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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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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탁지낭중을 지낸 갈공의 묘지명
以也字 爲一篇線索하야 雖段絡[落]明暢이나 而文格 卑弱矣
’字로써 문장 전체를 이끌어서, 비록 문장의 단락段落이 분명히 드러나게는 하였으나, 문장의 격조는 비루鄙陋하고 연약軟弱하다.
此體雖別爲之 終屬卑陋하니 非西京以前文格이라
이런 체재體裁가 비록 별도의 문체를 이룬 것이기는 하나 서한西漢 이전의 옛 문격文格은 아니다.
公姓也 名也 宗聖 字也
이고, 이며, 종성宗聖이다.
處州之麗水 公所生也 明州之鄞 後所遷也
처주處州여수麗水이 태어난 곳이고, 명주明州은현鄞縣이 옮겨 살았던 곳이다.
曾大考也 大考也 累贈都官郞中하니 考也
증조고曾祖考이고, 조고祖考이며, 선고先考으로 여러 차례 증직贈職되어 도관낭중都官郎中이 되었다.
進士 公所起也 洪州左司理參軍 吉州太和縣主簿 江州德化縣令 監興國茶場 威武軍節度推官 知廣州四會縣 著作佐郞 知開封府雍丘縣 秘書丞 知泉州同安縣 太常博士 通判建州 屯田員外郞 知慶成軍 都官員外郞 知南劒州 司封員外郞 祠部郞中 江浙荊湖福建廣西提點 度支郞中 荊湖北提點刑獄 此公之所閱官也
진사進士입신立身하여, 홍주洪州 좌사리참군左司理參軍, 길주吉州 태화현주부太和縣主簿, 강주江州 덕화현령德化縣令, 흥국현감다장興國縣監茶場, 위무군절도추관威武軍節度推官, 광주廣州 지사회현知四會縣, 저작좌랑著作佐郞 개봉開封 지옹구현知雍丘縣, 비서승秘書丞 천주泉州 지동안현知同安縣, 태상박사太常博士 통판건주通判建州,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 지경성군知慶成軍,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지남검주知南劍州,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 사부낭중祠部郞中 복건福建광서로廣西路제점은동갱야주전提點銀銅坑冶鑄錢, 탁지낭중度支郞中 호북제점형옥胡北提點刑獄 등이 이 역임하였던 벼슬들이다.
州將之甥 與異母兄毆人하야 而甥殺之하니 州將脅公曰 兩人者皆吾甥이요 而殺人者乃其兄也 我知之로라
주장州將생질甥姪이모형異母兄과 함께 사람을 구타하여 죽인 일이 있는데, 주장州將을 협박하기를 “두 사람이 모두 나의 생질인데 사람을 죽인 자가 그 형임을 내가 알고 있다.
彼大姓也 無爲有司所誤하라
저들은 세력이 있는 대벌족大閥族이니 담당관서에서 일을 그르침이 없도록 하라.
不然이면 此獄也將必覆하리라 公劾不爲變하니 此公之爲司理參軍也러니라
그렇지 않으면 이 안건은 반드시 번복될 것이다.” 하였지만, 이 사실대로 처단하기를 바꾸지 않았으니, 이는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州符徙吉水하야 한대 他日 令始至하니 大猾吏輒誘民數百하야 訟庭下하고 設變詐以動令하야 如此數日하니 令厭事하야 則事常在吏矣러라
에서 공문公文하달下達하여 길수현吉水縣으로 가서 현령縣令의 일을 대행代行하도록 하였는데, 그 이전에 현령이 새로 부임하자 매우 교활한 아전이 백성 수백數百 을 꾀어 관부官府의 뜰 아래서 쟁송을 하고 사건을 거짓으로 변조하여 현령縣令의 뜻을 바꾸려고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날 동안 하니, 현령이 일의 처리가 귀찮아서 처리를 항상 아전에게 맡긴 일이 있었다.
公至하야 立訟者兩廡下하고 取其狀視하니 有如吏所爲者어늘 使自書所訴하다
이 부임하여 쟁송爭訟을 했던 사람들을 복도 양쪽에 세워놓고, 그들의 죄상을 취조하면서 보니, 아전이 대신 써준 것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소장訴狀을 스스로 다시 쓰게 하였다.
不能書者 吏授之하야 往往不能如狀이어늘하니 輒曰 我不知爲此 乃某吏敎我所爲也라커늘 悉捕劾하야 致之法하니
쓰지 못하는 자는 아전이 써주어서 더러 소장訴狀에 쓴 것과 같지 않으므로 이를 추궁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는 이런 일을 알지 못했고 아전 가 우리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한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모두 체포해 심판하여 법대로 다스렸다.
訟以故少하고 吏亦終不得其意러라
쟁송爭訟이 이 때문에 줄어들었고, 아전들 또한 끝내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毛氏寡婦告其子어늘 以恩義說之호되 不得이어늘 卽使人微捕하야 得之與間語者하고 驗其對하니 乃書寡婦告者也
모씨毛氏 집의 과부寡婦가 그 자식을 고발한 일이 있었는데 은의恩義로 설득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곧 사람을 시켜서 은밀하게 사찰伺察하여, 그 여인과 비밀히 모의한 사람을 잡았고, 취조를 통하여 그가 과부의 고발장을 써준 사람임을 밝혀내었다.
窮治하니 具服爲私하야 謀誣其子孫이러라
이를 철저히 조사하니, 그 여인과 사통私通하면서 그 자손을 무고誣告하였음을 모두 자복하였다.
하고 而歲租幾千萬이라 碩舟善敗하니 民以輸爲愁어늘
고을을 관통해 흐르는 물이 사납고, 한 해에 그곳을 통과하는 세곡稅穀수천만數千萬 이었는데, 세곡을 가득 실은 배들이 자주 침몰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의 수송을 근심하였다.
公始議縣置倉以受輸하면 則官漕之亦便이라호되 州不聽이어늘 公論之不已하야 倉成하니 至今賴其利
이 처음으로 에 창고를 지어서 수송하는 곡식을 받아들이면 관곡의 수송이 편리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에서 들어주지 않자 이 계속 주장하여 드디어 창고를 짓게 되었으므로, 지금까지 그 이익을 누리고 있다.
此公之爲主簿也러라
이런 일들은 주부主簿로 있을 때의 업적이다.
擊驛吏하고 取所給한대 過家以言府호되 府不敢劾하니
중귀인中貴人역리驛吏를 구타하고 공급품을 탈취해 간 일이 있는데, 역리가 역참驛站을 지나면서 이를 관부官府하였으나, 관부에서는 감히 이를 조사하지 못하였다.
公曰 中貴人 何憚이리오
이에 이 말하기를 “중귀인中貴人이라고 어찌 꺼릴 것이 있으랴?
爲吾民이어늘 而有陵之者 吾亦恥之라하고 上書論其事하야 中貴人坐絀하니
우리 백성을 위해 일하면서, 이들을 능멸하는 자가 있다면,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하고 글을 올려 그 일을 논하니, 중귀인中貴人이 이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다.
此公之爲縣於雍丘也러라
이는 옹구현령雍丘縣令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屬吏常有隙於公同進者러니 因讒之한대 公察其旨하야 不聽하고 以爲擧首하니
속리屬吏 가운데 과 함께 벼슬에 올랐던 사람과 틈이 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함께 벼슬에 올랐던 사람이 그를 모함하자, 은 그 내용을 살펴본 후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그의 근무성적을 일등으로 매겨서 추천하였다.
此公之爲州於南劒也러라
이는 남검南劍주지사州知事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鑄錢歲十六萬하야 其所施置러니 後以爲法程하니 此公之爲銀銅坑冶鑄錢也러라
한 해에 동전 16 주조鑄造하면서 그곳에서 재량껏 쓰도록 하던 것을, 후에는 법에 따라 집행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제점은동갱야주전提點銀銅坑冶鑄錢으로 있을 때의 업적이었다.
鄂州崇陽大姓 與人妻謀而殺其夫호되 州受賕하고 出之어늘
악주鄂州 숭양현崇陽縣대벌족大閥族이 남의 처와 사통私通하고 그 남편을 살해하였으나, 에서 그의 뇌물을 받고 그를 석방하였다.
公使再劾한대 劾者又受賕하야 獄如初
이 사람을 시켜서 다시 조사하였으나, 조사하는 자가 또 뇌물을 받고 옥사獄事를 처음과 같이 처리하였다.
而公終以爲不直하니 其弟訴之轉運使하고 雖他在事者라도 亦莫不以爲寃이어늘
그러나 은 끝내 이를 바르지 않게 처리한 것으로 여겼고, 그의 아우가 이를 전운사轉運使에 호소하였으며, 비록 다른 일을 담당한 관리들이라 해도 이를 억울하게 처리되었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復置之獄하야 卒得其姦賕狀하야 論如法하니 此公之爲提點刑獄也러라
이에 다시 재판을 하여 끝내는 간사하게 뇌물을 바친 죄상을 밝혀내고 법대로 치죄治罪하였으니, 이는 제점형옥提點刑獄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公所享年也 至和元年六月乙未 卒之年月日也 潤州之丹徒縣長樂鄕顯陽村 公所葬也 嘉祐元年十月壬申 葬之年月日也
435갑자甲子(약 72년)는 이 세상에서 누린 해이고, 지화至和 원년元年(1054) 6월 을미일乙未日연월일年月日이며, 윤주潤州단도현丹徒縣 장악향長樂鄕 현양촌顯陽村안장安葬한 곳이고, 가우嘉祐 원년元年(1056) 10월 임신일壬申日안장安葬연월일年月日이다.
鄕邑孫氏 今祔以葬者 公元配也 萬年縣君范陽盧氏 公繼配也 良肱良佐良嗣 公子也 妻太常博士黃知良으로 曰金華縣君 公女也
동향同鄕 출신 손씨孫氏로 지금 합장合葬한 사람은 의 첫 번째 부인이고, 만년현군萬年縣君범양노씨范陽盧氏의 두 번째 부인이며, 양굉良肱양좌良佐양사良嗣의 아들들이고, 태상박사太常博士 황지량黃知良김화현군金化縣君의 딸이다.
起進士하야 爲越州餘姚縣尉하야 主公之喪하고 而請銘以葬者 良嗣也 論次其所得於良嗣하야 而爲之銘者 臨川王某也
진사進士진출進出하여 월주越州 여요현위餘姚縣尉가 되어 장례葬禮를 주관하고 을 지어서 부장附葬할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한 사람은 양사良嗣이고, 양사良嗣에게 들은 것을 차례로 기술記述하여 을 지은 사람은 임천臨川왕모王某이다.
銘曰
은 다음과 같다.
士窾以養交兮 官之不忌
들이 공허空虛하게 붕당朋黨을 만듦이여, 거리낌없이 공무公務를 게을리 하는도다.
維公之所至兮 樂職嗜事
오직 만이 지극하였음이여, 직분職分을 즐기며 공무公務심취心醉하였도다.
彼能顯聞兮 公則不晰이라
저들이 드날리며 명성名聲을 떨침이여, 은 빛남을 드러내지 않았도다.
不銘示後兮 孰勸爲瘁리오
을 지어 후세에 보여주지 않는다면, 누구를 진췌盡悴하도록 권면勸勉할 수 있으리오.
역주
역주1 度支郎中葛公墓誌銘 : 本文 가운데 墓主를 嘉祐 元年(1056) 10월 壬申日에 安葬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 本 墓誌銘은 이보다 오래 앞서지 않은 때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銀銅坑冶鑄錢 : 官名으로, 冶煉과 錢幣의 鑄造를 管掌하였다.
역주3 行令事 : 縣令의 직무를 代行하게 하였음을 말한다.
역주4 距州溪水惡 : 《吉安府志》에 의하면 “郡城의 남쪽에 羽溪水가 있는데, 여러 支流가 이곳에서 합쳐져서 물길이 사납다.” 하였다.
역주5 中貴人 : 궁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후대에는 오로지 宦官을 이르는 말로 쓴다.
역주6 甲子四百三十五 : 60日이 1甲子이므로, 435×60=26,100日이 되고 이를 365日로 나누면 72 남짓이 되므로, 이는 약 72년을 가리킨다.
역주7 : 저본에는 ‘馳’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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