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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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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백이에 대한 논
行文好
문장文章이 아주 좋다.
所論伯夷處 猶未是千年隻眼이라
백이伯夷에 대하여 한 부분은 천년千年 동안 없었던 뛰어난 견해이다.
事有出於千世之前하야 聖賢辯之甚詳而明이어늘
일 가운데는 천세千世 이전에 나타난 것으로 성현聖賢이 이에 대하여 설명해놓은 것이 매우 자세하고 분명한 것도 있다.
然後世不深考之하고 因以偏見獨識으로 遂以爲說하야 旣失其本이로되 而學士大夫共守之하야 不爲變者 蓋有之矣 伯夷是已니라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깊이 따져보지 않고 편견偏見독단적獨斷的인 견해를 근거로 이를 설명하여 이미 그 본질을 그르쳤는데, 학사學士대부大夫들이 모두 이 이론理論묵수墨守하면서 바꾸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 백이伯夷에 대한 견해도 바로 이런 에 해당된다.
夫伯夷 古之論 有孔子孟子焉하니
대저 백이伯夷에 대하여 옛날에 평론한 분으로는 공자孔子맹자孟子가 계시다.
以孔孟之可信으로 而又辯之 反復不一하시니 是愈益可信也
공자‧맹자의 말씀은 신뢰할 수 있고 또 이분들이 반복하여 설명하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이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악舊惡을 원망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을 추구하여 을 얻었다.”,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굶어 죽었다.”, “은일隱逸을 일삼은 사람이다.” 하셨고,
맹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백이는 자기가 섬길 만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악인惡人이 다스리는 조정에서는 벼슬하지 않았다.”, “를 피하여 북해北海의 바닷가에서 살았다.”, “눈으로는 나쁜 을 보지 않았다.”, “못난 사람은 섬기지 않았다.”, “백대百代를 지나도 변함없이 섬겨야 할 스승이다.”라고 하셨다.
故孔孟 皆以伯夷遭紂之惡호되 不念以怨하고 不忍事之하야 以求其仁하고 餓而避하야 不自降辱하야 以待天下之淸하니 而號爲聖人耳
그러므로 공자와 맹자는 모두 백이를 주왕紂王악정惡政을 만났으나 이를 원망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고, 차마 섬길 수는 없어서 어진 왕을 찾았고 굶주리면서도 악을 피하여, 스스로 몸을 굽히거나 욕된 일을 당하지 않고, 이런 자세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렸으니,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마천司馬遷이, 무왕武王를 칠 때에 백이伯夷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말렸다고 한 것이나, 천하가 나라를 받들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절의를 지키며 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채미지가采薇之歌〉를 부르며 굶어 죽었다고 한 것이나, 한자韓子(韓愈)가 이를 근거로 하여 또한 그를 위해 을 지어서, 이자二子(伯夷와 숙제叔齊)가 없었다면 반란叛亂을 일으키는 신하臣下와 부모를 해치는 자식이 후세에 연이어 나타났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 등, 이런 견해들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夫商衰而紂以不仁으로 殘天下하니 天下孰不病紂리오마는
대저 나라가 쇠미해지면서 주왕紂王불인不仁한 행위로 천하를 해치니, 천하 사람 가운데 누구인들 그러한 를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았겠는가.
而尤者 伯夷也 嘗與太公으로 하니 當是之時하야 欲夷紂者 二人之心 豈有異邪리오
더욱 심하게 원망하고 미워한 사람이 백이伯夷여서, 일찍이 태공太公과 함께 서백西伯(周 문왕文王)이 노인들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귀부歸附하려 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를 토평하고자 하였던 두 사람의 마음이 어찌 달랐겠는가.
及武王一奮 太公相之하야 遂出元元於塗炭之中이어늘 伯夷乃不與 何哉
무왕武王이 한번 분연히 군사를 일으키자 태공太公은 그를 도와 드디어 백성들을 도탄 가운데서 구출하였으나, 백이伯夷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엇 때문이었던가.
蓋二老 所謂天下之大老 行年八十餘 而春秋固已高矣
이때에 백이伯夷태공太公 두 노인은 이른바 천하에 덕망이 높은 원로元老로서 연세年歲가 80여 세였으니, 춘추春秋가 본시 이미 높았다.
自海濱而趨 計亦數千里之遠이요 文王之興으로 以至武王之世 歲亦不下十數 豈伯夷欲歸西伯이나 而志不遂하야 乃死於北海邪
바닷가에서 문왕文王이 다스리는 도읍까지는 헤아려보건대 또한 수천 리의 먼 거리였고, 문왕文王흥기興起한 이후 무왕武王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지나간 세월이 또한 십여 년 이하는 아니었을 것이니, 어쩌면 백이가 서백西伯에게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해 바닷가에서 사망한 것이었을까?
抑來而死於道路邪
아니면 문왕을 찾아오다가 도로에서 객사한 것이었을까?
抑其至文王之都로되 而不足以及武王之世而死邪
아니면 문왕이 다스리는 도읍에 이르기는 하였으나 무왕의 시대에는 이르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었을까?
如是而言伯夷하면 其亦理有不存者也니라
백이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면, 또한 이치상理致上 무왕武王를 칠 때에는 백이가 생존해 있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且武王 倡大義於天下 太公 相而成之어늘 而獨以爲非 豈伯夷乎
또한 무왕武王이 천하에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이끌자, 태공太公이 보좌하여 이를 이루었는데, 혼자서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면 어찌 백이伯夷라 할 수 있겠는가.
天下之道二 仁與不仁也
천하의 는 두 가지뿐이니, 바로 불인不仁이다.
紂之爲君 不仁也 武王之爲君 仁也 伯夷固不事不仁之紂하고 以待仁而後出이라가 武王之仁焉 又不事之 則伯夷何處乎
군주君主 노릇하는 것은 불인不仁이고, 무왕武王군주君主 노릇하는 것은 이니, 백이伯夷는 본시 불인不仁를 섬기지 않고, 한 군주를 기다린 이후에 세상에 나오려고 하다가 무왕武王을 행하는데도 그를 섬기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백이伯夷는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였다는 것인가?
余故曰 聖賢辯之甚明이어늘 而後世偏見獨識者之失其本也라하노라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성현聖賢들이 매우 분명하게 설명해놓았는데, 후세에 편견을 가지고 독단獨斷하는 사람들이 그 근본을 훼손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嗚呼
아아!
使伯夷之不死하야 以及武王之時 其烈太公哉리오
가령 백이가 죽지 않아서 무왕이 다스리던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 공업功業을 이룬 것이 어찌 태공太公만 못하였겠는가.
역주
역주1 伯夷論 : 伯夷는 《史記》 〈伯夷傳〉에 의하면 商나라 말기 孤竹國 君主의 長子로, 孤竹君이 아우인 叔齊를 後嗣로 정하고 사망하자, 백이는 숙제에게 君位를 양보하고 도피하였다. 숙제 또한 군위를 계승하지 않고 도피하였다가, 周 武王이 商王 紂를 치자 백이‧숙제 형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를 諫하였고, 周나라가 天下를 다스리게 되자 周나라 곡식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首陽山에 숨어 살다가 끝내 餓死하였다 한다.
왕안석은 이 글에서 말고삐를 잡고 간했다는 것과 首陽山에서 餓死하였다는 것은, 後世에 捏造한 것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역주2 孔子曰……逸民也 : 《論語》 〈公冶長〉에 “伯夷叔齊 不念舊惡”이라 하고, 〈述而〉에 “(子貢)入曰 伯夷叔齊何人也 (子)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이라 하였으며, 〈季氏〉에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라 하고, 〈微子〉에 “逸民 伯夷 叔齊 虞仲 夷逸 朱張 柳下惠 少連”이라 하였다.
역주3 孟子曰……百世之師也 : 《孟子》 〈公孫丑 上〉에 “伯夷非其君不事 非其友不友 不立於惡人之朝 不與惡人言”이라 하고, 〈離婁 上〉에 “伯夷避紂 居北海之濱”이라 하였으며, 〈萬章 下〉에 “伯夷目不視惡色 耳不聽惡聲 非其君不事 非其民不使 治則進 亂則退”라 하고, 〈告子 下〉에 “居下位 不以賢事不肖 伯夷也”라 하고, 〈盡心 下〉에 “聖人 百世之師也 伯夷柳下惠是也”라 하였다.
역주4 然則司馬遷……而爲采薇之歌 : 《史記》 〈伯夷列傳〉에 “武王이 이미 殷나라의 혼란을 평정하니, 천하가 周나라를 받들었지만, 伯夷와 叔齊는 이를 부끄러이 여겨서 節義를 지키며 周나라에서 생산된 곡식을 먹지 않고 首陽山에 은둔하여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굶주려서 죽게 되자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저 서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캐도다. 사나움으로 사나움을 바꾸면서 그릇됨을 알지 못하는구나. 神農과 虞舜과 夏禹가 禪讓을 하던 시대가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니, 나는 어디로 가서 귀의할까. 아, 갈지어다. 운명이 쇠하였도다.’라 하고 드디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 及餓且死 作歌 其辭曰 登彼西山兮 採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于嗟徂兮 命之衰矣 遂餓死於首陽山]” 하였다.
역주5 韓子因之……亂臣賊子接迹於後世 : 唐나라 韓愈가 지은 〈伯夷頌〉에 이르기를 “伯夷 같은 사람은 特立獨行하여 天地가 다하고 萬世를 지나도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다. 비록 그러하나 이 두 분이 아니었던들 亂臣賊子가 後世에 연이어 일어났을 것이다.[若伯夷者 特立獨行 窮天地亘萬世而不顧者也 雖然 微二子 亂臣賊子 接迹於後世矣]” 하였다.
역주6 聞西伯善養老 則往歸焉 : 《孟子》 〈離婁 上〉에 “伯夷가 紂를 피하여 北海의 바닷가에서 살았다. 文王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흥기하여 말하기를 ‘어찌 그분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리오. 내 들으니 西伯은 늙은이를 잘 봉양하는 사람이라 하는구나.’ 하였다. 이 두 老人(伯夷와 太公)은 天下의 大老이다. 그런데 문왕에게 歸依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어버이가 문왕에게 귀의한 것이다.[伯夷避紂 居北海之濱 聞文王作 興曰 盍歸乎來 吾聞西伯善養老者 二老者 天下之大老也而歸之 是天下之父歸之也]” 하였다.
역주7 文王之都 : 文王이 商을 滅하기 위하여 周原(現 陝西省 岐山 북쪽)에서 豐(現 陝西省 西安 서남쪽)으로 遷都하였는데, 바로 그 豐을 칭하는 것이다.
역주8 : 저본에는 ‘獨’으로 되어 있는데, 龙舒本 《王文公文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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