하여 몸을 돌보지 않았고,
諫合謀行하야 隆隆之吳
하는 말이 용납되고 계책計策이 실현되어, 나라를 융성하게 하였네.
厥廢不遂 邑都俄墟
그 몸이 쫓겨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나라 도성都城은 잠시 후에 폐허廢墟가 되었고,
以智死昏이나 忠則有餘
지혜智慧 있는 사람으로 혼암昏暗군주君主에게 죽었지만, 충성심은 변함없이 남아 있었네.
胥山之顔 殿屋渠渠하야
서산胥山의 언덕에 사당祠堂 건물이 깊고 넓어
千載之祠 如祠之初로다
천 년이 된 사당祠堂이 처음 지었을 때 그대로이네.
孰作新之
누가 이를 새로 수축修築하였는가?
民勸而趨
백성들이 고무되어 부지런히 애쓴 것이네.
維忠肆懷 維孝肆孚
오직 충성忠誠스러운 그 마음 드러낸 것이고, 오직 효성孝誠스러운 그 신의信義 드러낸 것이네.
我銘祠庭하야 示後不誣하노라
나는 비명碑銘사당祠堂 뜰에 새겨놓아, 세월이 지나도 속일 수 없음을 보이고자 하네.
역주
역주1 伍子胥廟銘 : 伍子胥(?~B.C. 484)는 춘추시대 吳나라의 大夫로, 名은 員이고 字는 子胥이다. 楚나라 大夫였던 伍奢의 次子이고 伍尙의 아우인데, 費無忌가 楚 平王에게 太子가 伍奢와 叛逆을 도모한다고 誣告하여 父와 兄이 죽음을 당하자 伍子胥는 宋과 鄭을 거쳐 吳로 亡命하여, 吳를 도와 楚를 쳐서 首都 郢을 함락시키고 平王의 무덤을 파헤치고 회초리로 300대를 때려 父兄의 원수를 보복하였다. 또 吳王 夫差를 도와 越을 쳐서 크게 이기기도 하였으나, 그 후에는 吳王의 배척을 받아 王이 내린 칼에 엎어져 자살하였다. 《春秋左氏傳》, 《春秋公羊傳》, 《國語》, 《史記》 등에 그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2 孔子論古之士大夫……咸不廢也 : 《論語》 〈憲問〉에, 子貢이 말하기를 “管仲은 어질지 못한 사람입니까? 桓公이 公子糾를 죽였을 때에 함께 죽지를 못하였고, 또 그의 재상 노릇을 했습니다.” 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管仲이 桓公의 재상이 되어서, 제후들의 패자가 되어 천하를 바로잡아 놓았으므로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어찌 평범한 사람들처럼 의리를 지킨답시고 골짜기나 봇도랑에서 목매어 죽으면서 아무도 아는 이가 없게 하겠는가?[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라고 하였다.
또 자로가 인격이 구비된 훌륭한 사람인 成人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무중의 지혜와 공작의 욕심 없음과 변장자의 용맹과 염구의 재능에 예악으로 문채를 이루었다면 성인이라 할 수 있다.[子路問成人 子曰 若臧武仲之知 公綽之不欲 卞庄子之勇 冉求之藝 文之以禮樂 亦可以爲成人矣]”라고 하였다.
이어서 “장무중이 防 땅을 다스릴 후계자로 자기의 아들을 임명해주도록 魯公에게 요구하였으니, 비록 임금에게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라고 하였다. 본문에서는 이 내용을 포괄 요약하여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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