某在京師時에 嘗爲足下道曾鞏善屬文이나 未嘗及其爲人也러니
還江南하야 始熟而慕焉友之하고 又作文粗道其行호라
其居家에 親友惴畏焉하야 怪某無文字規鞏하고 見謂有黨하니
할새 左右就養
에 無虧行
하고 家事銖髮以上
을 皆親之
하니
父亦愛之甚하야 嘗曰 吾宗敝로되 所賴者는 此兒耳라하니 此某之所見也니 若足下所聞은 非某之所見也니라
鞏在京師에 避兄而舍는 此雖某라도 亦辠之也니 宜足下深攻之也로다
事固有迹이나 然而情不至是者하니 如不循其情而誅焉이면 則誰不可誅邪아
但在京師時에 未深接之하고 還江南하야 又旣往은 不可咎니 未嘗以此로 規之也니라
鞏果於從事하고 少許可하야 時時出於中道하니 此則還江南時에 嘗規之矣니 鞏聞之하고 輒瞿然하니라
規之하야 從則已요 固且爲文字하야 自著見然後已邪는 則未嘗也로라
凡鞏之行은 如前之云이요 其旣往之過도 亦如前之云而已니 豈不得爲賢者哉아
天下에 愚者衆하고 而賢者希하야 愚者固忌賢者하고 賢者又自守하야 不與愚者合하니 愚者加怨焉이라
挾忌怨之心이면 則無之焉而不謗하나니 君子之過於聽者는 又傳而廣之라
故賢者嘗多謗하니 其困於下者尤甚하야 勢不足以動俗하고 名實未加於民하며 愚者易以謗하고 謗易以傳也라
어늘 足下乃欲引忌者怨者過於聽者之言
하야 縣斷賢者之是非
하니 甚不然也
로다
孔孟所以爲孔孟者는 爲其善自守하고 不惑於衆人也니
모某가 경사京師에 있을 때에 일찍이 족하足下에게 증공曾鞏이 글을 잘 짓는다고 말한 일이 있으나, 그 사람의 됨됨이에 대하여는 언급한 일이 없습니다.
강남江南으로 돌아와 비로소 친숙해져서 연모戀慕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고, 또한 글을 지어서 그의 행실行實에 대하여 대충 말한 일이 있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소문 들은 것을 가지고 증공曾鞏의 행실에 세밀하고 완숙한 아름다움이 없다고 비난하셨습니다.
그가 집에 거처할 때에 친우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 모某가 증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잘못을 고치도록 말하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기고 편당한다는 말을 듣기까지 하였습니다.
족하足下의 말씀이 참으로 과감果敢함이 있으시군요!
공鞏의 문학文學과 의론議論은 모某가 교유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에 필적할 만한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도통道統을 따르기에 용감하여, 아마도 형화刑禍나 이록利祿으로는 동요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친父親이 곤액困厄을 당하고 계실 때에 모시고 봉양하는데 흠결欠缺이 될 만한 행위가 없었고, 집안일을 하면서 일수一銖와 일발一髮 이상을 모두 직접 처리하였습니다.
부친父親 또한 그를 매우 아끼셔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종족宗族이 피폐해졌으니 의뢰할 사람은 오직 이 아이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모某가 직접 본 일이고, 족하足下께서 들으신 일 같은 것은 모某가 본 바와는 다릅니다.
공鞏이 경사京師에 있을 때에 형을 피하여 머물렀다 하는데, 이 일은 비록 모某라도 또한 그를 꾸짖어야 할 것이니, 족하足下께서 심히 공격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꾸짖는 가운데에도 동정同情하고 애긍哀矜히 여기기에 족한 것이 있으니, 다만 이를 글로 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일이 본시 증거가 있다 해도, 그런데도 마음이 족하足下께서 지적한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니니, 만약 그 마음을 따져보지 아니하고 꾸짖는다면 누구인들 꾸짖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공鞏이 남의 아우가 되어서 이렇게 한 일에 대하여는 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다만 경사京師에 있을 때에는 깊이 접촉한 일은 없고, 강남江南으로 돌아와서는 또 이미 지나간 일을 꾸짖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일찍이 이를 사리를 따져 말리지 않은 것입니다.
공鞏은 일처리에 과단성이 있고 남의 의견에 동의하는 일이 드물어 때때로 중도中道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는 강남으로 돌아왔을 때에 사리를 따져 충고한 일이 있으니, 공鞏이 듣고는 즉시 두려워하며 반성하였습니다.
공鞏은 본시 모某를 교도敎導한 일이 있으니, 그가 지은 〈회우서懷友書〉 두 통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간직하고 하나는 모某의 집으로 보내 주어서, 간절하게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이로써 뉘우칠 일에서 벗어날 것을 추구하려는 뜻을 대략 드러내었습니다.
일찍이 이르기를 붕우朋友에게 과실이 있다 하여 절교絶交해서는 안 되고, 진실로 또한 사리를 따져 충고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충고를 따르면 그만이고, 따르지 않으면 진실로 자신의 뜻을 글로 드러내어 보내 준 이후에야 그만둔다고 한 것은 아직 실천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무릇 공鞏의 행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고, 이미 지난날에 있었던 과실도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을 뿐이니, 이 정도의 일로 어찌 현자賢者가 될 수 없겠습니까.
천하에 어리석은 사람은 많고 현명한 사람은 드물며, 우자愚者는 본시 현자賢者를 기피하고, 현자賢者는 또 자신의 신조信條를 고수固守하여 우자愚者와 영합迎合하려 하지 않으므로, 우자愚者들이 더욱 원망하게 됩니다.
꺼리고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비방하지 않는 일이 없게 되니, 군자君子 중에 소문을 잘못 들은 자가 또 그것을 전하여 확대시킵니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은 늘 비방을 받음이 많고, 아랫자리에 있으면 더욱 심하게 곤고困苦를 겪게 되므로, 형세形勢가 풍속을 변화시키기에 부족하게 되고, 명분과 실제에 있어 백성들을 감화시킬 수가 없게 되며, 우자愚者들은 이를 비방하기가 쉽고, 비방은 전파되기가 쉽습니다.
무릇 공鞏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자들은 본시 그를 꺼리고 원망하며 소문을 잘못 들은 사람들입니다.
공鞏의 가형家兄이 공鞏을 친애한 일이 없다는 것도 돌이켜보건대 또한 잘못 들은 것일 뿐인데, 족하足下께서 곧 꺼리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잘 못 들은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현자賢者의 옳고 그름을 그릇되게 판단하시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중大衆이 그를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보고, 대중이 그를 미워해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하셨고,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해도 죽이는 것이 옳지 않고, 죽여야 할 죄상罪狀을 직접 본 연후에 그를 처형해야 한다.” 하셨으며,
광장匡章에 대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불효不孝하다 하였으나, 맹자께서 홀로 예로써 대한 것은 효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된 근본 원인은, 그들이 선善을 스스로 고수固守하고, 중인衆人의 주장에 미혹迷惑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인衆人의 주장에 미혹迷惑당했다면 그 또한 중인衆人의 한 사람일 뿐이니, 어찌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족하足下께서는 먼저 자중自重하시고 공鞏을 함부로 비판批判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