荊公이 表女兄弟之舅하되 而所次文章政事하고 無一言點綴하니 竝本其子之言이라
군옥君은 건창建昌남성인南城人이니 姓왕씨王氏요 諱某요 자字군옥君玉이라
少則貧窶호되 事親盡力하야 未嘗佚遊慢戱以棄一日하고 亦未嘗屈志變節以辱於一人이라
故雖食蔬水飮이나 而父母有歡愉之心하고 徒步藍縷호되 而鄕人有畏難之色이러라
及其有子에 則盡其方以敎子하니 於是에 鄕人之子弟皆歸之하니 君隨少長所能以敎하야 又盡其力하다
蓋娶邑里주씨周氏女하니 有賢行하야 能助君所爲하니라
生四子하니 무기无忌무구无咎무기无隱무회无悔로 皆進士라
무기无忌早卒하고 而무구无咎獨中第하야 爲양주揚州강도현위江都縣尉하니 率君之敎하야 博學能문장文하고 篤行不怠라
然人以爲君能長者하야 以有是子요 而非特其敎之力也라하니라
某年 年六十五의 以某月日에 卒於강도江都其子之官舍하니 明年三月二十四日에 葬所居縣裏屯之原하다
當時에 무구无咎棄태주台州천태현령天台縣令하고 敎授於상주常州하야 其學彌勤하고 其行彌厲하니 其志蓋非有求於玆世而止라 能使君顯聞於後世하니 庶其在此라
以予不肖하고 而言之不美也어늘 安能有所重하야 以稱君之효성孝子耶아
형공이 이종 여형제의 시아버지에 대한 표문을 지으면서 그의 문장과 정사에 대하여 차례대로 기술만 하고, 한마디 말도 돋보이게 드러낸 것이 없이 모두 그 아들이 한 말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 아들도 사실을 지적한 것은 없고 다만 의론만으로 초안을 작성하였을 뿐이다.
군君은 건창建昌 남성인南城人으로, 성姓은 왕씨王氏이고, 휘諱는 모某이며, 자字는 군옥君玉이다.
젊어서는 빈한貧寒하게 지냈으나 부모를 섬김에 힘을 다하였고, 일찍이 단 하루도 함부로 놀고 희롱하며 허송한 일이 없었고, 일찍이 단 한 사람에게도 뜻을 굽히고 절의를 바꾸어서 욕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비록 거친 밥을 먹고 물이나 마시며 지내도 부모는 마음이 기쁠 수 있었고, 수레나 말이 없이 걸어다니고 해진 옷을 입고 있어도, 고장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경을 표하였다.
그가 자식을 두게 되자 바로 그런 방법으로 자식을 극진히 가르치니, 이에 고장 사람들의 자제가 모두 그를 찾아와 배우게 되었고, 군君은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특성에 맞게 가르치고 또 있는 힘을 다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주씨周氏의 따님과 혼인하였는데, 현숙賢淑한 행실行實로 군君이 하는 일을 잘 보필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무기无忌와 무구无咎와 무은无隱과 무회无悔이며, 모두 선비가 되었다.
무기无忌는 일찍 사망하였고, 무구无咎는 홀로 과거에 급제하여 양주揚州 강도현위江都縣尉가 되자 군君의 가르침을 준수遵守하여 박학博學하고 문장文章에 능能하였으며 독실篤實하게 실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군君이 덕망 있는 어른이어서 이런 아들을 둔 것이지, 단지 잘 가르친 효과로 된 것만은 아니라고 여겼다.
군君도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한 일이 있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모년某年에 향년享年 65세로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강도江都의 아들의 관사官舍에서 졸卒하였는데, 명년明年 3월 24일에 거처하던 마을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하장下葬한 후 오래 지나서 무구无咎가 비로소 나에게 표문表文을 지어서 군君의 묘소에 묘표墓表를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당시에 무구无咎는 태주台州의 천태현령天台縣令 자리를 버리고, 상주常州에서 교수敎授 노릇을 하면서 학문을 더욱 부지런히 닦고, 행실을 더욱 엄격하게 신칙申飭하였으니, 그 뜻이 이 세상에서 구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君으로 하여금 후세後世에 명성名聲을 드날리게 하는 데 있었으니, 아마도 묘표墓表를 세우려는 뜻이 여기에 있었던 듯하다.
나는 못난 사람이고 문장文章도 아름답지 못하니, 어찌 군君의 효성孝誠스러운 아드님의 뜻에 맞도록 중히 여길 만한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또한 차례대로 기술記述하기를 이와 같이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