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 其子孫處者 猶食其初邑
이러니 至後世遂爲
소공邵氏
하다
今有田里단양丹陽者 獨爲大家하야 其所出往往稱天下라
少敏爽하니 皇考某欲大就之하야 爲破貲聚留師賓以發其材러니 及壯에 行內修하야 不摽飾爲名하야 而有譽於爲士者러라
年四十에 始以진사進士로 出佐진동군鎭東軍하야 積功次하야 入尙書하야 爲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하야 박주통판通判박주통판亳州호되 遭母夫人某氏喪하야 不行以卒하다
尤不好官爵하야 至경사京師에 一不問權貴人所舍하니
事有類君者 自言得遷하고 或勸君自言호되 終不許하다
卒之明年의 황우皇祐某年某月에 弟某葬君某所하고 以夫人某氏祔하다
소공邵公이 연燕에 책봉冊封되어 나라를 세운 후 그 자손들이 아직도 처음 봉해졌던 땅에서 살고 있으며, 후세에 이르러 드디어 성姓을 소邵씨라 하게 되었다.
지금은 단양丹陽 땅에 전토田土와 주택을 가지고 정착해 사는 이들이 특히 대가大家를 이루어, 그 집안에서 나온 인물들이 왕왕 천하天下의 칭예를 받기도 하였다.
군君이 바로 그 단양인丹陽人으로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모某이다.
어려서부터 명민明敏하였으므로 선친先親 모某가 크게 발전시키고자 하여, 재물을 아끼지 않고 스승과 빈객을 모셔서 그의 능력을 계발하였는데, 장년壯年에 이르자 수신修身과 양성養性에 힘쓰면서, 이름을 내기 위해 꾸미거나 자신을 내세워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이 40세에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어서 진동군鎭東軍의 보좌관으로 나갔다가, 공적功績이 쌓여서 승진할 차례가 되어, 상서성尙書省으로 들어와서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 박주통판亳州通判이 되었는데, 때마침 모부인母夫人 모씨某氏의 상喪을 당하여 취임하지 못하고 졸卒하였다.
군君은 시가詩歌를 잘 지었고 음주飮酒를 좋아하였으며, 사람들과 사귈 때에는 화락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벼슬과 작위爵位를 좋아하지 않았고, 경사京師로 돌아와서는 권귀인權貴人이 사는 곳에 문안을 간 일이 전혀 없었다.
군君과 경력이 유사한 사람이 스스로 말하여 승진하고, 혹은 군君에게 스스로 말하라고 권해도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온 후 19년간 세 현縣의 지사知事를 지내는 동안에 군君을 재능才能 있는 인물人物이라 하여 추천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군君이 사망한 이듬해인 황우皇祐 모년某年 모월某月에 아우 모某가 군君을 모소某所에 안장安葬하고 부인夫人 모씨某氏를 합장合葬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모某와 모某이고 딸 하나를 두었으나 아직 어리다.
과거에 합격해 벼슬하였고, 모리某里에 안장하였으며,
이로써 저승에서도 해로하게 해드렸으니 복福을 받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