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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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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2. 馬漢臣墓誌銘
簡而深이라
합비인合淝人마중서馬仲舒 한신漢臣이니 其先茂陵합비인이라
父臯爲하야 寘其家금릉金陵하니
하야 齒諸生이라
爲人喜酒色하고 其相語以褻私侈爲主하니
父母不欲之하고 又隆愛之하야 不能逆其意以敎也하다
한신漢臣亦疎金錢하야 急人險艱하고 不自顧計러라 於衆中尤慕近予하고
予亦識其可敎하야 以禮法開之하니 果大寤하야 遂自挫刻하고 務以入禮法하야 從予學作진사進士러니
旣數月 其辭문장粲然하야 充其科者也하다
한신漢臣長予四年하야 予兄弟視之하고 한신漢臣視予 則師弟子如也 嘗助予叔父之喪 若子姓然하다
경력慶曆六年 한신漢臣冠五年矣 從予入경사京師하야 待進士擧라가 六月病死하니 死時予亦病이라
其叔父在경사京師하야 因得棺斂하야금릉金陵殯之하고 某年某月 乃葬于某處하다
하시니 한신漢臣幾是矣로다
誌其墓云하노라


12. 마한신의 묘지명
간결하면서도 심오하다.
합비인合淝人 마중서馬仲舒한신漢臣이니, 그 선조先祖무릉인茂陵人이었다.
부친父親 강남동로江南東路발발撥發이었으므로, 그의 집을 금릉金陵에 두게 되었다.
한신漢臣은 그 때문에 강녕부江寧府의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여러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사람됨이 주색酒色을 좋아하였고, 그의 말은 경망하고 천박하고 과장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부모父母도 그를 제지하려 하지 않고, 더욱 그를 끔찍이 사랑하여, 그의 뜻을 거스르며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신漢臣은 또한 금전金錢을 아끼지 않고 다른 사람이 험하고 어려운 일에 처하면 급히 구제해주었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무리들 가운데서 더욱 나를 애모愛慕하고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나도 그가 가르칠 만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예법禮法으로 계발啓發하니, 과연 크게 깨닫고, 드디어 스스로 단련하기를 약속하고, 예법에 맞추기를 힘쓰며, 나를 따라서 진사進士가 되기를 배웠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그의 문장文章이 찬란해져서 법식法式규범規範에 부합하게 되었다.
한신漢臣은 나보다 네 살 위였으므로, 나는 그에게 아우가 형을 대하듯 하였고, 한신漢臣은 나에게 제자弟子가 스승을 대하듯 하였으며, 일찍이 내 숙부叔父상례喪禮를 도울 때에는 조카처럼 처신하였다.
경력慶曆 6년(1046)은 한신漢臣관례冠禮를 행한 지 5년이 되는 해였는데, 나를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와서 진사시험進士試驗에 대비하고 있다가 6월에 병사病死하였으니, 그가 사망할 때에 나도 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숙부께서 경사京師에 계셨으므로 을 마련하고 을 하여 금릉金陵으로 돌아가 빈장殯葬을 하고, 이어서 모년某年 모월某月모처某處안장安葬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삭은 나왔으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도다.” 하셨는데, 한신漢臣이 거의 이와 유사하게 된 것이로다.
슬프도다!
그의 무덤에 이렇게 를 지어 세우게 하였노라.


역주
역주1 江東撥發 : 江東은 宋代의 行政區域이었던 江南東路의 略稱이고, 撥發은 京師에 供給할 漕運을 담당한 撥發司의 略稱이다.
역주2 漢臣因入學 : 宋代에 官員의 子弟 가운데 京師에 있는 사람은 國子監 입학이 허용되고, 地方官의 자제들은 해당 지역의 학교에 입학하였다.
역주3 孔子曰……有矣夫 : 《論語》 〈子罕〉편에 보이며, 孔子께서 顔淵이 早逝한 것을 哀慟해하며 하신 말씀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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