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1)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왕문공본전王文公本傳
王安石 介甫 臨川人이라
왕안석王安石개보介甫이고, 임천臨川사람이다.
父益 이라
아버지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을 지내었다.
安石 少好讀書하야 一過目이면 終身不忘하고
안석安石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한번 읽은 글은 평생 잊는 일이 없었다.
屬文 動筆如飛하니 見者皆服其精妙러라
글을 짓게 되면 붓의 움직임이 나는 듯이 빨랐고, 보는 자들이 모두 그 문장의 정묘함에 탄복하였다.
友生 携以示歐陽脩하니 脩爲延譽하고 登進士上第하야 하다
친구 증공曾鞏이 그가 지은 글을 가져다가 구양수歐陽脩에게 보이자, 구양수가 그 명예를 드날리게 하였고, 진사시進士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첨서회남판관簽書淮南判官이 되었다.
舊制 秩滿이면 許獻文求試이나 安石獨否하고 再調하야 起堤堰 決陂塘하야 爲水陸之利하고 貸穀與民하야 立息以償하야 俾新陳相易하니 邑人 便之러라
예부터 전해오는 제도에,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던 자가 첫 번째로 받은 벼슬의 임기를 마치면 글을 올려 관직館職시용試用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왕안석은 홀로 이 관례를 따르지 않고 다시 은현鄞縣지현知縣으로 나아가, 제방堤防을 수축하여 관개灌漑를 하고 물길을 터놓아 수륙水陸의 교통이 원활하도록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관곡官穀을 대여해 주고 싼 이자로 가을에 갚도록 하여 묵은 관곡官穀을 햇곡식으로 교체하니, 고을사람들이 이를 편리하게 여겼다.
文彦博 爲相하야 薦其恬退하니 尋召試館職호되 不就하고 脩薦爲諫官호되 以祖母年高하다 脩以其須祿養言於朝하야 用爲하다
서주舒州통판通判으로 있을 때에, 재상 문언박文彦博이 안석은 명리名利에 초연하고 겸손과 사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하여 추천하였으므로, 불러 시험해보고 관직館職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고, 구양수歐陽脩간관諫官으로 추천하였으나 연로年老한 할머니의 봉양奉養 때문에 나아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구양수는 그가 녹봉祿俸으로 봉양할 수 있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군목판관群牧判官에 임용되었다.
請知하야하고 入爲하니三年也
다시 상주常州지주知州가 되기를 청하여 이에 서임되었다가 제점강동형옥提點江東刑獄으로 옮겼으며, 그 후 중앙으로 들어와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되었는데 그때가 가우嘉祐 3년이었다.
安石果於自用하고 慨然有矯世變俗之志하야 乃上하니
왕안석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하여는 과감하게 실천하였고, 강개한 의지로 세상을 바로잡고 퇴폐한 풍속을 변혁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이에 〈만언서萬言書〉를 올리기도 하였다.
後安石當國 其所注措 大抵皆祖此書
그 후 왕안석이 국정을 담당하였을 때 시행한 조치들이 대부분 이 〈만언서〉에 쓰여진 내용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하다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집현원直集賢院보임補任되었다.
先是 安石屢辭之命하니 士大夫謂其無意於世하야 恨不識其面하고 朝廷每欲畀以美官이나 惟患其不就也러라
이보다 앞서 안석安石은 여러 차례 관각館閣에 임명됨을 사양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은 그가 명리名利나 높은 벼슬에 뜻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서 그와 사귀지 못함을 아쉬워하였고, 조정에서는 좋은 관직에 서임敍任할 때마다 그가 취임하지 않을까봐 근심하게 되었다.
明年 한대 라가 乃受하다하야 하니 自是 不復辭官矣러라
이듬해에 동수기거주同修起居注에 보임되자 를 올려 8, 9차례나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으며, 지제고知制誥를 거쳐 규찰재경형옥糾察在京刑獄에 서임되니, 사양해도 채납採納되지 않음을 알고 이때부터는 관직을 사양하는 일이 없었다.
有少年得鬪鶉어늘 其儕求之호되 不與하니 恃與之昵하야 輒持去하니
어떤 소년少年이 싸움 잘하는 메추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친구가 달라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와 친한 사이임을 믿고 가져가 버렸다.
少年 追殺之하다
이에 소년이 쫒아가 그를 살해하였다.
開封當此人死하니 安石 駮曰 不與而持去하니 是盜也 追而殺之하니 是捕盜也라하고 하다
개봉부開封府에서는 그 죄인을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하니, 왕안석이 반박하기를, “주지 않은 것을 가져갔으니 이는 도둑질을 한 것이고, 이를 뒤쫓아 가서 때려죽인 것은 도둑을 잡은 것이다.” 하면서, 개봉부開封府에서 법 적용을 잘못했다고 추궁하였다.
事下하니 皆以府斷爲是라하고 詔放安石罪 安石不謝하니 擧奏之로되 帝亦不問하다
이에 이 사건을 심형원審刑院대리시大理寺에 넘겨서 재심再審을 하게 하니 모두 개봉부의 판결이 옳았다고 하면서 그릇되게 판단한 왕안석의 죄를 조서로 밝혀 내치려 하였으나, 안석이 사죄를 하지 않자 다시 어사대御史臺에서 왕안석의 탄핵을 상주上奏하였지만 황제는 이를 불문에 붙였다.
以母憂去하야 終英宗世토록 召不起하다
그 후 모친母親의 상을 당하여 벼슬을 사임하고 떠난 후 영종英宗재세在世하는 동안은 벼슬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安石 未知名于中朝러니 以韓呂二族爲巨室일새 欲藉以取重하야
왕안석은 본래 땅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조정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한씨韓氏여씨呂氏 집안이 지체 높은 명문 가문이었으므로 그들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하여 인망을 얻고자 하였다.
乃深與하다 三人更稱揚之하니 名始盛하다
이에 한강韓絳과 그 아우 한유韓維여공저呂公著 등과 친교를 맺어 절친해졌고, 이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왕안석을 찬양하니 비로소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在潁邸 維爲하야 每講說見稱이면 輒曰 此維之友王安石之說也니이다하고 及爲 又薦自代하니
신종神宗영왕穎王으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한유韓維영왕부穎王府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있었는데, 강설講說이 있을 때마다 칭찬을 받게 되면 즉시 말하기를, “이것은 저의 친구 왕안석의 주장입니다.” 하였고, 태자서자太子庶子가 되었을 때에는 왕안석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帝由是 想見其人하다
신종은 이로 말미암아 왕안석을 만나 아는 것처럼 여겼다.
甫卽位 命知江寧府라가 數月 召爲하다
즉위하자마자 그를 지강녕부知江寧府에 보임하였다가, 몇 달 만에 중앙으로 불러들여 한림학사翰林學士시강侍講에 보임하였다.
熙寧元年 造朝하니 帝問爲治所先한대 對曰 擇術爲先이니이다
희령熙寧 원년元年에 조정에 나아가자, 황제가 정치에서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을 물으니 답하기를, “나라 다스릴 방법方法을 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였다.
帝曰 唐太宗 何如 曰 陛下當法堯舜이니 何以太宗爲시니이까 帝曰 卿 可謂責難於君이로다하다
황제가, “ 태종太宗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폐하께서는 마땅히 , 을 본받으셔야지 어찌 태종을 본받으시려 하십니까?” 하니, “은 군주에게 어려운 일을 실행하도록 권고하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오.” 하였다.
一日講席 群臣退어늘 帝留安石坐하고 曰 有欲與卿從容論議者로라하고
어느 날 시강侍講을 마치고 신하들이 물러가자, 황제가 왕안석만 남아 있게 하고, “경과 조용히 의논할 일이 있소.” 하며
因言唐太宗必得魏徵하고 劉備必得諸葛亮然後 可以有爲하니 二子誠不世出之人也로다
이어서 말하기를, “ 태종太宗은 반드시 명재상名宰相 위징魏徵을 얻고 유비劉備는 반드시 제갈량諸葛亮을 얻은 연후에야 큰일을 할 수 있었으니, 이 두 사람은 진실로 세상에 자주 나오지 않는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라 할 수 있소.” 하였다.
安石曰 陛下誠能爲堯舜이신댄 則必有皐夔稷禹 誠能爲高宗이신댄 則必有傅說이니 彼二子者 何足道哉리이까하다
이에 왕안석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진실로 같은 성군聖君이 되신다면 반드시 고요皐陶, , 후직后稷, 같은 인물을 얻게 될 것이고, 진실로 나라 고종高宗처럼 되실 수 있다면 반드시 부열傅說 같은 인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저 두 사람을 어찌 말씀 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二年하다 帝謂曰 人皆不能知卿하야 以爲但知이요 不曉世務라하니 安石對曰 經術 正所以經世務爾니이다
희령熙寧 2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서임된 후 황제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경술經術에만 능할 뿐이요 세무世務에는 밝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소.” 하니, 왕안석이, “경술이 바로 세무를 처리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帝問 卿施設何先 安石曰 變風俗하고 立法度 最方今所急也니이다
이에 황제가, “이 조치를 한다면 무엇을 우선으로 하겠소?” 하고 물으니, 왕안석은, “퇴폐한 풍속風俗을 바꾸고 법도法度를 바로 세우는 것이 지금 시행해야 할 최급선무最急先務입니다.”라고 답하였다.
於是하고 命與陳升之 同領之하다
이에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고 추밀樞密 진승지陳升之와 함께 이를 영도하도록 명하였는데,
安石令其黨呂惠卿으로 任其事하고 而農田水利 靑苗均輸保甲免役市易保馬方田諸役 相繼竝興하야 號爲新法이라하고
왕안석은 그의 당여黨與여혜경呂惠卿에게 그 직무를 관할하게 하고, 농전農田 수리水利청묘靑苗, 균수均輸, 보갑保甲, 면역免役, 시역市易, 보마保馬, 방전方田 등의 모든 역사役事를 연이어 시행하며, 이를 포괄하여 ‘신법新法’이라 칭하고,
四十餘輩하야 頒行天下하다
제거관提擧官 40여 명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온 천하에 이를 반포 시행하게 하였다.
靑苗法者糴本 散與人戶하고 出息二分하야 春散秋斂이요
청묘법靑苗法상평창常平倉에서 곡식 매입대금을 민호民戶에 대여해 주되, 이식利息은 2으로 하여 봄에 대여해 주고 가을에 회수하는 제도이다.
均輸法者 以發運之職 改爲均輸하야 假以錢貨하야 凡上供之物 皆得徙貴就賤하고 用近易遠하며 預知在京倉庫所當辦者하야 得以便宜蓄買
균수법均輸法은 단순히 물자 운송만을 담당했던 발운사發運使의 직무를 균수均輸로 바꾸고, 내장고內藏庫에 저축해 놓은 은전銀錢상공미上供米를 자본으로 하여, 조정에 상공上供할 모든 물자 가운데 물가가 높은 지방에서 징수해야 할 것을 물가가 저렴한 지방에 가서 구매하고, 먼 곳에서 바쳐야 할 것을 가까운 곳에서 구매하며, 서울에 있는 창고의 저장량과 앞으로 필요한 양을 미리 계량하여 그 비축과 구매를 적합하게 하는 제도이다.
保甲之法 籍民二丁取一하고 十家爲保하야 保丁 授以弓弩하야 敎之戰陣이요
보갑법保甲法은 호적에 등재된 장정 2명에 1인분씩의 병역세兵役稅를 징수하고, 10를 1로 하며 보정保丁들에게 활과 쇠뇌를 지급하여 진치고 전투하는 법을 가르치도록 한 제도이다.
免役之法 據家貲高下하야 出錢雇役하고 單丁女戶 原無役者 一槪輸錢하야
면역법免役法부역賦役을 시키는 대신에, 각 가정의 자금이 많고 적음에 근거하여 징수한 돈으로 부역에 종사할 사람을 고용하여 일을 시키고, 장정이 한 사람뿐이거나 여자만 있는 가정은 부역을 면제免除하는 대신, 일률적으로 금전으로 대신 납부하게 하는 제도이다.
謂之助役이요
장정 한 사람뿐이거나 여자만 있는 가정에서 내는 돈을 조역전助役錢이라 하였다.
市易之法 聽人賖貸縣官財貨하야 出息二分하고 過期不輸者 加罰錢이요
시역법市易法은 사람들이 대여貸與를 요청하면 조정의 재화 즉 돈이나 곡식을 대여해 주고, 2의 이자를 내도록 하며, 기한期限이 지나도 갚지 않으면 벌금을 가하는 제도이다.
保馬之法 願養馬者 戶一匹 以監牧見馬給之커나 或官與其直使自市하고 歲一閱其肥瘠하야 死病者 補償이요
보마법保馬法오로五路의보義保로서 군마軍馬를 기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양마감養馬監에서 기르고 있는 관마官馬를 호당 1필씩 대여하거나 혹은 에서 말을 살 돈을 주어 구입하게 하고, 매년 한 차례씩 말이 제대로 자랐는가, 살이 쪘는가, 말랐는가 등을 조사하고, 죽거나 병이 들었으면 배상賠償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方田之法 以東西南北 爲一方하야 歲計量其地하고 驗其肥瘠하야 定其色號하고 分五等以定稅數
방전법方田法은 동, 서, 남, 북 천보千步일방一方으로 하여 해마다 그 땅을 계량하고, 비옥한가 척박한가를 따져서 그 등급等級을 결정하고, 5등급으로 나누어 납부할 세액을 정하는 제도이다.
又有免行錢者하니
이 외에도 면행전免行錢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約京師百物諸行利入厚薄하야 皆令納錢하고 與免祗應이라
조정에 각종 물자를 납부納付하는 행호行戶가 수도에 있었는데, 각 항호의 수입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돈으로 적정액을 납부하도록 하고 물자로 납부하는 것을 면제한 제도이다.
自是 四方 爭言農田水利하니 古陂廢堰 悉務興復하다
신법新法이 시행되고부터 사방에서 다투어 농전農田수리水利를 건의하였으므로, 오래된 방죽의 파괴된 둑을 모두 힘써 복구하였다.
又令民封狀增價以買坊場하며 又增茶鹽之額하고 又設措置河北糴便司하야 廣積糧穀于臨流州縣하야 以備饋運하다
또 인민들에게 관설 시장인 방장坊場을 대여할 때에는 경쟁입찰을 행하여 최고가를 써낸 사람이 낙찰받도록 하여 그 값을 올리고, 다세茶稅염세鹽稅를 증액하였으며, 또 조치하북적편사措置河北糴便司를 설치하여 강변의 여러 주현州縣에 널리 식량을 쌓아두고 필요할 때에 운송할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
由是 賦斂愈重하니 天下騷然云云하고 帝亦疑之하야 遂罷하고 爲觀文殿大學士知江寧府하니 自禮部侍郞으로 超九轉하야 爲吏部尙書하니라
이러한 제도制度개혁改革으로 말미암아 세금의 징수가 더욱 늘어나니 천하가 시끄러워졌고, 황제 또한 왕안석을 의심하여 드디어 예부시랑禮部侍郞직을 파직하고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지강녕부知江寧府에 보임하였는데, 예부시랑에 임명된 후부터 아홉 차례의 전직을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始呂惠卿遭喪去하니 安石未知所托이라가하고 信任之하야 亞于惠卿하다
여혜경呂惠卿이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자, 왕안석은 믿고 맡길 사람을 찾지 못하다가 증포曾布를 얻고는 그를 신임하여 여혜경이 맡았던 일을 대리하게 하였다.
及惠卿服闋 安石朝夕汲引하야 至是 白爲參知政事하다
그 후 여혜경이 상기喪期를 마치자 왕안석이 거듭 천거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용하도록 건의하였다.
安石之再相也 屢謝病求去러니 及雱死 尤悲傷不堪하야 請益力하다
왕안석이 다시 재상이 되자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양하고 물러나기를 청하다가, 아들 이 죽자 상심과 비애를 감내하지 못하고 더욱 간절하게 사임을 청하였다.
帝益厭之하야 罷爲鎭南軍節度使同平章事判江寧府라가 明年하고하다
황제도 차츰 왕안석에게 염증을 느껴서 재상직을 파하고 진남군절도사鎭南軍節度使, 동평장사同平章事, 판강녕부判江寧府에 서임하였다가, 이듬해에 집희관사集禧觀使로 바꾸어주고 서국공舒國公에 봉하였다.
元豐三年 復拜라가하고 改封荊하다
원풍元豐 3년에 다시 좌복야左僕射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하였다가 특진特進으로 바꾸고 형국공荊國公으로 개봉改封하였다.
哲宗立하야하다 未幾하니 年六十八이라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사공司空으로 승임陞任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하니 68세 때였다.
贈太傅하다 謚曰文이라하고 配享神宗하다
이에 태부太傅증직贈職하였고, 소성紹聖 연간에 시호諡號으로 정하고 신종神宗묘정廟廷배향配享하였다.
配食孔廟하야 列顔孟之次하고 追封舒王하다
숭녕崇寧 연간에는 공자孔子묘정廟廷에 배향하고 안회顔回맹자孟子의 다음 자리에 모셨으며 서왕舒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言於하야 降從祀하고 復停宗廟配享하고 削王封하다 復停孔廟從祀하다
그 후 양시楊時흠종欽宗에게 공자 묘정에의 배향配享을 중단하도록 건의하였고, 고종高宗은 신종 묘정에의 배향을 중단시키고 추봉하였던 서왕의 직위도 삭탈하였으며, 이종理宗은 공자 묘정에의 배향을 중단시켰다.
역주
역주1 王文公本傳 : 이 내용은 王安石의 傳記로서 《宋史》 〈王安石傳〉을 요약 기록한 것이므로 本傳이라 하였다. 本傳은 正史에 기록된 인물의 전기를 의미한다.
역주2 都官員外郞 : 왕안석의 父 王益(993~1038)은 都官員外郞을 역임하였다. 都官은 刑部에 속한 관청으로 그 기관의 부책임자가 員外郞이었다.
역주3 曾鞏 : 曾鞏(1019~1083)은 唐宋八家의 一人으로 中書舍人을 역임하였다.
역주4 簽書淮南判官 : 淮南 지방의 郡政을 보좌하고 문서를 관리하는 직책이다. 略稱으로 簽書 또는 簽判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역주5 館職 : 史館, 昭文館, 集賢院 등 三館의 職責을 칭하며, 文臣이 이곳에서 벼슬하는 것을 淸貴하게 여겼다.
역주6 知鄞縣 : 鄞縣은 현재의 浙江 寧波이다. 知縣은 해당 현의 農桑, 獄訟, 敎化, 賦役, 田穀 등을 관장하는 벼슬이다.
역주7 通判舒州 : 通判은 해당 고을의 부책임자로, 官員의 監察, 民政, 財政, 賦役, 司法 등을 관장하였다. 舒州는 현재의 安徽 潛山이다.
역주8 群牧判官 : 馬政을 관장하는 곳이 群牧司이고 判官은 이곳의 관원이다.
역주9 常州 : 현재의 江蘇省에 있는 고을이다.
역주10 提點江東刑獄 : 提點刑獄公事는 해당구역의 司法, 刑獄 등을 관장하는 官名으로, 江東은 현재의 江蘇 長江 이남을 관할하였다.
역주11 度支判官 : 三司에 속한 官名으로, 각종 財政과 漕運 등을 관장하였다.
역주12 嘉祐 : 宋 仁宗의 年號이다. 嘉祐 3年은 西紀 1058년이다.
역주13 萬言書 : 前述한 〈上仁宗皇帝言事書〉를 칭한다.
역주14 直集賢院 : 典籍의 校勘과 收藏을 관장하는 관직이다.
역주15 館閣 : 三館秘閣, 龍圖閣, 天章閣의 合稱으로, 圖書, 經籍, 歷代의 御書 등을 관장하는 文筆職이다.
역주16 同修起居注 : 皇帝의 言行을 기록하는 史官職이다.
역주17 疏辭至八九 : 《宋史》 〈王安石傳〉에는 ‘疏’자가 없다.
역주18 知制誥 : 皇帝의 制, 誥, 令, 勅書, 德音 등을 起草하는 文筆職이다.
역주19 糾察在京刑獄 : 京城의 刑獄을 審査하는 관직이다.
역주20 遂劾府司失入 : 이때 왕안석은 首都 開封府의 刑獄을 심사하는 糾察在京刑獄이었다.
역주21 審刑大理 : 審刑은 審刑院을, 大理는 大理寺를 지칭한다. 대리시는 심형원에서 넘어온 형사사건을 再審하는 관서이다.
역주22 御史 : 御史臺를 지칭한다. 文武官의 失政이나 不法行爲를 감찰하는 관서이다.
역주23 本楚士 : 왕안석의 고향 臨川이 옛 春秋戰國時代의 楚에 소속된 곳이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역주24 韓絳絳弟維及呂公著 : 韓維(1017~1098)는 벼슬이 門下侍郞에 올랐던 인물이다. 韓絳(1012~1088)은 神宗時에 參知政事, 平章事를 역임하였고, 왕안석의 新法을 적극 지지하여 當時人들이 ‘傳法沙門’이라고 기롱하였다. 呂公著(1018~1089)는 司馬光과 함께 宰相을 역임한 인물로 후에는 新法을 반대하였다.
역주25 神宗 : 英宗의 子로 穎王에 封해졌다가 太子로 책봉되었다.
역주26 記室 : 記室參軍은 親王府의 屬官으로 記錄과 箋奏를 담당하였다.
역주27 太子庶子 : 太子東宮에 둔 官名으로 啓奏와 文書를 관장하였다.
역주28 翰林學士兼侍講 : 翰林學士는 內制의 起草 撰述을 관장하는 관직이고, 侍講은 황제에게 經書와 史書를 講說하고 황제의 질문에 應對하는 관직이다.
역주29 參知政事 : 副宰相의 직위이다.
역주30 經術 : 儒家 經傳에 관한 學問을 칭한다.
역주31 制置三司條例司 : 新法의 제정 시행을 위하여 설치한 기구로서 새로운 財政政策의 企劃과 制定, 舊法의 개정, 新法의 반포 시행 등을 관장하였다.
역주32 樞密 : 知樞密院事의 略稱으로 軍國機務, 國防, 軍馬 등을 관장하였다.
역주33 提擧官 : 制擧常平官의 略稱으로 各 路의 役錢, 靑苗錢, 義倉, 賑濟, 水利, 茶鹽 등의 일을 관장하며 아울러 各 州의 官吏를 감찰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역주34 常平 : 常平倉을 일컫는 것으로, 물가가 급격히 등귀할 때는 물자를 풀고 급격히 하락할 때에는 적정가로 구매하여 물가를 조절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역주35 五路 : 河北東路, 河北西路, 河東路, 永興軍路, 秦風路 등 5個의 지방행정구역을 칭한다.
역주36 義保 : 鄕軍의 일종으로, 農閑期에 武藝를 익히고 戰時에는 城堡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역주37 各千步 : 저본에는 ‘若干步’로 되어 있는데 《宋史》 〈王安石傳〉에 의거하여 ‘各千步’로 바로잡았다.
역주38 行戶 :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조정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던 漢城의 六矣廛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던 宋나라의 상인들이다.
역주39 曾布 : 曾布(1036~1107)는 曾鞏의 아우로 왕안석의 신임을 얻어 翰林學士가 되었으나 후에는 新法을 반대하였다.
역주40 集禧觀使 : 集禧觀은 宮觀의 명칭이고 이곳의 使는 재상을 예우하기 위하여 둔 것으로 명예직에 해당된다.
역주41 舒國公 : 舒는 地名이고, 國公은 爵位로 郡王의 아래이고 郡公의 위에 해당하는 第4等의 爵位이다.
역주42 左僕射 : 尙書省의 第2人者로 宰相의 직급에 해당하나 실무를 맡지 않는 명예직이다.
역주43 觀文殿大學士 : 품계는 지극히 높으나, 자문에만 응할 뿐 실무를 담당하지는 않는 직책이다.
역주44 特進 : 官名으로 文散官이다.
역주45 司空 : 최고의 관직인 三公의 하나로, 常置官은 아니었고 政事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역주46 紹聖 : 宋 哲宗의 年號로 1094~1097년 사이에 사용하였다.
역주47 崇寧 : 宋 徽宗의 年號로 1102~1106년 사이에 사용하였다.
역주48 楊時 : 楊時(1054~1135)는 宋代의 性理學者로 龜山先生으로 稱하여졌으며, 왕안석의 新法을 배척하고 靖康和議를 반대했던 인물이다.
역주49 欽宗 : 1년 4개월간 재위했다가 金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사망한 제왕이다.
역주50 高宗 : 高宗(在位 1127~1162)은 徽宗과 欽宗이 금나라에 끌려간 후 남경에서 즉위하여 金國과의 求和策을 썼던 제왕이다.
역주51 理宗 : 1224~1264년간에 재위하였던 제왕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