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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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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태자태부를 지낸 전공의 묘지명
此等誌 韓歐所不及이라
이런 묘지명墓誌銘한유韓愈구양수歐陽脩가 미칠 수 없는 경지이다.
田氏 故京兆人이니 後遷信都러니
전씨田氏는 과거에 경조京兆(서울) 사람이었는데, 신도信都로 옮겼다.
公皇祖太傅入于契丹하다
후진後晉이 일어났을 때에, 태부太傅로 계시던 조부祖父께서 거란契丹으로 들어갔다.
하야 略得數百人하야 以屬皇考太師하니 太師哀憐之하야 悉縱去하고 因自脫歸中國하다
경덕景德 거란契丹전주澶州침로侵虜하여 수백數百 을 사로잡아서, 당시當時거란契丹 태사太師로 계시던 선친先親에게 처분을 맡기니, 태사太師께서 이들을 가련하게 여겨서 모두 풀어주어 돌아가게 하였고, 그 일 때문에 자신도 거란契丹에서 탈출하여 중국中國으로 돌아왔다.
天子以爲廷臣하야 積官至以終하니 爲人 沈悍篤實하야 不苟爲笑語러라
천자天子께서는 그를 정신廷臣으로 삼아서 벼슬이 계속 올라 태자솔부솔太子率府率에 이르러 하였는데, 사람됨이 침착沈着 용맹勇猛하고 독실篤實하면서도, 우스개 이야기도 거리낌없이 하였다.
生八男子하니 多知名이요 而公爲長子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이름이 알려진 이가 많았고, 이 그 가운데 장남長男이다.
公少卓犖有大志하고 好讀書하야 書未嘗去手하야 無所不讀하고 蓋亦無所不記러라
은 어렸을 때에 비범非凡하게 뛰어났으며, 큰 뜻을 품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책이 손에서 떠난 일이 없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대체로 읽은 것은 또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其爲文章 得紙筆立成하고 而閎博辨麗 稱天下하니라
문장文章을 짓게 되면 지필紙筆을 마련하자마자 즉시 완성하였으며, 글이 웅장雄壯 해박該博하고 분명하면서도 아름다워서 천하의 칭찬을 받았다.
하다 後數年 遂中甲科하야 補江寧府觀察推官이라가 以母英國太夫人喪으로 罷去하다
처음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학구과學究科동학구同學究 출신으로 벼슬에 나가게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가, 수년 후에 드디어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강녕부江寧府 관찰추관觀察推官보임補任되었는데, 어머니인 영국부인英國夫人을 당하여 그만두고 물러났다.
除喪하고 補楚州團練判官이러니 用擧者監轉般倉하고 遷秘書省著作佐郞하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초주단련판관楚州團練判官임명任命되었고, 전반창轉般倉의 감독을 맡도록 천거薦擧한 사람이 있어서 이를 감독하게 되었으며, 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으로 옮겼다.
하야 遷太常丞이라가 通判江寧府하야 數上書言事하니 召還하야 將以爲諫官이러라
그 후 또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대책對策에 1으로 합격하여 태상승太常丞으로 옮겼다가 강녕부江寧府통판通判이 되었는데, 여러 차례 상서上書하여 사안事案에 대하여 간언諫言을 하자, 중앙으로 불러들여서 장차 간관諫官으로 삼으려 하였다.
方是時하야 趙元昊反하니 經略陝西하야
그때 마침 조원호趙元昊반란反亂이 일어나서 하영공夏英公(夏竦)과 범문정공范文正公(范仲淹)이 섬서陝西경략經略이 되었는데,
言臣等才力薄하야 使事恐不能獨辦하니 請得田某自佐하노이다하니
상언上言하기를 “ 등의 재능과 능력이 부족하여 일 처리에 독자적인 판단을 제대로 못할까 두려우니 아무개가 저희들을 보좌하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므로,
以公爲其判官하야 直集賢院 參都總管軍事하다
으로 그 판관判官을 담당하게 하여 직집현원直集賢院 참도총관군사參都摠管軍事가 되었다.
自眞宗弭兵으로 至是且四十年이라 諸老將盡死하고 爲吏者不知兵法하야 師數陷敗하니 士民震恐이어늘 二公隨事鎭撫하야 其爲世所善하니 多公計策이러라
진종眞宗 때에 전쟁을 그치고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40년 사이에 전쟁경험이 있던 노장老將들은 모두 죽고, 관리官吏가 된 자들은 병법兵法을 알지 못하여 군사軍士들이 여러 차례 패전敗戰하니 사민士民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두 께서 사안事案에 적합하게 진무鎭撫하여 세상에서 잘 처리한다는 칭예稱譽를 듣게 되었으니,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 낸 계책計策대로 한 것이었다.
大將有欲悉數路兵하야 出擊賊者한대 朝廷許之矣어늘 公極言其不可하야 乃止하다
그때 대장大將 가운데 몇 군사軍士들을 총동원하여 나아가 을 치고자 한 사람이 있자 조정朝廷에서 이를 허락하였으나, 이 그 불가不可함을 극언極言하여 드디어 중지하게 하였다.
又言所以治邊者十四事하니 多聽用하다
변방邊方을 다스릴 기본이 되는 14조항條項을 아뢰자, 받아들여 정책에 활용한 것이 많았다.
還爲右正言하고 判三司理欠 憑由司라가 權修起居注하고 遂知制誥 判國子監하다
중앙中央으로 불러들여서 우정언右正言을 제수하고 판삼사리흠判三司理欠 빙유사憑由司를 삼았다가 권수기거주權修起居注에 임명되었고, 다시 지제고知制誥 판국자감判國子監이 되었다.
於是 陝西用兵未已하야 人大困하니 以公副今宰相 하다
이때에 섬서陝西의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백성들이 크게 곤경을 겪게 되니, 으로 당시의 재상宰相추밀부사樞密副使 한공韓公(韓琦)의 선무宣撫를 보좌하는 선무부사宣撫副使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自宣撫歸하야 이러니 而河北告兵食闕이어늘 又以公往視하다
선무부사宣撫副使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판삼반원判三班院이 되었는데, 하북河北에서 군량軍糧이 모자란다고 보고하니, 다시 에게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而邢(保)州兵士殺通判하고 閉城爲亂이어늘 又以公爲龍圖閣直學士 知成德軍眞定府 定州安撫使하야 往執殺之하니
그 후 보주保州의 병사들이 통판을 살해하고 성문城門을 닫고 을 일으키니, 다시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지성덕군진정부知成德軍眞定府 정주안무사定州按撫使가 되어, 임지任地에 부임하여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論功하야 遷起居舍人이라가 又移秦鳳路都總管 經略安撫使 知秦州하다
으로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옮겼다가 다시 진봉로도총관秦鳳路都摠管 경략안무사經略按撫使 지진주知秦州로 옮겼다.
遭太師喪하야 辭起復者久之러니 上使中貴人으로 手勅하니
부친인 태사공太師公을 당하여 사임辭任하자, 상기喪期를 다 마치기 전에 벼슬에 복귀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오래도록 사양하니, 황상皇上께서 궁중宮中귀인貴人을 파견하여 손수 조칙詔勅을 전하면서 빨리 복귀하도록 에게 재촉하셨다.
公不得已하야 則乞歸葬然後起하다 旣葬 託邊事求見上하야
이에 은 어쩔 수 없이 장례를 모신 이후에 출사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하고, 장례를 마치자 변방邊方의 일을 이유로 하여 황상을 알현하기를 청하면서
曰陛下以孝治天下하시고 方邊鄙無事하며 朝廷不爲無人이어늘
“폐하께서 를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하여 천하를 다스리고 계시고, 지금 변방에 전란이 없으며, 조정에 사람이 없지도 않은데,
而區區犬馬之心 尙不得自從하시니 臣卽死知不瞑矣로소이다 因泫然泣數行下하니
이 하찮은 충심忠心을 가진 에게 오히려 상기喪期를 마칠 수도 없게 하시니, 은 곧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나이다.” 하면서 줄줄 눈물을 흘렸다.
上視其貌甚瘠하고 又聞其言悲之하야 乃聽終喪하니
황상께서 그 모습이 매우 수척해졌음을 보시고 또 그가 하는 말을 들으시자 비감해하시면서 드디어 상기喪期를 마칠 때까지 벼슬에서 물러나 있겠다는 뜻을 들어주셨다.
蓋帥臣得終喪 自公始러라
장수將帥인 신하가 상기喪期를 마칠 때까지 물러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以樞密直學士 爲涇原路兵馬都總管 經略安撫使 知渭州하고 遂自尙書禮部郞中으로 遷右諫議大夫 知成都府하야 充蜀梓利夔路兵馬鈐轄하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로서 경원로병마도총관涇原路兵馬都摠管 경략안무사經略按撫使 지위주知渭州에 임명되었고 마침내 상서예부낭중尙書禮部郎中에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지성도부知成都府로 나가서, 기로夔路병마검할兵馬鈐割직임職任을 담당하게 되었다.
西南夷侵邊이어늘 公嚴兵憚之하고 而誘以恩信하니 卽皆稽顙하다
서남방西南方의 오랑캐들이 변방을 침노하니, 이 군사들을 엄하게 단속하고 그들을 은애恩愛신의信義진무鎭撫하자, 오랑캐들 모두가 이마를 조아리며 복속하였다.
으로 遂號爲易動이어늘 往者得便宜決事하야 而多擅殺以爲威하야 至雖小罪라도 猶幷妻子遷出之蜀하니 流離顚頓하야 有以故死者
땅에서 왕균王均이순李順이 거듭 을 일으키면서 드디어 세상을 바꾸게 되었다고 외쳤는데, 이를 진압하러 간 장수들이 전권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면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위엄을 드러내려는 사람이 많아서, 가벼운 죄를 범했을 뿐인데도 오히려 처자들까지 모두 땅에서 내쫓는 일이 일어나, 가족들이 헤어져서 골짜기에 굴러 엎어져서 이 때문에 죽는 사람들도 있게 되었다.
公拊循敎誨하고 兒女子畜其人하며 至有甚惡이라야 然後繩以法하니 蜀人愛公하고 以繼하야 而謂公所斷治 爲未嘗有誤라하다
이에 은 이들을 위무慰撫하고 가르쳐 타이르며 그 사람들을 어린 자식처럼 보살펴주고, 심한 악행을 자행한 일이 있은 연후에야 법에 맞게 다스리니, 땅 사람들이 을 사랑하게 되었고, 장충정張忠定(張詠)이 이런 정책을 계승하고 말하기를 “이 판단하고 다스린 일에 일찍이 오류를 범한 일이 없었다.” 하였다.
歲大凶 寬賦減徭하고 發廩以救之하야 而無餓者하니 事聞 賜書獎諭하다 遷給事中이라가 以守御史中丞 充理檢使召焉이러니 未至 以爲樞密直學士 權三司使하고 旣而又以爲龍圖閣學士 翰林學士라가 又遷尙書禮部侍郞하야 正其使號하다
큰 흉년이 들자 부세賦稅의 징수를 늦춰주고 요역徭役을 줄여주며 곡식창고를 열어서 구제해주어 아사餓死한 사람이 없게 되었는데,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황상께서 장려하는 유시諭示의 글을 내리시고, 급사중給事中으로 옮겨서 수어사중승守御史中丞으로 이검사理檢使에 충원하고자 소환하였다가, 도착도 하기 전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권삼사사權三司使에 임명하였고, 그 후에 또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으로 옮기고 정식正式으로 삼사사三司使명호名號를 수여하였다.
至公始復鉤考財賦하야 盡知其出入하니
경덕景德 연간年間부터 재물의 관리와 출납에 관한 일을 삼사三司에서 맡았지만, 삼사사三司使가 됨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재물에 대한 부세賦稅를 살펴서 그 출납을 모두 주관하게 되었다.
於是 入多景德矣로되 歲所出 乃或多於入이라 公以謂 厚斂疾費如此 不可以持久
이렇게 되자 세입이 경덕景德 연간年間보다 더 많아졌으나, 1년간의 세출이 세입보다 많은 경우도 있게 되니, 은 ‘많이 거두고도 이처럼 세입보다도 더욱 많이 지출하게 되면, 이를 오래 지탱할 수가 없다.
然欲有所掃除變更하고 興起法度하야 使百姓得完其蓄積하고 而縣官亦以有餘 在上與執政所爲 而主計者 不能獨任也
그러나 옛 제도를 개혁하여 변경하고 새로운 법도法度를 세우며, 백성들로 하여금 재화財貨의 축적을 온전하게 하고 조정 또한 풍부하게 하고자 하는 일은, 황상皇上집정執政이 할 일이지 회계를 주관하는 사람이 독단적으로 맡아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였다.
故爲皇祐會計錄上之하야 論其故하야 冀以寤上하다
그 때문에 〈황우회계록皇祐會計錄〉을 지어 바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이 문제를 위에서도 깨닫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上固恃公하야 欲以爲大臣이러니 居頃之 遂以爲樞密副使라가 又以檢校太傅充樞密使하다
황상皇上께서는 본시 을 신뢰하여 대신大臣으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얼마 있다가 드디어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삼았다가, 다시 검교태부檢校太傅 추밀사樞密使의 직임을 담당하게 하였다.
公自常選으로 數年遂任事於時하고 及在樞密爲之使하야 又超其正하니 天下皆以爲宜로되 顧尙有恨公得之晩者러라
이 정기적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일을 맡고부터 당시에 수년간 그 일을 독담하여 처리하였고, 추밀樞密에서 최고위직最高位職使에 오른 것은 또한 정상적正常的인 승진절차를 뛰어넘은 것이었으나,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도리어 이 그 지위를 얻은 것이 너무 늦었다고 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었다.
公行內修하야 於諸弟尤篤하고 爲人寬厚長者 與人語 款款若恐不得當其意로되
은 자신의 행실을 닦아 여러 형제들을 더욱 후하게 대하였고, 사람됨이 관인寬仁 후덕厚德한 훌륭한 분이었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며 마치 그 뜻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였다.
至其有所守하야는 人亦不能移也러라
그가 신념을 가지고 지키는 것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自江寧歸 宰相私使人招之호되 公謝不往하다
강녕통판江寧通判으로 있다가 돌아왔을 때에 재상宰相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초대하였으나 은 이를 사절하고 가지 않았다.
及爲諫官하야 於小事近功 有所不言하고 獨常從容爲上言爲治大方而已러라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작은 일로 을 세울 만한 것은 말한 일이 없고, 홀로 언제나 황상皇上천하天下를 다스릴 원대遠大방략方略에 대하여 조용히 말씀드릴 뿐이었다.
范文正公等 皆士大夫所望以爲公卿호되 而其位未副러니 公得間하야 輒爲上言之 故文正公等 未幾 皆見用하다
범문정공范文正公(范仲淹)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공경公卿이 되기를 바라는 바였지만 이에 부합되는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현謁見할 기회를 얻자 즉시 황상皇上께 이를 건의하였고, 그 때문에 문정공文正公 등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임용되었다.
當是時하야以天下事責大臣하야 慨然欲有所爲하니 蓋其志多自公發이러라
이때를 당하여 황상皇上께서 자주 천하사天下事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완비를 요구하면서 개연慨然히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었는데, 황상皇上의 이런 뜻이 의 건의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公所設施 事趣可하야 功期成이면 因能任善하야 不必己出하고 不爲獨行異言하야 以峙聲名이라
이 베풀어 시행한 일 가운데, 일이 빨리 실현되어서 공적功績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은, 이를 잘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굳이 스스로 나서지 않았으며, 홀로 이를 행하거나 별도로 건의를 해서 성명聲名을 드날리려는 일은 하지 않았다.
故功利之在人者多로되 而事迹可記者 止於如此니라
그러므로 사람에게 공덕功德이익利益이 있게 한 것이 많았으나 그분의 사적事跡으로 기록할 만한 것은 이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嘉祐三年十一月 暴得疾하야 不能興하니 上聞悼駭하사 勅中貴人하야 太醫問視하고 疾加損 輒以聞하시다
가우嘉祐 3년(1058) 11월에 갑자기 병을 얻어서 일어날 수가 없게 되니, 황상皇上께서 들으시고 크게 놀라 슬퍼하시며 고위高位 환관宦官에게 명하여 태의太醫가 치료를 맡게 하고, 병이 더하거나 차도가 있을 때에는 즉시 이를 보고하게 하셨다.
公卽辭謝하고 求去位하야 奏至十四五호되 猶不許어늘 而公求之不已하니 乃以爲尙書右丞 觀文殿學士 翰林侍讀學士 提擧景靈宮事하다 而公求去位終不已 於是 遂以太子少傅致仕하다
은 즉시 이에 감사를 드리고 사양하면서 벼슬에서 떠남을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상주上奏를 열네댓 차례나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런데도 이 청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이에 상서우승尙書右丞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제거경령궁사提擧景靈宮事에 임명하였으나, 이 벼슬에서 떠나기를 청하는 상주上奏를 끝내 중단하지 않자, 이에 드디어 태자소부太子少傅로 벼슬에서 물러남을 허락받게 된 것이다.
致仕凡五年 疾遂篤하야 以八年二月乙酉 薨于第하니 享年五十九
치사致仕한 지 5년이 되어 병이 더욱 위독해져서 가우嘉祐 8년 2월 을유일乙酉日사저私邸에서 하니 향년享年이 59세였다.
號推誠保德功臣하고 階特進하며 勳上柱國하고 爵開國京兆郡公하야 食邑三千五百戶 實封八百戶하고 詔贈公太子太保하야 而賻賜之甚厚하다
추성보덕공신推誠保德功臣를 내리고 품계品階특진特進, 상주국上柱國, 개국경조군공開國京兆郡公으로 하고, 식읍食邑 3,500실봉實封 800를 내리고, 조서詔書를 내려서 태자태보太子太保증직贈職하고, 상사喪事에 쓸 재물을 매우 넉넉하게 내리셨다.
公諱況이요 字元均이라
이고 원균元均이다.
皇曾祖諱祐 贈太保하고 皇祖諱行周 贈太傅하고 皇考諱延昭 贈太師하다
증조고曾祖考이고 태보太保증직贈職되었고, 조고祖考행주行周이고 태부太傅증직贈職되었으며, 부친父親연소延昭이고 태사太史증직贈職되었다.
妻富氏 封永嘉郡夫人하니之女弟也
부인夫人부씨富氏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해졌고, 현재 재상宰相으로 계신 하남공河南公(富弼)의 매씨妹氏이다.
無男子하야 以弟之子至安爲主後하고 女子一人 尙幼
아들이 없어서 아우의 아들인 지안至安을 후계자로 삼았으며, 딸이 하나 있으나 아직 어리다.
田氏 自太師始占其家開封하야 而葬陽翟이라 故今以公從太師하야 葬陽翟之三封鄕西吳里하다
전씨田氏태사太史 때에 처음으로 그 집안이 개봉開封에 정착하고 양적陽翟를 썼으므로, 이제 태사太史를 따라서 양적陽翟삼봉향三封鄕 서오리西吳里안장安葬하였다.
於是 公弟右贊善大夫洵來하야 曰卜葬公利四月甲午하니 請所以誌其壙者하노라
이에 의 아우님인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 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을 쳐서 하고 로운 4월 갑오일甲午日을 안장하였으니, 그분의 분묘墳墓에 세울 묘지명墓志銘을 지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蓋公自佐江寧으로 以至守蜀 在所輒興學하고 數親臨之하야 以進諸生하다
대체로 강녕江寧보좌관輔佐官으로 계실 때부터 땅의 태수太守가 됨에 이르기까지 머물렀던 곳마다 즉시 학교를 세우고 친히 자주 방문하여 제생諸生들을 독려하였다.
某少也 與公弟游하고 而公所進 以爲可敎者也일새 知公爲審이라
나는 젊었을 때에 의 아우님과 친교를 맺었고, 이 추천한 사람은 가르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이다.
銘曰
은 다음과 같다.
田室於姜하야 卒如龜祥이라
전씨田氏 집안은 나라에서 끝까지 장구長久하게 존귀한 복록을 누렸다가,
後其孫子 曠不世史러니
그 후 후손들이 오랫동안 기록된 이가 없었는데,
於宋繼顯하니 自公攸始로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연이어 현달顯達해졌으니, 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네.
奮其華蕤하야 配實之美하고
그 꽃다운 능력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도록 보좌하였고,
乃發帝業하야 深宏卓煒
제업帝業을 발전시켜, 깊고 웅장하고 우뚝하게 빛이 났네.
乃興佐時하야 宰飪調胹
이에 등용되어 황상皇上을 보좌하며, 재상宰相으로 천하의 정사政事를 주재하였네.
文馴武克하야 內外隨施
문치文治로 교화하고 무위武威로 제압하여, 내외內外가 복종하여 따르게 되었네.
亦有厚仕하니 孰無衆毁
또한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어찌 뭇사람들의 모함이 없었으리오마는
公獨使彼하야 若榮豫己
만이 저들을 잘 부려서, 자신에게 영예를 더해줄 사람인 것같이 대하였네.
維昔皇考 敢於活人하니
옛적 황고皇考께서는 사람들 살려주는 일에 과감하였고,
傳祉在公이나 不集其身이라
에게 전해졌으나 자신이 다 누리려 하지 않았네.
公又多譽하니 公宜難老어늘
은 또 칭예가 많았으니, 은 의당 장수長壽를 누리셔야 마땅한데,
胡此殆疾 不終壽考
어찌 이다지도 위태한 병이 들어 장수長壽하지 못하게 하였는가.
掩詩於幽하야 爲告永久하노라
유택幽宅에 묻으면서, 영구히 평안平安하시기를 하노라.
역주
역주1 太子太傅田公墓誌銘 : 本 墓誌銘은 墓主의 死亡日인 嘉祐 8년(1065) 2월 乙酉日(13일)부터 장례를 치른 同年 4월 甲午日(23일) 사이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 晉은 五代의 最後國인 後晉(936~946)을 지칭한다.
역주3 景德初 契丹寇澶州 : 景德 元年(1004) 11월에 契丹이 宋을 침입하여 澶州를 포위하자 宋 眞宗이 이를 방어하고자 친히 출병하였고, 12월에 양국이 화의하여 ‘澶淵之盟’을 맺은 것을 지칭한다.
역주4 太子率府率 : 太子宮의 武官職으로 구체적으로 담당한 직무는 없는 명예직이다.
역주5 初擧進士……不就 : 宋代 科擧의 일종인 學究科는 進士科보다 格이 떨어지는 것이었고, 同學究 出身은 學究科 합격자 중에서도 성적이 下位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進士試에 응시하였다가 同學究 出身을 下賜받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주6 又對賢良方正策爲第一 : 賢良方正은 唐‧宋代에 才識이 뛰어난 사람에게 皇帝의 勅命으로 策論을 짓게 하는 科擧의 일종으로, 사대부들이 이를 영예로 여겨 ‘大科’라 칭하였으며, 墓主인 田況이 이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는 것이다.
역주7 夏英公 范文正公 : 夏英公은 英國公에 贈封되었던 夏竦이고, 范文正公은 文正의 諡號를 받은 范仲淹을 지칭한다.
역주8 樞密副使韓公宣撫 : 樞密副使 右諫議大夫 韓琦를 陝西宣撫使로 삼았던 것을 지칭한다.
역주9 判三班院 : 三班院의 首長이다. 供奉官, 殿直, 殿前承旨를 三班이라 하고, 三班에 소속된 武官의 人事를 담당한 수장이 判三班院이다.
역주10 蜀自王均李順再亂 : 王均(?~1000)은 眞宗 때에 益州 任神衛 都虞候로 있던 사람으로, 咸平 3년(1000) 正月에 亂을 일으켜서 鈐轄 符昭順을 죽이고 知州를 축출하였던 部卒 趙延順의 추대를 받아 王이 되어 국명을 大蜀, 年號를 和順이라 칭하였다가 官軍에 討滅당한 인물이다.
李順(?~994)은 淳化 4년(993) 變亂을 일으켜 成都를 점거하고 大蜀王이라 칭하였다가 피살된 인물이다.
역주11 張忠定 : 張詠(946~1015)을 지칭한다. 李順의 變亂 平定에 공을 세웠고, 반란에 가담했던 蜀 땅 사람들을 寬厚하게 다스려 명망이 높았던 인물로서, 諡號가 忠定이므로 張忠定이라 칭한 것이다.
역주12 : 촉
역주13 自景德會計 : 景德은 宋 眞宗의 年號(1004~1008)이고, 會計는 재물의 관리와 출납 등의 일을 담당한 관원이다.
역주14 宰相河南公 : 宰相 河南公은 富弼(1004~1083)을 지칭한다.
역주15 : 삭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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