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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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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사농경 분사 남경을 지낸 진공의 신도비
法度如兵伍
문장의 법도가 마치 군대의 항오行伍처럼 정연整然하다.
司農卿分司南京陳公 旣以嘉祐七年九月某甲子 葬開封府之祥符縣西韓村 皇考之塋하고 至十二月하야 公子世範等 乃來求銘하야 以作公碑
사농경司農卿 분사分司 남경南京 진공陳公은 이미 가우嘉祐 7년 9월 모일某日개봉부開封府 상부현祥符縣 서한촌西韓村선친先親 위국공魏國公 가 있는 선산先山에 장례를 모시고, 12월에 의 아드님 세범世範 등이 찾아와서 를 세울 수 있도록 명문銘文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蓋公昆弟 皆從先人游하고 而某又嘗得識公父子 故爲序其實而繫以銘하노라
형제兄弟들은 모두 나의 선친先親교유交遊가 있었고, 나도 일찍이 부자父子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그 실제 행적行績을 서술하고 명문銘文을 붙인다.
序曰
서문은 다음과 같다.
公諱某 字良器 尙書令兼中書令 衛國公諱嵩者爲曾祖 以贈太師 尙書令兼中書令 燕國公諱光嗣者爲祖 而尙書左丞 集賢院學士 諱恕之子也
는 아무개(執方)이고, 양기良器이니, 태사太師증직贈職되고 상서령尙書令중서령中書令으로 위국공衛國公이었던 증조부曾祖父이고, 태사太師에 증직되고 상서령尙書令중서령中書令으로 연국공燕國公이었던 광사光嗣조부祖父이며, 상서좌승尙書左丞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였던 의 아드님이다.
左丞當眞宗時參知政事러니 後以其子之貴 而贈至太師 尙書令兼中書令 魏國公하니
상서좌승尙書左丞께서는 진종眞宗 때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셨는데, 에 아드님인 기공岐公이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 인해 증직贈職되어 태사太師상서령尙書令중서령中書令 위국공魏國公에 이르렀다.
岐公之弟也 而於魏公爲少子 年六十八 以嘉祐七年六月 得疾分司하야 而以乙已棄世於陳州하다
기공岐公의 아우이시고, 위국공魏國公의 막내 아드님이시며, 68세였던 가우嘉祐 7년 6월에 분사分司로 계시면서 병을 얻어 을사일乙巳日(30일)에 진주陳州에서 서거逝去하셨다.
階至朝散大夫 勳至上柱國이요 爵至潁川郡開國子 食邑至六百戶 賜紫金魚袋하다
품계品階조산대부朝散大夫에 이르렀고, 훈급勳級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으며, 작위爵位영천군穎川郡 개국자開國子에 이르렀고, 식읍食邑이 600였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官終於司農卿하니 而所更者 秘書省正字 太常寺太祝 大理評事 光祿大理寺丞 太子中舍 殿中丞 國子博士 尙書虞部比部駕部員外郞 郞中 司農光祿少卿 少府監이요 任終於知陳州하니 而所歷者 監楚州衡州酒稅 知衢州江山縣 知南恩州 通判江揚洪廬潭州 知衡州 監江寧府糧料院 知興化軍 知均州 判登聞鼓院 知曹州 判殿中省 知郢州鄭州
벼슬은 사농경司農卿으로 마치셨으니, 역임하셨던 관직들은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 대리평사大理評事, 광록대리시승光祿大理寺丞, 태자중사太子中舍, 전중승殿中丞, 국자박사國子博士, 상서우부尙書虞部 비부比部 가부駕部 원외랑員外郞, 낭중郎中, 사농광록소경司農光祿少卿, 소부감少府監 등이었고 직임은 지진주知陳州로 마치셨으니, 역임歷任하셨던 직책들은 초주楚州형주衡州감주세관監酒稅官, 지구주강산현知衢州江山縣, 지남은주知南恩州, 강주江州양주揚州홍주洪州여주廬州담주통판潭州通判, 지형주知衡州, 감강녕부양료원監江寧府糧料院, 지흥화군知興和軍, 지균주知均州,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 지조주知曹州, 판전중성判殿中省, 지영주知郢州정주鄭州 등이었다.
其通判揚州廬州 皆有所避不赴하고 知郢州則未赴而徙하다
양주揚州여주廬州통판通判혐의嫌疑를 피해야 할 일이 있어서 부임赴任하지 않았고, 지영주知郢州는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벼슬이 바뀌었다.
凡仕四十三年하니 蓋其行事可記者衆矣로되 而公子所能記者
총 43년간 관직官職에 계셨으니, 그동안 행하신 일 가운데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의 아드님이 기억할 수 있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在江州 人大饑且疫이어늘 公爲具饘粥醫藥하고 不足則取廬山諸佛寺餘財以續之하니 所活以萬數러라
강주江州통판通判으로 계실 때에 인민들이 큰 기근饑饉역병疫病을 겪게 되자, 이 죽과 의약품을 갖추어서 구휼과 치료를 행하였고 경비가 부족不足하면, 여산廬山의 여러 불사佛寺에 남아 있는 재물을 취하여 계속 비용을 대니, 살려준 사람이 수만數萬에 이르렀다.
有盜刈人之禾而傷其主者하야 當死어늘 公曰 이어든 況今哉아하고 卽奏貸其死하다
어떤 도둑이 남의 벼를 베어가고 그 주인에게 상해傷害를 가하여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는데, 공께서 “옛날에 굶주림을 구제하는 정사에는 사람들을 구휼함이 극진하였으면서도 오히려 형벌을 완화해주었는데, 더구나 지금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고, 사죄死罪사면赦免하여 속대贖貸할 수 있게 해주기를 건의하였다.
洪州大水 城之不滅者十五 水得城竇以入하니 擧城惶擾不知所爲로되
홍주洪州에 큰 홍수가 나서 안에 잠기지 않은 곳이 열에 다섯 정도였고, 물이 에 난 구멍을 통하여 들어오자 온 안 사람들이 당황하여 동요하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公豫具薪藁하야 不終日以塞하니
은 이런 일에 대비하여 미리 섶과 마른 풀을 준비해놓았다가, 이것으로 하루도 못 되어 이를 틀어막으니,
州人德之하야 曰無陳公이런들 吾屬如何矣오하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은덕恩德으로 여기며 “진공陳公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衡州之南山 廣袤百餘里 與夷接境하고 大木蒙密하니 中國人逋逃其中하야 冒稱夷人하고 數出寇常寧諸邑이라
형주衡州에 있는 남산南山은 가로와 세로가 100 에 이르고 오랑캐의 거주지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졌는데, 중원中原 사람들이 그 속으로 도망가 숨어서 함부로 오랑캐라고 자칭하면서, 상녕常寧의 여러 고을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도둑질을 하였다.
其酋有挾左道者하야 人傳以爲能致風雨하니 官軍尤憚之어늘
그 우두머리는 사교邪敎를 믿어서 사람들에게 그가 풍우風雨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하니, 관군官軍이 더욱 두려워하고 꺼리게 되었다.
公誘以恩信한대 則率衆數百來自占이러니 已而與其甥亡去하야 又將爲寇하니 州人皆恐이어늘
이 은혜와 신의로 그들을 유인하자, 무리 수백 명을 이끌고 와서 스스로 귀순하였는데, 그 후 다시 그의 생질과 함께 도망가서 또 도둑질을 하려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公設方略하야 以一日捕得殺之하다
이에 이 계책을 세워서 하루 만에 잡아서 죽였다.
天子賜詔書獎諭하니 公因圖上山川形勢攻取之策하고 以爲賊今不除 黨附日衆이요 夷人謂中國無能爲라하야 必出助之하리이다
황제께서 포장襃獎하는 말씀의 조서를 내리시니, 이 이어 산천山川의 형세와 공격해 빼앗을 계책을 지도地圖에 그려 올리면서 “지금 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패거리들이 날로 늘어날 것이고, 오랑캐들은 중국中國이 무능하다고 여겨서 반드시 이들을 도우러 나올 것입니다.
可須農隙發千人하야 使操斧斤하고 隨以强弩하야 斬木除道 則賊失所恃하야 不攻而自窮이요 又出其材 可以佐經用이리이다
모름지기 농한기農閑期천여千餘 을 동원하여 도끼와 자귀를 가지고 가고 강노수强弩手를 뒤따르게 해서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닦으면, 도둑들은 의지할 곳을 잃어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곤궁해질 것이고, 또한 그 목재를 반출하면 이로써 일상의 용도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려 하였다.
奏未報 轉運使害其事하야 劾公擅擊斷하고 不聽用佐吏하며 又嘗稱病不自祭하야 公坐此罷하니
그런데 미처 상주上奏도 하기 전에 전운사轉運使가 그 일을 방해하여, 이 그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보좌하는 관리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또 과거에 을 핑계대고 염제炎帝(神農氏)의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은 일이 있다고 탄핵彈劾하여, 이 이 일에 연좌되어 파직罷職되었다.
州人乞留호되 不得이러니 而賊果侵尋不制
고을 사람들이 유임留任을 애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의 예측대로 도둑들이 과연 침탈을 일삼아서 제어할 수가 없었다.
朝廷出使하고 發兵擊之하야 數年然後定하다
조정에서 초무사招撫使를 보내고 군사軍士를 동원하여 수년數年 동안 그들을 친 이후에야 평정할 수 있었다.
興化多進士하야 就鄕擧者常八九百人이어늘 而學舍弊小하고 無文籍이러니 公至하야 則新而大之하고 爲之購書하야 而國子之所有者皆具하다
흥화興化 고을은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인재人才가 많아서, 향시鄕試를 보게 되면 응시자가 늘 8, 9백 명이나 되었지만, 학사學舍가 허물어지고 비좁으며 소장所藏서적書籍도 없었는데, 지흥화군知興化軍으로 부임하여 이를 신축 확장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서적을 구입하여 국자감國子監에 소장하고 있는 서적들을 모두 갖추어놓았다.
均州漢上 舟子數溺商旅하고 取貨財호되 而以險爲解어늘
지균주知均州가 되어 한수漢水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에, 뱃사공들이 장사꾼들을 물에 빠트리고 그들의 재물을 약취掠取하고는, 물길이 험해서 저절로 빠져 죽은 것이라고 핑계를 대고 벌을 모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公捕案寘法하고 因取近灘數家하야 除其徭하고 使表水險하니 涉者因此得不死하다
이에 이 체포 조사하여 법대로 조치하고, 이어 험한 여울 가까이 사는 민가民家 몇 집을 하여 그들의 요역徭役을 면제해주고, 그들에게 물이 험한 곳을 표시하게 하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그 덕에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曹州多盜하야 亡命之尤凶强者七十餘人이어늘 公集重購하야 得之幾盡하고 又修律令하야 之法이라 故盜往往逃去之他境하니
지조주知曹州가 되었을 때에는 조주曹州에 도둑이 많아서, 살던 곳에서 도망쳐 와서 더욱 흉악하고 강포한 짓을 하는 자가 70여 명에 이르렀는데, 상금賞金을 내걸고 체포할 사람을 모집하여, 이들을 거의 다 잡아 없앨 수 있었고, 또 다섯 집을 한 로 하여 연대책임連帶責任을 지는 법을 시행하니, 그 때문에 도둑들이 그 지역에서는 발을 붙일 수가 없어서, 왕왕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기도 하였다.
蓋公施於政者能如此러라
대체로 이 다스릴 때에 시행한 것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公嘗爲書十二篇上之하고 曰國政要事라하니 其說多聽用하고
에 12의 글을 지어 올리고 제목題目을 〈국정요사國政要事〉라 하였는데, 그 주장 가운데 나라에서 받아들여 시행한 것이 많았다.
而中書欲遷職事 以獎之어늘 公乃自言호되 外祖王氏葬揚州無主後하니 願除淮南所當得之一官하야 以往視其丘墓而已라하니라
이에 중서성中書省재상宰相이 담당 사무를 옮겨주어 권면勸勉하려 하니, 이 스스로 말하기를 “외조부外祖父 왕씨王氏장례葬禮양주揚州에 모셨는데, 이를 관리할 후손이 없으니, 회남淮南 땅의 한 관직에 제수되어 그 묘소를 살필 수 있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다.
岐公之葬也 天子自曹州召公歸襄事하고 特詔許公升殿한대
의 형님 기국공岐國公의 장례를 치를 때에, 천자天子께서 지조주知曹州로 있던 을 불러들여 돌아와서 장례를 주관하도록 하셨고, 특별히 조서詔書를 내려서 이 궁전의 섬돌에 올라와 보고하도록 허락하셨다.
公謝岐公遭遇始終恩禮之厚하고 因乞御岐公之碑首하니 上爲動容하야 賜其首曰 襃忠之碑라하야늘 而公終無一言自及하다
기국공岐國公이 처음부터 끝까지 황상皇上은혜恩惠예우禮遇를 후하게 입은 것에 감사를 드리고, 이어서 황상께서 직접 쓰신 전서篆書기국공岐國公비수碑首를 장식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하니, 황상께서 용의容儀를 바로 하시고 그 머리에 ‘포충지비襃忠之碑’라 써주셨는데, 은 이 일이 자신의 청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끝내 단 한 번도 발설한 일이 없었다.
旣分司 無田園하야 僦官屋以居하고 自爲棺斂葬埋之制하니 趣於儉而已러라
남경南京분사分司가 되신 이후 전지田地가옥家屋이 없어서 관사官舍를 빌려 거주하셨고, 자신의 염습殮襲매장埋葬의 절차를 스스로 정해놓으셨으니, 검소하게 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少長好書하야 以至於老 於篆尤善하고
어려서부터 노경老境에 이르도록 항시 글씨 쓰기를 즐기셨고, 전서篆書주서籒書를 특별히 잘 쓰셨다.
有集二十卷하니 其文能世其家者也
문집文集 20이 있는데, 그 글은 공의 학설을 대대로 전할 만한 것들이다.
夫人馮氏 江南李氏時 宰相延巳之孫이라
부인夫人풍씨馮氏이씨李氏가 다스리던 남당南唐 때의 재상宰相이었던 풍연사馮延巳의 후손이다.
子男五人이니 世範 前商州洛南縣尉 世安 前廣州新會縣令이요 世修 大理寺丞이요 世永 將作監主簿 世奕 太常寺太祝이라
아들이 다섯인데, 세범世範상주商州 낙남현위洛南縣尉를 지냈고, 세안世安광주廣州 신회현령新會縣令을 지냈으며, 세수世修대리시승大理寺丞이고, 세영世永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이며, 세혁世弈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이다.
女四人이니 長適大理評事柳安期하고 次適右班殿直王允懿하고 次尙幼也
딸이 넷인데, 장녀는 대리평사大理評事 유안기柳安期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우반전직右班殿直 왕윤의王允懿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려서 출가하지 않았다.
陳氏 漢太丘長諱寔之後 故其望在潁川이나 而世居洪州之南昌縣이요 當唐末五代之亂 無仕者
진씨陳氏나라의 태구장太丘長 후손後孫이므로, 그분의 출생지인 영천潁川관향貫鄕으로 하였으나, 홍주洪州남창현南昌縣에서 대대代代거주居住하고 있으며, 나라 부터 오대五代까지의 난시亂時에는 벼슬한 사람이 없었다.
魏公 布衣起閭巷하야 明敏諒直稱天下하고 仍父子執國柄이러니 而至岐公尤盛하니라
위국공魏國公은 평민으로 여항閭巷에서 발신發身하여, 명민明敏함과 신의信義정직正直으로 천하天下칭송稱頌을 받았고, 그 때문에 부자父子가 연이어 재상이 되었는데, 기국공岐國公에 이르러 가세家勢가 더욱 번성하였다.
公於仕嘗齟齬 然尙至하야 以榮祿自終하니
은 벼슬할 때에 일찍이 어려움을 겪었으나, 오히려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라, 영예로운 관질官秩로 끝마쳤다.
蓋太丘之仁으로 隱阨於一時 而紀諶群泰 貴顯者數世 豈魏公之先 遭世不治하야 亦有潛德晦行 如太丘者乎
태구장太丘長께서는 어진 분이었는데도 한때 곤경을 겪었으나, 진기陳紀진심陳諶진군陳群진태陳泰 등 높은 지위에 올라 현달한 사람들이 몇 를 이었으니, 어쩌면 위국공魏國公의 선조들 중에 혼란한 시대를 만나, 역시 인덕仁德을 숨기고 선행善行을 감추기를 태구장太丘長처럼 한 분이 있었던 것인가?
不然이면 何其後世之興如此
그렇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이 어찌 이와 같이 흥기할 수 있었겠는가?
是故 不可以無銘也로다
이런 까닭으로 을 지어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銘曰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虞賓夏商하고 其後爲陳하니
임금의 후손으로 하대夏代상대商代에 존경을 받았고, 그 후에 진씨陳氏로 하였는데,
屢絶復封하야 以承聖人이라
여러 차례 봉록俸祿이 끊겼다가 다시 해져 성인聖人이신 선조先祖를 계승할 수 있었네.
至漢太丘하야 棄時就德하야
한대漢代태구장太丘長에 이르러, 당시當時에는 버려졌으나 인덕仁德을 닦아서,
詒祿魏晉하니 子孫世食이라
위대魏代진대晉代의 후손들에게 복록福祿을 남겨 자손들이 대대로 녹미祿米를 먹을 수 있었네.
旣又困窮이라가 乃生魏公하니
그 후에 다시 곤궁하게 지내다가, 위국공魏國公께서 태어나시니
魏公之出 魁名碩實이라
위국공魏國公이 출생하심에, 대명大名을 크게 떨치시어,
有公有卿하야 饋祀其室이라
후손들이 도 되고 도 되어, 사당祠堂에 모시고 제사를 받들었네.
公則盛矣하야 天子所思하고
께서는 성대盛大하게도 천자天子께서 인정해주시고,
繩繩維卿하야 亦顯於時
그 은혜가 끊이지 않고 대대로 연이어 이 되고, 또한 그 시대에 현달顯達하였네.
治官牧民하야 入出具宜하니
관부官府를 다스릴 때나 목민관牧民官이 되었을 때나, 조정朝廷에 들어왔을 때나 지방관地方官으로 나갔을 때나 모두 직무를 합당하게 처리하시니
胡公之虛 太丘之里
호국공胡國公께서 의 제사를 지냈던 곳(陳州)과, 태구장太丘長께서 사셨던 옛 마을 등,
兩有州國하야 紹榮本始
두 고을을 모두 봉토封土로 받아, 대대로 이어받아 이를 근거로 창성昌盛하기 시작하였네.
歸葬浚郊하니 皇考在前이라
준교浚郊장례葬禮를 모시니 아버님 묘소 앞이었네.
峙此銘詩하야 爲告新阡하노라
에 새겨 세워서, 새 무덤에 아뢰었네.
역주
역주1 司農卿分司南京陳公神道碑 : 本文은 嘉祐 7년(1063) 12월에 碑主 陳執方(995~1062)의 아들의 요청으로 지은 神道碑文이다.
司農卿은 京官의 祿米와 食糧의 저장을 관장하는 司農寺의 長이다. 分司는 宋代에 三京에 首都와 동일한 官府를 설치한 것으로, 이는 實職이 아닌 名譽職이었다. 南京은 宋 太祖가 後周의 宋州節度使를 역임한 일이 있으므로 宋州를 南京이라 불렀다.
역주2 魏公 : 魏國公에 封해졌던 陳恕를 지칭한다.
역주3 贈太師 : ‘贈’은 사망한 사람에게 조정에서 爵位나 榮譽의 칭호를 내려줄 때에 붙이는 것이다.
역주4 岐公 : 岐國公에 封해졌던 陳執中(991~1059)이다.
역주5 古之荒政……然尙緩刑 : 《周禮》 〈地官 大司徒〉에 흉년이 들었을 때 열두 가지 救荒政事를 시행하여 백성의 離散을 막았는데, 종자 곡식과 양식을 꾸어주는 散利, 조세를 줄여주는 薄征, 형벌을 완화해주는 緩刑, 부역을 줄여주는 弛力, 공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 舍禁, 關市에서 譏察하기만 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는 去幾, 吉禮를 간략하게 치르게 하는 眚禮, 喪禮를 간략하게 치르게 하는 殺哀, 악기를 넣어두고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蕃樂, 婚禮의 일부를 생략하고 혼인하게 해서 혼인하는 자가 많게 하는 多昏, 이미 폐하였던 제사를 찾아내어 다시 제사하는 索鬼神, 형벌을 엄하게 하여 도적을 제거하는 除盜賊 등을 말한다.
역주6 炎帝 : 神農氏를 지칭한다. 宋代에는 立夏에 炎帝에게 제사를 지냈다.
역주7 五家爲保 : 다섯 집을 한 保로 하여 범죄를 막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共同으로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이다.
역주8 : 漢字 字體의 일종으로, 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 李斯가 정리한 字體를 篆書라 한다.
역주9 : 漢字 字體의 일종으로 〈史籒篇〉에 수록된 字體이므로 籒書라 칭한다.
역주10 九卿 : 太常, 光祿, 衛尉, 宗正, 太僕, 大理, 鴻盧, 司農, 太府 등 九寺의 長을 지칭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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