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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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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계자에 대한 논
이라
논지가 명확하다.
先王 酌乎人情之中하야 以制喪禮하야 使哀有餘者 俯而就之하고 哀不足者 企而及之하니라
선왕先王이 사람들 마음의 중용中庸을 참작하여 이에 맞게 상례喪禮를 제정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사람은 억제하여 따르게 하고, 슬픔이 부족한 사람은 힘써서 이르게 하였다.
哀不足者 非聖人之所甚善也로되 善之者 善其能勉於禮而已니라
슬픔이 부족한 사람은 성인聖人이 심히 잘한다고 여길 바가 못 되니, 그런데도 잘한다고 한 것은 그 를 행하려고 힘쓰는 것을 잘한다고 여겼을 뿐이다.
延陵季子 其長子死 旣封而號者三하고 遂行하니 인저하시니라
연릉계자延陵季子가 그의 장자長子가 죽자 봉분封墳을 마친 뒤 세 번 호곡號哭하고 마침내 떠났는데,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연릉계자延陵季子를 행함에 합당하게 하였도다.” 하셨다.
대저 장자長子에는 삼년복三年服을 입도록 성인聖人이 제정하였으니 부자지간父子之間의 가까운 사이이고, 장자長子후계자後繼者이니 인정상人情上 지극히 한 관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今季子三號遂行하니 則於先王之禮 爲不及矣
그런데 계자季子는 세 번 호곡만 하고 떠났으니,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법禮法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今論者曰 當是之時하야 季子聘於齊하야 將君之命이라하니
이제 그에 대하여 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계자季子군주君主을 받들고 나라에 빙문聘問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하였다.
若夫季子之心 則以謂不可以私義而緩君命이니 有勢不得以兩全者 則當忍哀以徇於尊者之事矣
대저 계자季子의 마음은 부자간父子間이라는 사사로운 의리 때문에 군주君主을 늦출 수가 없으니, 두 가지를 모두 온전히 갖출 수 없다면, 마땅히 슬픔을 참고 왕의 일을 행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今將命而聘이라가 旣聘而返하니 遂少緩而盡哭之哀 則於事君之義 豈爲不足而害於使事哉
이제 왕명을 받들고 빙문하러 갔다가 빙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 비록 돌아가는 일을 조금 늦추고 슬프게 곡하기를 극진히 한다 해서, 군주를 받드는 의리에 무어 부족할 것이 있겠으며, 사신使臣의 일에 해가 될 것이 있었겠는가.
君臣父子之義 勢足以兩全이어늘 而不爲之盡禮也 則亦薄於骨肉之親하야 而不用先王之禮爾니라
군신간君臣間부자간父子間의리義理를 형편상 모두 온전하게 할 수 있었는데도 예를 극진하게 하지 않았다면,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야박하게 대하여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법禮法준행遵行하지 않은 것이 될 뿐이다.
其言 曰 骨肉歸復於土 命也 若魂氣 則無所不之矣라하니 夫骨肉之復於土 魂氣之無不之 是人情之所哀者矣
그의 말에 “골육骨肉이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천명天命이지만, 혼기魂氣는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하였는데, 대저 골육骨肉이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혼기魂氣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는 것, 바로 이것이 인정人情이 슬프게 여기는 것이다.
君子無所不言命이나 至於喪하야는 則有性焉하니 獨不可以謂命也니라
군자가 천명天命이라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없지만, 상사喪事에 이르러서는 천명天命 외에 슬퍼하는 천성이 있으니, 다만 이라고만 이르는 것은 옳지 않다.
옛적 장주莊周가 그 을 당하여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고, 동문오東門吳는 그 자식의 을 당하여 자식이 애초에 없었던 데에 비유하여 슬프지 않은 듯이 행동하였는데, 이들은 인륜人倫을 버리고, 나와 만물이 동일하다는 제물齊物를 따른 것이니, 이는 우리 유자儒者들의 관점에서는 죄인罪人들인 것이다.
觀季子之說하면 蓋亦周吳之徒矣니라
계자季子가 한 말을 살펴보면 그도 장주莊周동문오東門吳와 같은 무리라 할 수 있다.
父子之親 仁義之所由始 而長子者 繼祖考之重이라
부자간父子間의 가까움은 인의仁義가 이로 말미암아서 시작되는 것이고, 장자長子조고祖考를 계승할 중요한 사람이다.
故喪之三年하나니 所以重祖考也
그 때문에 상기喪期를 3년으로 한 것이니, 조고祖考중시重視하기 때문이다.
今季子 不爲之盡禮하니 則近於棄仁義 薄祖考矣니라
그런데 이제 계자季子가 그를 위해 를 극진히 하지 않았으니, 이는 인의仁義를 버리고 조고祖考박대薄待한 것에 가까운 행위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상사喪事에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으로 그를 관찰할 수 있으리오.” 하셨으니,
臨人之喪而不哀 孔子猶以爲不足觀也어시든 況禮之喪三年者乎
남의 에 임해서도 슬퍼하지 않으면 공자께서는 오히려 더 볼 것이 없다고 여기셨는데, 하물며 예법禮法에 정한 3년상을 치러야 할 사람임에랴.
然則 宜非取之矣
그러므로 이 말은 마땅히 취할 바가 못 된다.
예기禮記》에 “장사葬事 지낼 때에 광중壙中의 깊이는 물이 솟는 데까지 이르지 않게 하였고, 은 평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혔으며, 하관下棺한 뒤에 봉분封墳을 만드는데 가로와 세로는 묘혈墓穴을 덮을 정도였고 높이는 손으로 짚을 정도였다.”라고 하였으니, 공자孔子께서 칭찬한 것은 이처럼 장례葬禮를 예법에 합당하게 치른 것을 칭찬한 것일 뿐이다.
獨稱葬之合於禮 則哀之不足 可知也니라
다만 장례葬禮에 합당하게 치른 것만을 칭찬하였다면, 슬픔이 부족하였다고 보았음을 알 만하다.
衛有送葬者어늘 夫子觀之하시고 曰 善哉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장례葬禮를 치르는 것을 공자孔子께서 보시고 “훌륭하도다!
라하시니
사례事例는 모범으로 삼을 만하도다.” 하셨다.
若此 則夫子之所美也
이와 같은 것이 바로 공자께서 찬미하신 것이다.
聖人之言 辭隱而義顯하니 豈徒然哉리오
성인聖人의 말씀은 말은 은미隱微하면서도 의리義理는 확연하게 드러나니, 어찌 의도가 없이 하셨겠는가.
學者之所不可不思也니라
이는 학자學者들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역주
역주1 季子論 : 季子는 춘추시대 吳王 壽蒙의 少子로 이름은 季札이다. 수몽이 그의 현명함을 보고 傳位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자, 延陵에 봉하였으므로 延陵季子라 칭하였다. 魯나라에 使臣으로 와서는 周樂의 연주를 請하고 各國의 盛衰를 이와 연관지어 비평한 일이 있었다.
이 글은 延陵季子가 齊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長子가 죽어 제나라의 嬴邑과 博邑의 사이에 장사 지내니, 孔子가 예법에 맞다고 칭찬하였는데, 孔子의 評과 《禮記》 〈檀弓〉편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季札의 행위가 禮法에 어긋나는 점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역주2 孔子曰……其合矣乎 : 이 내용은 《禮記》 〈檀弓 下〉에 보인다.
역주3 夫長子之喪……人情之所至重也 : 《儀禮》 〈喪服〉에 “父는 長子를 위하여 三年服을 입는다. 傳에 이르기를 ‘왜 삼년복을 입는가? 先祖의 正體를 담당함을 중히 여겨서이고, 또한 그가 장차 자기를 대신하여 宗廟 제사의 祭主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父爲長子斬衰 傳曰 何以三年也 正體於上 又乃將所傳重也]”라고 하였다.
鄭玄의 注에 “이 말은 父의 後繼者가 된 이후에 長子를 위해 삼년복을 입게 되는데, 그가 선조의 정체를 담당함을 중히 여기고, 아울러 그가 장차 자기를 대신하여 종묘의 제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此言爲父後者 然後爲長子三年 重其當先祖之正體 又以其將代己爲宗廟主也]”라고 한 내용을 援用한 것이다.
역주4 昔莊周喪其妻 鼓盆而歌 : 《莊子》 〈至樂〉에 “莊子의 부인이 사망하자 惠子가 弔問하러 가서 보니 莊子가 마침 다리를 뻗고 앉아서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라고 하였는데, 成玄英의 疏에 “莊子가 生과 死가 둘이 아님을 알고, 哀와 樂이 하나임을 깨달았으므로, 이에 妻가 죽었어도 哭하지 않고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른 것이다.[莊子知生死之不二 達哀樂之爲一 是以妻亡不哭 鼓盆而歌]”라고 한 내용을 援用한 것이다.
역주5 東門吳喪其子 比於未有 : 《列子》 〈力命〉에 “魏나라에 東門吳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었는데도 근심함이 없었다. 그 家相이 말하기를 ‘公의 자식 사랑은 천하에 으뜸이었소. 그런데 이제 자식이 죽었어도 근심하지 않으니 웬일이오?’ 하니, 동문오가 대답하기를, ’내가 과거에 자식이 없었는데 자식이 없을 때에 근심한 일이 없었소. 이제 자식이 죽어서 과거에 자식이 없을 때와 같아졌는데 내가 무얼 근심할 것이 있겠소?’ 하였다.[魏人有東門吳者 其子死而不憂 其相室曰 公之愛子 天下無有 今子死不憂 何也 東門吳曰 吾常無子 無子之時不憂 今子死 乃與向無子同 臣奚憂焉]”라고 한 내용을 원용한 것이다.
역주6 齊物之道 : 춘추전국시대 老莊學派의 哲學思想으로, 그들은 宇宙間의 모든 事와 物 즉 生死와 壽夭, 是非와 得失, 物我와 有無 등을 모두 同一하게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莊子》 〈齊物論〉에 보인다.
역주7 孔子曰……不敢不勉也 : 《論語》 〈子罕〉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벼슬에 나아가면 公卿을 받들고, 집안에 들어오면 父兄을 섬기며, 喪事에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으며, 술 때문에 곤경을 겪지 않는 것, 이 중에 나에게 어느 것이 있는가.[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 하였다.
역주8 又曰……吾何以觀之哉 : 이 내용은 《論語》 〈八佾〉에 보인다.
역주9 此言 : 앞에 공자께서 “延陵季子는 禮를 행함에 합당하게 하였구나!”라고 칭찬한 말을 이른다.
역주10 蓋記其葬……其高可隱 : 이 내용은 《禮記》 〈檀弓 下〉에 보인다. ‘其高可隱’의 隱은 鄭玄의 注에 “隱은 손으로 짚는 것이다. 봉분이 손으로 짚을 정도라는 것은 높이가 4척 남짓 됨을 이른다.[隱 據也 封可手據 謂高四尺]”라고 보인다.
역주11 衛有送葬者……此可以爲法矣 : 이 내용은 《禮記》 〈檀弓 上〉에 “공자께서 위에 계실 때에 장례를 치르는 사람이 있자 공자께서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훌륭하도다! 장사 치르는 일이여! 모범으로 삼기에 족하도다! 얘들아 이를 기록해두어라.’ 하였다. 자공이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훌륭하다고 보신 것입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장례 치르러 갈 때에는 어린아이가 울면서 부모를 따라가는 듯하였고, 돌아올 때에는 슬픈 마음으로 차마 떠나오지 못하는 듯하였노라.’ 하셨다.[孔子在衛 有送葬者 而夫子觀之 曰 善哉 爲喪乎 足以爲法矣 小子識之 子貢曰 夫子何善爾也 曰 其往也如慕 其反也如疑]”는 내용을 援用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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