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농경司農卿분사分司남경南京진공陳公이 旣以
가우嘉祐七年九月某甲子
에 葬開封府之
상부현祥符縣서한촌西韓村의 皇考
之塋
하고 至十二月
하야 진공公子
세범世範等
이 乃來求銘
하야 以作
진공公碑
라
蓋公昆弟는 皆從先人游하고 而某又嘗得識公父子라 故爲序其實而繫以銘하노라
위국공公諱某
요 자字良器
니 以
상서령尙書令兼
중서령中書令 위국공衛國公諱
숭嵩者爲曾祖
요 以贈
태사太師 상서령尙書令兼
중서령中書令 연국공燕國公諱
광사光嗣者爲祖
요 而
상서좌승尙書左丞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 諱恕之子也
라
상서좌승左丞當眞宗時
참지정사參知政事러니 後以其子
之貴
로 而贈至
태사太師 상서령尙書令兼
중서령中書令 위국공魏國公하니
기공公은 기공岐公之弟也요 而於위국공魏기공公爲少子라 年六十八로 以가우嘉祐七年六月에 得疾분사分司하야 而以乙已棄世於진주陳州하다
階至朝散大夫요 勳至上柱개국자國이요 爵至潁영천군川郡개국자開國子요 食邑至六百戶에 賜紫金魚袋하다
감주세관官終於사농경司農卿하니 而所更者는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 대리평사大理評事 광록대리시승光祿大理寺丞 태자중사太子中舍 전중승殿中丞 국자박사國子博士 尙비서성정자書虞가부部比가부部가부駕部원외랑員外郞 원외랑郞태자중사中 사농광록소경司農光祿少卿 소부감少府監이요 任終於지진주知陳州하니 而所歷者는 소부감監초주楚州형주衡州감주세관酒稅 지구주강산현知衢州江山縣 지남은주知南恩州 담주통판通判지구주강산현江양주揚홍주洪여주廬담주통판潭州 지형주知衡州 소부감監지구주강산현江寧소부감府糧料판등문고원院 지흥화군知興化지흥화군軍 지균주知均州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 지조주知曹州 판전중성判殿中省 지영주知郢州정주鄭州니
其통판通判양주揚州여주廬州는 皆有所避不赴하고 지영주知郢州則未赴而徙하다
凡仕四十三年하니 蓋其行事可記者衆矣로되 而公子所能記者는
在강주江州에 人大饑且疫이어늘 公爲具饘粥醫藥하고 不足則取여산廬山諸佛寺餘財以續之하니 所活以萬數러라
有盜刈人之禾而傷其主者
하야 當死
어늘 公曰
이어든 況今哉
아하고 卽奏貸其死
하다
홍주洪州大水에 성城之不滅者十五요 水得성城竇以入하니 擧성城惶擾不知所爲로되
州人德之하야 曰無진공陳公이런들 吾屬如何矣오하다
형주衡州之南山은 廣袤百餘里에 與夷接境하고 大木蒙密하니 中國人逋逃其中하야 冒稱夷人하고 數出寇상녕常寧諸邑이라
其酋有挾左道者하야 人傳以爲能致風雨하니 官軍尤憚之어늘
公誘以恩信한대 則率衆數百來自占이러니 已而與其甥亡去하야 又將爲寇하니 州人皆恐이어늘
天子賜詔書獎諭하니 公因圖上山川形勢攻取之策하고 以爲賊今不除면 黨附日衆이요 夷人謂중국中國無能爲라하야 必出助之하리이다
可須農隙發千人하야 使操斧斤하고 隨以强弩하야 斬木除道면 則賊失所恃하야 不攻而自窮이요 又出其材면 可以佐經用이리이다
奏未報
에 전운사轉運使害其事
하야 劾公擅擊斷
하고 不聽用佐吏
하며 又嘗稱病不自祭
하야 公坐此罷
하니
흥화興化多進士하야 就鄕擧者常八九百人이어늘 而學舍弊小하고 無文籍이러니 公至하야 則新而大之하고 爲之購書하야 而國子之所有者皆具하다
지균주均州한수漢上에 舟子數溺商旅하고 取貨財호되 而以險爲解어늘
公捕案寘法하고 因取近灘數家하야 除其徭하고 使表水險하니 涉者因此得不死하다
지조주曹州多盜
하야 亡命之尤凶强者七十餘人
이어늘 公集重購
하야 得之幾盡
하고 又修律令
하야 之法
이라 故盜往往逃去之他境
하니
公嘗爲書十二篇上之하고 曰국정요사國政要事라하니 其說多聽用하고
而中書欲遷職事 以獎之어늘 公乃自言호되 外祖왕씨王氏葬양주揚州無主後하니 願除회남淮南所當得之一官하야 以往視其丘墓而已라하니라
기국공岐기국공公之葬也에 天子自지조주曹州召기국공公歸襄事하고 特詔許기국공公升殿한대
기국공公謝
기국공岐기국공公遭遇始終恩禮之厚
하고 因乞御
기국공岐기국공公之碑首
하니 上爲動容
하야 賜其首曰 襃忠之碑
라하야늘 而
기국공公終無一言自及
하다
旣분사分司에 無田園하야 僦官屋以居하고 自爲棺斂葬埋之制하니 趣於儉而已러라
夫人풍씨馮氏는 江남당南이씨李氏時 재상宰相풍연사延巳之孫이라
子男五人이니 세범世範은 前상주商州낙남현위洛南縣尉요 세안世安은 前광주廣州신회현령新會縣令이요 세수世修는 대리시승大理寺丞이요 세영世永은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요 세범世奕은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이라
女四人이니 長適대리평사大理評事유안기柳安期하고 次適우반전직右班殿直왕윤의王允懿하고 次尙幼也라
진씨陳氏는 한漢태구장太丘長諱식寔之後라 故其望在영천潁川이나 而世居홍주洪州之남창현南昌縣이요 當당唐末五代之亂에 無仕者라
위국공魏위국공公이 布衣起閭巷하야 明敏諒直稱天下하고 仍父子執위국공國柄이러니 而至기국공岐위국공公尤盛하니라
蓋태구장太丘之仁으로 隱阨於一時나 而진기紀진심諶진군群진태泰 貴顯者數世니 豈위국공魏위국공公之先에 遭世不治하야 亦有潛德晦行을 如태구장太丘者乎아
02. 사농경 분사 남경을 지낸 진공의 신도비
문장의 법도가 마치 군대의 항오行伍처럼 정연整然하다.
사농경司農卿 분사分司 남경南京 진공陳公은 이미 가우嘉祐 7년 9월 모일某日에 개봉부開封府 상부현祥符縣 서한촌西韓村의 선친先親 위국공魏國公 묘墓가 있는 선산先山에 장례를 모시고, 12월에 공公의 아드님 세범世範 등이 찾아와서 공公의 비碑를 세울 수 있도록 명문銘文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공公의 형제兄弟들은 모두 나의 선친先親과 교유交遊가 있었고, 나도 일찍이 공公의 부자父子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그 실제 행적行績을 서술하고 명문銘文을 붙인다.
공公의 휘諱는 아무개(執方)이고, 자字는 양기良器이니, 태사太師에 증직贈職되고 상서령尙書令 겸 중서령中書令으로 위국공衛國公이었던 휘諱 숭嵩이 증조부曾祖父이고, 태사太師에 증직되고 상서령尙書令 겸 중서령中書令으로 연국공燕國公이었던 휘諱 광사光嗣가 조부祖父이며, 상서좌승尙書左丞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였던 휘諱 서恕의 아드님이다.
상서좌승尙書左丞께서는 진종眞宗 때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셨는데, 후後에 아드님인 기공岐公이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 인해 증직贈職되어 태사太師에 상서령尙書令 겸 중서령中書令 위국공魏國公에 이르렀다.
공公은 기공岐公의 아우이시고, 위국공魏國公의 막내 아드님이시며, 68세였던 가우嘉祐 7년 6월에 분사分司로 계시면서 병을 얻어 을사일乙巳日(30일)에 진주陳州에서 서거逝去하셨다.
품계品階는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이르렀고, 훈급勳級은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으며, 작위爵位는 영천군穎川郡 개국자開國子에 이르렀고, 식읍食邑이 600호戶였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벼슬은 사농경司農卿으로 마치셨으니, 역임하셨던 관직들은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 대리평사大理評事, 광록대리시승光祿大理寺丞, 태자중사太子中舍, 전중승殿中丞, 국자박사國子博士, 상서우부尙書虞部 비부比部 가부駕部 원외랑員外郞, 낭중郎中, 사농광록소경司農光祿少卿, 소부감少府監 등이었고 직임은 지진주知陳州로 마치셨으니, 역임歷任하셨던 직책들은 초주楚州와 형주衡州의 감주세관監酒稅官, 지구주강산현知衢州江山縣, 지남은주知南恩州, 강주江州‧양주揚州‧홍주洪州‧여주廬州‧담주통판潭州通判, 지형주知衡州, 감강녕부양료원監江寧府糧料院, 지흥화군知興和軍, 지균주知均州,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 지조주知曹州, 판전중성判殿中省, 지영주知郢州 및 정주鄭州 등이었다.
양주揚州와 여주廬州의 통판通判은 혐의嫌疑를 피해야 할 일이 있어서 부임赴任하지 않았고, 지영주知郢州는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벼슬이 바뀌었다.
총 43년간 관직官職에 계셨으니, 그동안 행하신 일 가운데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공公의 아드님이 기억할 수 있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강주江州의 통판通判으로 계실 때에 인민들이 큰 기근饑饉과 역병疫病을 겪게 되자, 공公이 죽과 의약품을 갖추어서 구휼과 치료를 행하였고 경비가 부족不足하면, 여산廬山의 여러 불사佛寺에 남아 있는 재물을 취하여 계속 비용을 대니, 살려준 사람이 수만數萬에 이르렀다.
어떤 도둑이 남의 벼를 베어가고 그 주인에게 상해傷害를 가하여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는데, 공께서 “옛날에 굶주림을 구제하는 정사에는 사람들을 구휼함이 극진하였으면서도 오히려 형벌을 완화해주었는데, 더구나 지금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고, 사죄死罪를 사면赦免하여 속대贖貸할 수 있게 해주기를 건의하였다.
홍주洪州에 큰 홍수가 나서 성城안에 잠기지 않은 곳이 열에 다섯 정도였고, 물이 성城에 난 구멍을 통하여 들어오자 온 성城안 사람들이 당황하여 동요하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공公은 이런 일에 대비하여 미리 섶과 마른 풀을 준비해놓았다가, 이것으로 하루도 못 되어 이를 틀어막으니,
고을 사람들이 이를 은덕恩德으로 여기며 “진공陳公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형주衡州에 있는 남산南山은 가로와 세로가 100여餘 이里에 이르고 오랑캐의 거주지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졌는데, 중원中原 사람들이 그 속으로 도망가 숨어서 함부로 오랑캐라고 자칭하면서, 상녕常寧의 여러 고을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도둑질을 하였다.
그 우두머리는 사교邪敎를 믿어서 사람들에게 그가 풍우風雨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하니, 관군官軍이 더욱 두려워하고 꺼리게 되었다.
공公이 은혜와 신의로 그들을 유인하자, 무리 수백 명을 이끌고 와서 스스로 귀순하였는데, 그 후 다시 그의 생질과 함께 도망가서 또 도둑질을 하려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공公이 계책을 세워서 하루 만에 잡아서 죽였다.
황제께서 포장襃獎하는 말씀의 조서를 내리시니, 공公이 이어 산천山川의 형세와 공격해 빼앗을 계책을 지도地圖에 그려 올리면서 “지금 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패거리들이 날로 늘어날 것이고, 오랑캐들은 중국中國이 무능하다고 여겨서 반드시 이들을 도우러 나올 것입니다.
모름지기 농한기農閑期에 천여千餘 인人을 동원하여 도끼와 자귀를 가지고 가고 강노수强弩手를 뒤따르게 해서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닦으면, 도둑들은 의지할 곳을 잃어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곤궁해질 것이고, 또한 그 목재를 반출하면 이로써 일상의 용도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려 하였다.
그런데 미처 상주上奏도 하기 전에 전운사轉運使가 그 일을 방해하여, 공公이 그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보좌하는 관리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또 과거에 병病을 핑계대고 염제炎帝(神農氏)의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은 일이 있다고 탄핵彈劾하여, 공公이 이 일에 연좌되어 파직罷職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公의 유임留任을 애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공公의 예측대로 도둑들이 과연 침탈을 일삼아서 제어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초무사招撫使를 보내고 군사軍士를 동원하여 수년數年 동안 그들을 친 이후에야 평정할 수 있었다.
흥화興化 고을은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인재人才가 많아서, 향시鄕試를 보게 되면 응시자가 늘 8, 9백 명이나 되었지만, 학사學舍가 허물어지고 비좁으며 소장所藏한 서적書籍도 없었는데, 공公이 지흥화군知興化軍으로 부임하여 이를 신축 확장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서적을 구입하여 국자감國子監에 소장하고 있는 서적들을 모두 갖추어놓았다.
지균주知均州가 되어 한수漢水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에, 뱃사공들이 장사꾼들을 물에 빠트리고 그들의 재물을 약취掠取하고는, 물길이 험해서 저절로 빠져 죽은 것이라고 핑계를 대고 벌을 모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공公이 체포 조사하여 법대로 조치하고, 이어 험한 여울 가까이 사는 민가民家 몇 집을 취取하여 그들의 요역徭役을 면제해주고, 그들에게 물이 험한 곳을 표시하게 하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그 덕에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지조주知曹州가 되었을 때에는 조주曹州에 도둑이 많아서, 살던 곳에서 도망쳐 와서 더욱 흉악하고 강포한 짓을 하는 자가 70여 명에 이르렀는데, 공公이 중重한 상금賞金을 내걸고 체포할 사람을 모집하여, 이들을 거의 다 잡아 없앨 수 있었고, 또 다섯 집을 한 보保로 하여 연대책임連帶責任을 지는 법을 시행하니, 그 때문에 도둑들이 그 지역에서는 발을 붙일 수가 없어서, 왕왕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기도 하였다.
대체로 공公이 다스릴 때에 시행한 것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공公이 전前에 12편篇의 글을 지어 올리고 제목題目을 〈국정요사國政要事〉라 하였는데, 그 주장 가운데 나라에서 받아들여 시행한 것이 많았다.
이에 중서성中書省의 재상宰相이 담당 사무를 옮겨주어 권면勸勉하려 하니, 공公이 스스로 말하기를 “외조부外祖父 왕씨王氏의 장례葬禮를 양주揚州에 모셨는데, 이를 관리할 후손이 없으니, 회남淮南 땅의 한 관직에 제수되어 그 묘소를 살필 수 있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다.
공公의 형님 기국공岐國公의 장례를 치를 때에, 천자天子께서 지조주知曹州로 있던 공公을 불러들여 돌아와서 장례를 주관하도록 하셨고, 특별히 조서詔書를 내려서 공公이 궁전의 섬돌에 올라와 보고하도록 허락하셨다.
공公은 기국공岐國公이 처음부터 끝까지 황상皇上의 은혜恩惠와 예우禮遇를 후하게 입은 것에 감사를 드리고, 이어서 황상께서 직접 쓰신 전서篆書로 기국공岐國公의 비수碑首를 장식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하니, 황상께서 용의容儀를 바로 하시고 그 비碑 머리에 ‘포충지비襃忠之碑’라 써주셨는데, 공公은 이 일이 자신의 청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끝내 단 한 번도 발설한 일이 없었다.
남경南京의 분사分司가 되신 이후 전지田地와 가옥家屋이 없어서 관사官舍를 빌려 거주하셨고, 자신의 관棺과 염습殮襲과 매장埋葬의 절차를 스스로 정해놓으셨으니, 검소하게 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어려서부터 노경老境에 이르도록 항시 글씨 쓰기를 즐기셨고, 전서篆書와 주서籒書를 특별히 잘 쓰셨다.
문집文集 20권卷이 있는데, 그 글은 공의 학설을 대대로 전할 만한 것들이다.
부인夫人은 풍씨馮氏로 이씨李氏가 다스리던 남당南唐 때의 재상宰相이었던 풍연사馮延巳의 후손이다.
아들이 다섯인데, 세범世範은 전前에 상주商州 낙남현위洛南縣尉를 지냈고, 세안世安은 전前에 광주廣州 신회현령新會縣令을 지냈으며, 세수世修는 대리시승大理寺丞이고, 세영世永은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이며, 세혁世弈은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이다.
딸이 넷인데, 장녀는 대리평사大理評事 유안기柳安期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우반전직右班殿直 왕윤의王允懿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려서 출가하지 않았다.
진씨陳氏는 한漢나라의 태구장太丘長 휘諱 식寔의 후손後孫이므로, 그분의 출생지인 영천潁川을 관향貫鄕으로 하였으나, 홍주洪州의 남창현南昌縣에서 대대代代로 거주居住하고 있으며, 당唐나라 말末부터 오대五代까지의 난시亂時에는 벼슬한 사람이 없었다.
위국공魏國公은 평민으로 여항閭巷에서 발신發身하여, 명민明敏함과 신의信義와 정직正直으로 천하天下의 칭송稱頌을 받았고, 그 때문에 부자父子가 연이어 재상이 되었는데, 기국공岐國公에 이르러 가세家勢가 더욱 번성하였다.
공公은 벼슬할 때에 일찍이 어려움을 겪었으나, 오히려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라, 영예로운 관질官秩로 끝마쳤다.
태구장太丘長께서는 어진 분이었는데도 한때 곤경을 겪었으나, 진기陳紀‧진심陳諶‧진군陳群‧진태陳泰 등 높은 지위에 올라 현달한 사람들이 몇 대代를 이었으니, 어쩌면 위국공魏國公의 선조들 중에 혼란한 시대를 만나, 역시 인덕仁德을 숨기고 선행善行을 감추기를 태구장太丘長처럼 한 분이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이 어찌 이와 같이 흥기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명銘을 지어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순舜임금의 후손으로 하대夏代와 상대商代에 존경을 받았고, 그 후에 성姓을 진씨陳氏로 하였는데,
여러 차례 봉록俸祿이 끊겼다가 다시 봉封해져 성인聖人이신 선조先祖를 계승할 수 있었네.
한대漢代에 태구장太丘長에 이르러, 당시當時에는 버려졌으나 인덕仁德을 닦아서,
위대魏代와 진대晉代의 후손들에게 복록福祿을 남겨 자손들이 대대로 녹미祿米를 먹을 수 있었네.
그 후에 다시 곤궁하게 지내다가, 위국공魏國公께서 태어나시니
위국공魏國公이 출생하심에, 대명大名을 크게 떨치시어,
후손들이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사당祠堂에 모시고 제사를 받들었네.
공公께서는 성대盛大하게도 천자天子께서 인정해주시고,
그 은혜가 끊이지 않고 대대로 연이어 경卿이 되고, 또한 그 시대에 현달顯達하였네.
관부官府를 다스릴 때나 목민관牧民官이 되었을 때나, 조정朝廷에 들어왔을 때나 지방관地方官으로 나갔을 때나 모두 직무를 합당하게 처리하시니
호국공胡國公께서 순舜의 제사를 지냈던 곳(陳州)과, 태구장太丘長께서 사셨던 옛 마을 등,
두 고을을 모두 봉토封土로 받아, 대대로 이어받아 이를 근거로 창성昌盛하기 시작하였네.
준교浚郊에 장례葬禮를 모시니 아버님 묘소 앞이었네.
이 명銘을 비碑에 새겨 세워서, 새 무덤에 아뢰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