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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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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1. 金溪吳君墓誌銘
嗚咽이라
君和易罕言하고 外如其中하며 言未嘗及人過失이러라
至論前世善惡하야 其國家存亡治亂成敗所繇하야는 甚可聽也
嘗所讀書甚衆하고 尤好古而學其辭하야 其辭又能盡其議論하다
年四十三토록 四以進士試於有司호되 而卒困於無所就하다
其葬也황우皇祐六年某月日이요 무주撫州금계현金溪縣귀덕향歸德鄕석름石廩之原하니 在其舍南五里
當是時하야 君母夫人旣老하고 而子세륭世隆세륭 皆尙幼하며 三女子 其一卒하고 其二未嫁云이라
嗚呼
以君之有 與夫世之貴富而名聞天下者 計焉하면 其獨歉彼耶
然而不得祿以行其意하고 以祭以養 以遺其子孫以卒하니 此其士友之所以悲也
夫學者 將以盡其性이니 盡性而命可知也
知命矣 於君之不得意 其又何悲耶
銘曰
君名이요 언필彦弼이니
오씨오씨其先自희성이라
以儒起家世冕黻이어늘
獨成之難幽以折하니
厥銘維甥訂君實이라


11. 금계 오군의 묘지명
독자를 오열하게 한다.
화락和樂하고 평안平安하며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속마음과 일치하였으며, 일찍이 남의 과실過失에 대하여 언급한 일이 없었다.
시대時代선악善惡에 대하여 평론評論하면서, 그 평론이 국가國家존망存亡치란治亂성패成敗의 원인에 미치게 되면, 들을 만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일찍이 읽은 글이 매우 많았고, 고문古文 읽기를 더욱 좋아하여 그 문사文辭를 배워 그 문장文章이 또한 그 의론議論을 극진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43세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나 담당 관서에 나아가 진사시험進士試驗을 보았으나 끝내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를 장례 지낸 것이 황우皇祐 6년(1054) 모월某月 모일某日이고, 무주撫州금계현金溪縣 귀덕향歸德鄕 석름石廩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으니, 그의 집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이다.
이때에 모부인母夫人은 이미 늙으셨고, 아들 세륭世隆세범世范은 모두 아직 어렸으며, 딸이 셋이었는데, 그 가운데 한 딸은 사망하였고, 두 딸은 아직 출가出嫁하지 않았다.
아아!
이 지녔던 식견識見을, 지금 세상에서 부귀富貴하게 되어 명성名聲이 천하에 소문난 이들과 비교해본다면, 그가 어찌 저들보다 손색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벼슬을 얻어서 그의 뜻을 실현할 수가 없었고, 이런 상태로 제사祭祀 지내고 봉양奉養하는 일을 그 자손에게 남겨놓고서 하니, 바로 이 점이 그 사우士友들이 슬퍼하는 이유이다.
대저 학자學者천성天性을 극진하게 닦고자 하니, 천성天性을 극진하게 닦으면 천명天命을 알 수 있게 된다.
천명天命을 알게 되었다면, 이 뜻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또 어찌 슬퍼할 게 있으리오.
이에 다음과 같이 을 지었다.
이고, 언필彦弼이었네.
오씨吳氏는 그 선조先祖 때에 나라의 희성姬姓에서 갈라진 것이네.
유학儒學으로 출세하여 대대로 벼슬을 하였으나,
홀로 이루기 어려워서, 좌절되어 묻혀버렸네.
그의 생질甥姪을 지어, 의 참 모습을 이렇게 하였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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