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篇無一實事하고 特點綴虛景百數十言하니 當屬一別調라
우정언右正言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特贈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汝陰상공常公이 以희령熙寧十年二月己酉卒하야 以五月壬申葬하니 임천臨川왕모王某誌其墓曰
公學不期言也하고 正其行而已요 行不期聞也하고 信其義而已라
所不取也에 可使貪者矜焉하야 而非彫斲以爲廉하고 所不爲也에 可使弱者立焉하야 而非矯抗以爲勇이라
終此而已矣라하다 及爲今天子所禮하얀 則出而應焉이라
使莅간관諫職하사 以觀其迪己也하시고 使董學政하사 以觀其造士也하시다
公所言乎上者無傳이나 然皆知其忠而不阿하고 所施乎下者無助나 然皆見其正而不苟하니
自주周道隱으로 觀學者所取舍하면 大抵時所好也어늘 違俗而適己하고 獨行而特起하니 嗚呼라
傳載공公久나 莫如以石이요 石可磨也요 亦可泐也나 謂공公且朽는 不可得也라
한 편 전체全體가 실제로 행行한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자신의 생각만으로 백수십百數十 자字를 차례로 엮어놓았으니, 하나의 별체別體에 소속所屬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우정언右正言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서 특별히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추증追贈된 여음인汝陰人 상공常公이 희령熙寧 10년 2월 기유일己酉日에 졸卒하여 5월 임신일壬申日에 하장下葬하니, 임천臨川 왕모王某가 그 무덤에 다음과 같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공公은 학문學問을 할 때에 자기 주장을 말로 드러내기를 기약하지 않고 그 행실을 바르게 하고자 할 뿐이었으며, 행실은 소문 나기를 추구하지 않고 그 의리를 미덥게 할 뿐이었다.
그가 추구하지 않는 바는 탐심貪心을 가진 사람을 바르게 바꿀 수 있어서, 겉치레로 청렴한 듯이 꾸미는 짓을 하지 않게 하였으며, 그가 하지 않는 바는 나약懦弱한 사람으로 하여금 굳건한 의지意志를 세우게 할 수 있어서, 특이한 행동을 하며 우쭐대는 것을 용기로 여기는 짓을 하지 않게 하였다.
관직官職을 주어도 취임하지 않았고, 불러도 나아가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반드시 물러나 있을 사람이로다!
이렇게 생을 마칠 뿐일 것이로다!” 하였는데, 지금의 천자天子께서 예禮를 갖추어 부르시니, 곧 나아가 응하였다.
이에 천자께서 그가 이르렀음을 기뻐하시며 마음을 비우시고 질문을 하셨다.
그에게 간관諫官의 직職을 맡기시어 그가 자기를 계도啓導함을 살펴보셨고, 국자감國子監의 일을 감독하게 하시어 그가 선비들을 임용함을 살펴보셨다.
공公이 황상皇上께 말씀드린 내용이 전해지지 않지만, 그러나 모두가 충심을 말씀드리고 영합하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아랫사람에게 시행한 것 중에 자신의 명성에 도움이 된 것이 없으나, 그러나 모두가 바르고 구차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라 사람들을 잘 길러주었으니〉 어찌 만년萬年이 되도록 장수長壽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병이 들어 서거逝去하였도다!
주周나라의 치도治道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학자學者들의 취取함과 버림을 관찰해보면, 대체로 시속時俗이 좋아함을 따르고 있는데, 시속時俗을 어기고 자신自身의 신조信條대로 나아가며, 홀로 실천하면서 우뚝하게 일어섰으니, 아아!
공公의 업적이 전傳에 등재登載된 지가 오래되었으나, 비석碑石에 새겨놓는 것만은 못하고, 비석碑石은 마멸磨滅될 수도 있고 또한 쪼개질 수도 있지만, 공公의 업적이 장차 영원히 전해지지 않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리라고 이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