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1. 주공에 대한 논
論確而辨하고 亦儘圓轉이라
논지論旨가 정확하고 사리를 명확하게 분변分辨하였으며, 문의文意전개展開가 지극히 원만圓滿하다.
甚哉
심하였도다!
之好妄也
순경荀卿이치理致에 어긋난 것을 좋아하였음이여!
載周公之言하야 曰 吾所執贄而見者 十人이요 還贄而相見者 三十人이요
주공周公의 말씀이라 하면서 수록해놓기를 “나에게 예물을 가지고 찾아왔기에 만나본 사람이 10인이고, 예물을 돌려보내고 대등한 예를 갖추어 만나본 사람이 30인이며,
내가 예를 갖추고서 뵌 분이 백여 인이고, 말하려는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다 마치도록 요청한 사람이 천여 인이었다.” 하였는데,
是誠周公之所爲 則何周公之小也
이것이 진실로 주공께서 하셨던 일이라면, 주공이 어찌 그다지도 자질구레하였단 말인가!
夫聖人爲政於天下也 初若於天下 而天下卒以無所不治者 其法誠修也
대저 성인聖人천하天下를 다스리게 되면, 처음에는 마치 천하를 위해 하는 일이 없는 듯한데도 천하가 마침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은, 그 이 진실로 완미完美하게 시행되어서이다.
하야 而盡其道하야 以爲養賢敎士之法하니 是士之賢 雖未及用이나 而固無不見尊養者矣
그러므로 삼대三代의 제도는 교육기관으로 에는 을 설립하고, 에는 를 세우고, 국도國都에는 을 세워서, 이로써 그 를 극진히 하여 현자賢者를 양성하고 를 가르치는 을 정하니, 이렇게 양성된 들의 현명함이 비록 벼슬에 임용하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진실로 높이 우대받고 봉양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此則周公待士之道也
바로 이것이 주공周公께서 선비들을 대우하는 방법이었다.
誠若荀卿之言이면亂世之事也 豈足爲周公乎
주공周公이 정말로 순경荀卿이 한 말처럼 하셨다면 이는 춘신군春申君이나 맹상군孟嘗君난세亂世에 한 일처럼 행한 것이니, 어찌 족히 주공周公다운 행위였다 할 수 있겠는가.
且聖世之 各有其業하야 講道習藝 患日之不足이어늘 豈暇遊公卿之門哉
또한 성인聖人이 다스리는 시대의 는 각기 그들이 맡은 일이 있어서 강구講究하고 기예技藝를 익히는 데도 시간이 부족한 것을 근심하는데, 어찌 공경公卿의 집 문을 드나들 겨를이 있었겠는가.
彼遊公卿之門하야 求公卿之禮者 皆戰國之奸民이니니라
공경의 집 문을 드나들면서 공경으로부터 예우받기를 추구한 사람들은 모두 전국시대戰國時代간사奸邪한 백성들로서, 모수毛遂후영侯嬴 같은 무리들이었다.
荀卿 生於亂世하야 不能考論先王之法하야 著之天下하고 而惑於亂世之俗하야 遂以爲聖世之 亦若是而已라하니 亦已過也로다
순경荀卿난세亂世에 살았으므로 선왕先王이 세운 법도法度를 고찰하고 논증論證하여 이를 천하에 드러낼 수가 없었고, 난세亂世말속末俗에 현혹되어 드디어 성인聖人이 다스리던 시대의 도 이와 같았을 뿐이라고 여긴 것이니, 이 또한 과오를 범한 것이다.
且周公之所禮者 大賢與인댄 則周公 豈唯執贄見之而已리오
또한 주공周公께서 를 갖추어 대한 사람들이 크게 어진 사람들이었다면, 주공께서 어찌 예물을 받고 그들을 만나보는 데 그쳤겠는가.
固當薦之天子하야 而共天位也 如其不賢하야 不足與共인댄 則周公 如何其與之爲禮也리오
진실로 마땅히 그들을 천자께 천거하여 하늘이 내려준 관직官職을 함께 맡았을 것이고, 만약 그들이 현명하지 못하여 관직을 함께 맡기에 부족하였다면, 주공께서 어찌 그들과 예를 갖추어 대하였겠는가.
聽鄭國之政할새 以其乘輿 濟人於溱洧한대 孟子曰 惠而不知爲政이라하시니
자산子産나라의 정사政事를 주관할 때에, 겨울에 진수溱水유수洧水에서 자기가 타는 수레로 사람들을 건네준 일이 있었는데, 맹자孟子께서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 마음은 가졌으나 정치를 제대로 할 줄은 모르는 행위이다.” 하셨다.
蓋君子之爲政 立善法於天下 則天下治 立善法於一國이면 則一國治어니와
대체로 군자君子정사政事를 주재하게 되어 천하에 좋은 을 세우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일국一國을 세우면 일국一國이 잘 다스려지게 된다.
如其不能立法하고 而欲人人悅之 則日亦不足矣리라
만약 좋은 법을 세워놓지 못하고서, 사람마다 그를 좋아하게 하려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使周公 知爲政이면 則宜立學校之法於天下矣 不知立學校하고 而徒能勞身하야 以待天下之士 則不唯力有所不足이라 而勢亦有所不得也리라
가령 주공周公께서 정사政事요체要諦를 아는 분이었다면 마땅히 어진 사람을 양성하는 학교의 제도를 천하에 세웠을 것이고, 학교를 세울 줄을 모르면서 다만 천하의 선비들을 접대하는 데 몸을 수고롭게 하였다면 다만 능력이 부족할 뿐만이 아니라 형편 또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였다면 주공도 어리석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曰 仰祿之士 猶可驕 正身之士 不可驕也라하니
순경荀卿이 또 말하기를 “벼슬을 추구하는 선비는 교만驕慢한 경우가 있으나, 몸을 바르게 닦은 선비는 교만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夫君子之不驕 雖闇室이라도 不敢自慢이니 豈爲其人之仰祿而可以驕乎
대저 군자君子가 교만하지 않음은, 비록 어두운 방 속에 혼자 있을 때에도 감히 스스로 방자한 행위를 하지 않는데, 어찌 그런 사람이 벼슬을 추구하는 것 때문에 교만한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嗚呼
아아!
所謂君子者 貴其能不易乎世也 荀卿 生於亂世하야 而遂以亂世之事 量聖人이로다
이른바 군자君子는 세상 풍조風潮에 따라서 자신의 주견主見을 바꾸지 않을 수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데, 순경荀卿난세亂世을 영위하면서 드디어 난세의 일을 기준으로 하여 성인聖人을 헤아려본 것이로다.
後世之士 尊荀卿以爲大儒하고 而繼孟子者라하나 吾不信矣로라
그러나 후세의 선비들 가운데 순경荀卿대유大儒라고 존경尊敬하며 맹자孟子를 계승한 분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이를 믿지 못하겠노라!
역주
역주1 周公論 : 《禮記正義》의 孔穎達 疏에 “《禮記》 〈明堂位〉에 이르기를 ‘周公이 攝政한 6년 동안에 禮와 樂을 제정하고 천하에 度量衡의 기준을 반포하였다. 단 그때에 제정된 禮는 〈周官〉과 〈儀禮〉이다.’ 하였다.[周公攝政六年 制禮作樂 頒度量於天下 但所制之禮 則周官儀禮也]”라 하였다.
이 글에서 말한 黨庠‧遂序‧國學에서 養賢敎士하였다는 것은 《禮記》 〈學記〉에 나오는 것으로, 〈周官〉과 〈儀禮〉에는 周公이 養賢敎士하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은 없는데, 왕안석은 漢代에 戴聖이 撰한 《禮記》를 周公이 지은 것으로 보고 이를 근거로 하여 논지를 전개한 것이다.
‘論’은 文體의 명칭으로, 事理를 闡明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議論文, 즉 論述文이다.
역주2 荀卿 : 荀卿(B.C. 313~B.C. 238)의 이름은 況이고, 戰國時代의 저명한 思想家로 《荀子》의 著者이다. 당시에 그를 높여서 荀卿이라 불렀다.
역주3 載周公之言……千有餘人 : 이 내용은 《荀子》 〈堯問〉에 보인다.
역주4 無爲 : 여기에서 말한 無爲는 淸靜虛無 順應自然하는 道家的 無爲가 아니라, 選賢任能 以德化人하는 儒家的 無爲를 칭하며, 이는 곧 儒家的 養賢敎士의 방법이었다.
역주5 三代之制……立學於國 : 《禮記》 〈學記〉에 “옛날의 가르침은 25家에는 塾이 있었으며, 黨에는 庠이 있었으며, 遂에는 序가 있었으며, 國中에는 學(太學)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라고 보인다.
옛날에 25가를 閭라 하여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 앞에는 문이 있고 문 옆에는 塾이 있어, 백성들 중에 집에 있는 자는 아침저녁으로 숙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500가를 黨이라 하고, 당의 학교를 庠이라 하니, 여의 숙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가르쳤다.
2,500가를 州라 하고 주의 학교를 序라 하니, 당의 학교 상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가르쳤다.
천자가 도읍한 곳과 제후국의 國中의 학교를 國學이라 이르니, 王公의 元子와 衆子 및 卿‧大夫‧士의 아들과 뽑혀 올라온 우수한 선비들을 가르쳤다.
역주6 春申孟嘗之行 : 어진 사람을 禮로 받들고 선비들을 공손하게 대하여 私的으로 門客을 기른 행위를 말한다. 春信은 春信君이다. 楚나라의 公子로 門下에 食客이 三千이었다. 孟嘗은 戰國時代 四大公子의 한 사람인 孟嘗君 田文이다. 齊나라 사람으로 食客이 三千이었고, 그 가운데 鷄鳴狗盜 등의 奸邪하고 豪俠한 무리가 많았으며, 齊‧秦‧魏 三國의 재상을 겸하기도 하였다.
역주7 : 저본에 ‘事’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8 毛遂侯嬴之徒也 : 毛遂는 戰國時代 趙나라 사람으로, 四大公子의 한 사람인 平原君의 식객이었다. 秦이 趙의 수도 邯鄲을 포위하자, 楚에 사신으로 간 평원군을 도와서 楚가 趙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侯嬴은 戰國時代 魏나라 사람으로, 70이 되도록 大梁의 城門을 지키는 小吏이었다. 信陵君이 그를 상객으로 모시고, 그의 계책을 써서 秦君을 격파하였다.
역주9 : 저본에 ‘事’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10 天位 : 지위와 직책은 군주가 마음대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모두 하늘이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것이라 하여, ‘天’자를 붙인 것이다.
《孟子》 〈滕文公 下〉에 “그와 더불어 天位를 함께하지 않았으며 그와 더불어 天職을 다스리지 않았으며 그와 더불어 天祿을 먹지 않았으니, 이는 士가 賢者를 높이는 것이고 王公이 賢者를 높이는 것이 아니다.[弗與共天位也 弗與治天職也 弗與食天祿也 士之尊賢者也 非王公之尊賢也]”라고 보인다.
역주11 子産……惠而不知爲政 : 이 내용은 《孟子》 〈離婁 下〉에 보인다.
역주12 子産 : 子産(?~B.C. 522)은 춘추시대 鄭나라의 執政者로, 어진 이를 등용하고 많은 善政을 베풀었다.
역주13 周公亦可謂愚也 : 저본에는 없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4 : 저본에는 ‘或’으로 되어 있는데, 龍舒本 《王文公文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