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인合淝人마중서馬仲舒의 자字한신漢臣이니 其先茂陵합비인人이라
父母不欲之하고 又隆愛之하야 不能逆其意以敎也하다
然한신漢臣亦疎金錢하야 急人險艱하고 不自顧計러라 於衆中尤慕近予하고
予亦識其可敎하야 以禮法開之하니 果大寤하야 遂自挫刻하고 務以入禮法하야 從予學作진사進士러니
한신漢臣長予四年하야 予兄弟視之하고 한신漢臣視予에 則師弟子如也라 嘗助予叔父之喪에 若子姓然하다
경력慶曆六年에 한신漢臣冠五年矣라 從予入경사京師하야 待進士擧라가 六月病死하니 死時予亦病이라
其叔父在경사京師하야 因得棺斂하야 歸금릉金陵殯之하고 某年某月에 乃葬于某處하다
합비인合淝人 마중서馬仲舒는 자字가 한신漢臣이니, 그 선조先祖는 무릉인茂陵人이었다.
부친父親 고皐는 강남동로江南東路의 발발撥發이었으므로, 그의 집을 금릉金陵에 두게 되었다.
한신漢臣은 그 때문에 강녕부江寧府의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여러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사람됨이 주색酒色을 좋아하였고, 그의 말은 경망하고 천박하고 과장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부모父母도 그를 제지하려 하지 않고, 더욱 그를 끔찍이 사랑하여, 그의 뜻을 거스르며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신漢臣은 또한 금전金錢을 아끼지 않고 다른 사람이 험하고 어려운 일에 처하면 급히 구제해주었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무리들 가운데서 더욱 나를 애모愛慕하고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나도 그가 가르칠 만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예법禮法으로 계발啓發하니, 과연 크게 깨닫고, 드디어 스스로 단련하기를 약속하고, 예법에 맞추기를 힘쓰며, 나를 따라서 진사進士가 되기를 배웠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그의 문장文章이 찬란해져서 법식法式과 규범規範에 부합하게 되었다.
한신漢臣은 나보다 네 살 위였으므로, 나는 그에게 아우가 형을 대하듯 하였고, 한신漢臣은 나에게 제자弟子가 스승을 대하듯 하였으며, 일찍이 내 숙부叔父의 상례喪禮를 도울 때에는 조카처럼 처신하였다.
경력慶曆 6년(1046)은 한신漢臣이 관례冠禮를 행한 지 5년이 되는 해였는데, 나를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와서 진사시험進士試驗에 대비하고 있다가 6월에 병사病死하였으니, 그가 사망할 때에 나도 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숙부께서 경사京師에 계셨으므로 관棺을 마련하고 염斂을 하여 금릉金陵으로 돌아가 빈장殯葬을 하고, 이어서 모년某年 모월某月에 모처某處에 안장安葬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삭은 나왔으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도다.” 하셨는데, 한신漢臣이 거의 이와 유사하게 된 것이로다.
그의 무덤에 이렇게 지志를 지어 세우게 하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