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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1)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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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所見亦是所爲 辨處亦委婉이라
學未成而仕하고 仕又不能俛仰以赴時事之會하야 居非其好하고 任非其事하며 又不能遠引以避小人之謗讒하니 此其所以爲不肖而得辠於君子者 而足下之所知也로다
往者 足下遽不棄絶하고 手書勤勤하야 尙告以其所不及하니 幸甚 幸甚이로다
顧私心尙有欲言하니 未知可否 試嘗言之호리라
某嘗以謂古者至治之世라야 然後備禮而致刑이라
不備禮之世 非無禮也 有所不備耳 不致刑之世 非無刑也 有所不致耳
故某於江東 得吏之大辠하야 有所不治하고 而治其小辠하니
不知者 以謂好伺人之小過하야 以爲明이라하고 知者 又以爲不果於除惡하야 而使惡者 反資此以爲言이라하니라
某乃異於此하니 以爲方今之理勢 未可以致刑이니
致刑則刑重矣하야 而所治者少하고 不致刑則刑輕矣하야 而所治者多하니 理勢固然也
一路數千里之間 吏方苟簡自然하야 狃於養交取容之俗이어늘
而吾之治者五人 小者 罰金하고 大者 纔絀一官하니 而豈足以爲多乎
某之事 不幸而類此로다
若夫爲此紛紛하야 而無與於道之廢興 則旣亦知之矣로되
抑所謂君子之仕行其義者 竊有意焉하노니 足下以爲如何
自江東으로 日得毁於流俗之士 顧吾心未嘗爲之變하니 則吾之所存 固無以媚斯世하야 而不能合乎流俗也
及吾朋友亦以爲言하니 然後怵然自疑하고 且有自悔之心이로라
徐自反念하니 古者一道德以同天下之俗 士之有爲于世也 人無異論이러니 今家異道 人殊德하고 又以愛憎喜怒 變事實之傳而傳之하니 則吾友庸詎非得於人之異論變事實之傳하고 而後疑我之言乎
況足下知我深하고 愛我厚하야 吾之所以日夜向往而不忘者 安得不嘗試言吾之所自爲하야 以冀足下之察我乎리오
使吾自爲如此而可以無辠 固大善이니 卽足下尙有以告我하야 使釋然知其所以爲辠 雖吾往者已不及이나 尙可以爲來者之戒
幸留意以報我하야 無忽이어다


12. 왕심보王深甫에게 보낸 답서
품은 견해見解가 또한 행위로 드러나고, 해명解明한 부분도 또한 부드럽고 함축성이 있다.
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였으면서 벼슬길에 올랐고, 벼슬하면서는 또 시사時事에 맞추어서 굽혔다 폈다 하지를 못하였고, 앉아 있는 자리는 좋아하는 곳이 아니었고 담당한 일은 적합한 업무가 아니었으며, 또한 소인小人들의 참소와 비방에서 멀리 벗어나 피할 수도 없었으니, 이것이 못난 사람이 되어서 군자君子들에게 죄를 짓게 된 소이所以임을 족하足下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지난날에 족하께서 이러한 저를 바로 포기하시지 않고, 손수 쓰신 정성스러운 편지를 보내시어 오히려 그 모자란 점을 알려 주셨으니, 매우 감사하고 매우 감사합니다.
이에 개인적으로 아직도 드리고자 하는 말씀이 있으니,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래도 말씀을 올려보겠습니다.
는 일찍이, 옛적 태평성세太平盛世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예의禮儀는 두루 갖추어지고 형벌刑罰주밀周密해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의禮義가 두루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대에는 예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두루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있었을 뿐이고, 형벌이 주밀하지 못하였던 시대에는 형벌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주밀하지 못한 바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강동江東에 있을 때에 관리들이 큰 죄를 범하였는데도 치죄治罪하지 않음이 있고, 작은 죄를 범한 사람은 치죄함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작은 과실過失을 잘 엿보는 것을 밝게 잘 살피는 것으로 여긴다.’고 하고, 이를 아는 사람이라 해도 ‘을 제거하는데 과단성이 없어서 악한 자들로 하여금 도리어 이를 빌미로 삼아서 변명을 할 수 있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는 곧 이들과는 달라서 방금方今의 형세가 형벌刑罰을 주밀하게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형벌이 주밀해지면, 형벌은 엄중해지지만 형벌로 다스릴 자는 적어지고, 형벌이 주밀해지지 못하면, 형벌은 가벼워지지만 형벌로 다스릴 자는 많아지나니, 사리事理의 추세가 본시 그런 것입니다.
수천 리 사이에, 관리官吏들의 경솔하고 소략한 행동이 자연스러워졌고, 사익私益을 위해 서로 교제하며 붕당朋黨을 이루어 자신의 평안을 도모하는 일이 일상적인 습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치죄治罪한 사람이 다섯 명인데, 죄가 작은 사람은 벌금을 부과했고 죄가 큰 사람은 관직에서 축출하였을 뿐이니, 이를 어찌 이를 많은 사람을 치죄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윤工尹 상양商陽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세 사람을 죽이고 그쳤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았다면 복명復命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였습니다.
치죄治罪한 일도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이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때문에 어지럽게 떠들어대면서 흥폐興廢에 관계됨이 없다고 여긴다면, 이미 또한 이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른바 군자君子가 벼슬하여 그 의리義理를 실천하는 것에 삼가 뜻을 두고 있으니, 족하足下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강동江東에 근무할 때부터 날마다 저속低俗들의 비방을 받았지만, 돌이켜보건대 저의 마음이 일찍이 그 때문에 바뀐 일이 없으니, 제가 한 일이 본시 이 시대의 세속世俗에 아첨을 하지 않아서 세속世俗에 합치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의 붕우朋友들 또한 이 문제를 언급한 이후 두려운 듯 스스로 의심하고, 또 스스로 뉘우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스스로 거듭 생각해보니, 옛적 을 한결같게 하여 천하의 풍속을 통일한 때에는, 가 세상을 위하여 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사람마다 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또한 애증愛憎희로喜怒 때문에 전해오는 사실을 바꾸어 전파하였으니, 저의 붕우인들 어찌 사람들의 이론異論과 전해오는 사실事實이 바뀐 것을 들은 이후에도 저의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족하足下께서는 저를 알고 계심이 깊고 저를 사랑함이 두터우시므로 제가 이 때문에 밤낮으로 바라보며 잊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제가 스스로 한 일에 대하여 말씀을 올려서 족하께서 저를 살펴 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령 제가 스스로 한 일이 이와 같으므로 죄 될 것이 없다면 진실로 크게 좋은 일이고, 곧 족하께서 과거에 저에게 알려주신 일이 있듯이 저로 하여금 그것이 가 되는 소이所以를 분명하게 알게 해 주신다면, 비록 제가 지나간 일은 바로잡을 수가 없으나 오히려 앞으로의 경계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게 이를 알려주실 뜻을 지니시고 이에 소홀함이 없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역주
역주1 答王深甫書 : 이 편지는 왕안석이 提點江南東路刑獄으로 있을 때인 嘉祐 3년(1058)경에, 자신이 처리한 조치에 대한 비난이 있자, 이를 변호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힌 것이다. 王深甫는 앞에 나온 王回를 이른다.
역주2 工尹商陽……不足以反命 : 《禮記》 〈檀弓 下〉에, “百工의 우두머리인 商陽이 陳棄疾과 함께 吳나라 군사를 추격하여 가까이 이르게 되자, 陳棄疾이 工尹 商陽에게 이르기를 ‘왕의 일로 싸우는 것이니 그대는 활을 잡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활을 잡자 ‘그대는 쏘시오’ 하니, 쏘아서 한 사람을 죽이고 활을 활집에 넣었다. 또 적 가까이 이르자 똑같은 말을 하니, 다시 두 사람을 쏘아 죽였다. 한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 눈을 감고 수레를 멈추게 하고서는, ‘朝廷에 참여하지도 않고 연회에 끼지도 않는 사람이니 세 명을 죽였으면 또한 돌아가 復命하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孔子가 평하기를, ‘사람을 사살하는 가운데도 禮를 갖추었도다.’ 하셨다.[工尹商陽與陳棄疾追吳師 及之 陳棄疾謂工尹商陽曰 王事也 子手弓而可 手弓 子射諸 射之 斃一人 韔弓 又及 謂之 又斃二人 揜其目 止其御曰 朝不坐 燕不與 殺三人 亦足以反命矣 孔子曰 殺人之中 又有禮焉]”라고 한 말을 축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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