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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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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광서전운사를 지낸 손군의 묘비
按次點綴이라
차례대로 엮어서 돋보이게 꾸몄다.
君少學問勤苦하야 寄食浮屠山中할새 步行借書數百里하고 升樓誦之而去其階러니 蓋數年而具衆經하고 後遂博極天下之書하야 屬文 操筆布紙하고 謂爲方思 而數百千言 已就하니라
은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부도산浮屠山에서 기식寄食할 적에 책을 빌리고자 수백 리를 걸어가기도 하였으며, 에 오르게 되면 그곳에 걸려 있는 시문詩文을 암기할 때까지 에 오르는 계단을 치우고 내려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수년을 지내자 여러 경서經書를 두루 이해하게 되었고, 그 후에는 드디어 천하의 전적典籍에 지극히 해박該博하여 글을 지을 적에 붓을 잡고 종이를 펴 막 생각을 다듬고 있다고 여기면, 수백數百 수천數千 문장文章을 이미 완성해놓았다.
以天聖五年 으로 補滁州來安縣主簿라가 洪州하다
천성天聖 5년(1027)에 동학구同學究 출신出身으로 저주滁州내안현주부來安縣主簿보임補任되었다가 홍주洪州우사리참군右司理參軍이 되었다.
再擧進士甲科하야 遷大理寺丞하고 知常州晉陵縣이라가 移知潯州하다
다시 진사시進士試갑과甲科로 급제하여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옮기고 상주常州 진릉현晉陵縣지사知事가 되었다가 심주潯州지사知事로 옮겼다.
潯當是時하야 人未趣學이어늘 乃改作하고 召吏民子弟之秀者하야 親爲據案講說하고 誘勸以文藝러니
이때에 심주潯州 사람들이 학문을 익히지 않자 공자孔子 사당祠堂 안의 학사學舍를 개축하고, 관리와 백성들의 자제 중에 우수한 사람을 불러들여서, 친히 의자에 앉아 강설講說을 하면서 문학文學재예才藝를 익히도록 권유하였다.
居未幾 旁州士皆來學하니 學者由此遂多하다
그렇게 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웃 고을의 선비들까지 모두 와서 배우니, 이 때문에 배우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다.
으로 通判耀州할새 兵士有訟財而不直者하니 安撫使以爲直하야 君爭之不得이어늘 乃奏決於大理한대
선주選注를 거쳐서 요주耀州통판通判이 되었을 때에, 병사兵士 가운데 재물財物에 대한 쟁송爭訟 때문에 복무服務를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안무사按撫使는 복무를 하도록 명하고 은 이를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를 대리시大理寺에서 판결해주도록 상주上奏하였다.
大理以君所爭爲是하고 而用君議하야 編於勅하다
대리시大理寺에서는 이 반대한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이의異義를 받아들여, 조정朝廷칙령勅令 에 이를 등재하였다.
慶曆二年 擢爲하야 於是 彈奏狄武襄公 不當沮敗劉滬永洛城事하고 又因日食하야 言陰盛하니 以後宮爲戒하다
경력慶曆 2년(1042)에 감찰어사이행監察御使裏行에 발탁되어서는, 유호劉滬영락성永洛城을 축성하려 한 일을 부당하게 저지한 적무양공狄武襄公을 탄핵하였고, 또 일식日食으로 인하여 음기陰氣할 것이니 후궁後宮을 경계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仁宗大獵於城南할새 衛士不及整而歸以夜러니 明日將復出할새 有雉隕於殿中이어늘
인종仁宗께서 성남城南에서 크게 사냥을 하실 때에, 위사衛士들이 대오隊伍정제整齊하지 않고 밤에 돌아갔는데, 이튿날 다시 출동하려 할 때에 꿩이 궁전 안으로 떨어지는 변고가 일어났다.
君奏疏한대 卽是夜有詔止獵하다
께서 수렵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는 를 올리자, 바로 그날 밤에 수렵을 중단하라는 칙명이 내려졌다.
蠻唐和寇湖南 以君安撫한대 奏事有所不合하야 因自劾하니 乃知復州하다
남방 오랑캐인 당화唐和호남湖南 지방을 침략했을 때에, 안무按撫하였는데 상주上奏한 일 가운데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어, 이 때문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죄를 청하니, 이에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옮기게 되었다.
又通判金州라가 知漢陽軍吉州하고 稍遷至尙書都官員外郞하고 提點江南西路刑獄하다
다시 금주金州통판通判이 되었다가 한양漢陽길주吉州지군知軍을 역임하였고, 다시 옮겨서 상서도관원외랑尙書都官員外郞이 되었다가 제점강남서로형옥提點江南西路刑獄이 되었다.
有言歲凶 當稍貴其粟이면 以利糴本者라하니 詔從之어늘 君言此非常平本意也라한대 詔又從之하다
어떤 사람이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해지게 되면 상평창常平倉에서 매입했던 곡가穀價의 본전에 이익을 붙혀서 그 곡식을 약간 비싸게 파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황상皇上께서 이를 따르려 하였는데, 이 이는 상평창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씀 올리자, 황상께서 다시 그 말을 따르셨다.
儂智高反 君卽出兵二千於嶺하야 以助英韶하다
농지고儂智高가 반란을 일으키자, 께서는 즉시 군대 2천여 명을 영남嶺南으로 출동시켜서 영주英州소주韶州의 방어를 도왔다.
會除廣西轉運使하야 馳至所部하니 而智高方煽이라
그때 마침 광서전운사廣西轉運使에 제수되어, 말을 달려 임소任所에 이르렀는데, 농지고儂智高의 세력이 대단하였다.
天子出大臣部諸將兵數萬擊之하니 君驅散亡殘敗之吏民하야 轉芻米於惶擾卒急之間하고 又以餘力으로 督守吏治城塹하고 修器械하다 屬州多完하고 而師飽以有功하니
천자께서 대신부大臣部의 모든 장병 수만數萬을 출동시켜 이를 치니, 은 도망쳐 흩어지고 쇠잔해진 이민吏民들을 이끌고 황망惶忙하고 화급火急한 때에 식량과 말이 먹을 꼴을 수송하였고, 또 남은 민력民力을 동원하고 지키고 있는 관리들을 독려하여 해자垓字를 수리하고 무기武器를 정비하였으므로, 속주屬州들 가운데 온전하게 보존된 곳이 많았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게 하는 데 을 세웠다.
君勞居多 以勞遷尙書司封員外郞하다
공로功勞가 많았으므로 그 공로 때문에 상서사봉원외랑尙書司封員外郞으로 영전하였다.
君請斬大將之北者하고 發騎軍以討賊이러니 及後賊所以破滅 皆如君計策이라
처음에 께서 대장大將 가운데 패전敗戰한 사람을 처형하고 기병騎兵을 동원하여 적을 토멸할 것을 청하였었는데, 그 후 적을 격파 멸망시킨 원인을 소급해 상고詳考해보니, 모두 께서 제안한 계책과 들어맞았다.
軍罷而人重困 方恃君綏撫하니 君乘險阻하야 冒瘴毒하고 經理出入하야 啓居無時하니라
군사들이 피곤해지고 인민은 거듭 궁곤해졌을 때에, 진정鎭定위무慰撫에 의지하였고, 께서는 험하고 막힌 곳을 오르내리면서 풍토병을 일으키는 독기毒氣를 무릅쓰고 드나들며 일을 처리하느라 편안히 쉴 틈이 없었다.
三月初七日 卒於治所하니 年五十四 官至尙書工部郞中하고 至朝奉郞이요 勳至上騎都尉하다
황우皇祐 3년 3월 7일에 임지任地에서 하시니, 향년享年이 54세였고, 벼슬이 상서공부낭중尙書工部郎中에 이르렀으며, 산관散官조봉랑朝奉郞에 이르고, 훈급勳級상기도위上騎都尉에 이르렀다.
君所爲州 整齊其大體하고 闊略其細故하며 與賓客談說 弦歌飮酒하야 往往終日호되 而能聽用佐屬하야 盡其力하니 事以不廢하니라
께서 고을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 큰 틀을 정비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은 너그러이 생략하였으며, 빈객賓客담설談說할 때에는 음주飮酒현가絃歌로 왕왕 날을 지새기도 하였지만 좌속佐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들이 힘을 다해 일할 수 있게 하니, 고을의 일이 이 때문에 중단 없이 진행되었다.
在御史言事 計曲直利害如何하고 不顧望大臣하니 以此無助러라
감찰어사監察御使언관言官의 일을 맡고 계실 때에는 일의 곡직曲直이해利害의 여하를 헤아리고, 대신大臣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니, 이 때문에 그를 돕는 사람이 없었다.
所爲文 自少及終 以類集之하야 至百卷하니 天德地業人事之治 掇拾貫穿하야 無所不言하고 而詩爲多하니라
지으신 글들을 젊어서부터 하실 때까지 문류별文類別로 모아서 100에 이르렀는데, 천덕天德지업地業인사人事의 다스림에 대하여 모아 엮어놓은 것이 일관一貫되게 관통貫通하여, 언급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그 가운데 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君諱抗이요 字和叔이니 姓孫氏
이고, 화숙和叔이며, 손씨孫氏이다.
하고 得望於富春이러니 其在黟縣 自君之高祖棄廣陵以避이요 而至君曾大父諱師睦 善治生以致富하야 歲饑 賤出米穀하야 以斗升付糴者하야 得驩心於鄕里하다
에서 을 얻었고, 부춘富春 땅에서 인망人望을 얻었는데, 고조高祖 손유孫儒을 피하여 광릉廣陵에서 이현黟縣으로 이주하였고, 증조曾祖 사목師睦께서는 생업을 잘 꾸려서 부자富者가 되었는데, 흉년凶年이 들자 미곡米穀을 싼 값으로 몇 말 몇 되씩 여러 사람에게 팔아서, 고장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大父諱旦이니 始盡棄其産하야 而能招士以敎子하다
조부祖父이니 비로소 그 재산을 다 들여 훌륭한 선비를 모셔서 자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父諱遂良이니 當終時 君始十餘歲러니
부친父親수량遂良이니 하실 때에 의 나이는 겨우 10여 세였다.
後以君故 贈尙書職方員外郞하다
부친父親의 벼슬이 연고가 되어 상서직방원외랑尙書職方員外郞추증追贈되었다.
君初娶張氏라가 又娶吳氏하고 又娶舒氏하니 封太康縣君하다
께서는 처음 장씨張氏와 혼인하셨다가 다시 오씨吳氏와 혼인하시고 다시 서씨舒氏와 혼인하셨으니, 서씨舒氏외명부外命府태강현군太康縣君해졌다.
五男子 適邈迪适遘이니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이다.
嘗從予游하야 年十四 論議著書 足以驚人이러니 終永州軍事推官하다
은 일찍이 나를 따라 공부를 하여, 나이 열넷에 논의論議하는 것과 지은 글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족하였는데, 영주군사추관永州郡事推官으로 벼슬을 마쳤다.
今潞州上黨縣令이니 亦好學能文하고
은 현재 노주潞州 상당현령上黨縣令이니, 그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을 잘 짓는다.
狀君行以求銘者 邈也
행장行狀을 지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을 지어주기를 청한 사람은 이다.
君之卒也 天子以适 試秘書省校書郞하다
께서 하실 때에 천자天子께서는 에게 시비서성교서랑試秘書省校書郞을 제수하셨다.
二女子 一嫁太廟齋郞李簡夫하고 一嫁進士鄭安平하다
딸 둘을 두었는데 한 딸은 태묘재랑太廟齋郞 이간부李簡夫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다른 한 딸은 진사進士 정안평鄭安平에게 출가하였다.
君以其卒之年十二月二十五日 葬黟縣懷遠鄕上林村하니라
하시던 해 12월 25일에 이현黟縣 회원향懷遠鄕 상림촌上林村하장下葬하였다.
歙之爲州 在山嶺澗谷崎嶇之中하야 自去五代之亂百年으로 名士大夫亦往往而出이나 然不能多也
흡주歙州라는 고을은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험준한 가운데 있어서, 오대五代을 거치면서부터 100년 동안 명사名士대부大夫가 더러 배출되기도 하였으나 많이 배출되지는 못하였다.
黟尤僻陋하야 中州能人賢士之所罕至어늘
이현黟縣은 그 가운데도 더욱 궁벽窮僻하고 누추陋醜하여 중원中原의 유능한 사람이나 어진 선비가 찾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君孤童子 徒步宦學하야 終以就立하야 爲朝廷顯用이라
그런데도 은 부친을 일찍 잃은 동자童子로서, 멀리까지 걸어다니며 과거科擧 공부를 하여 끝내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고, 조정朝廷의 높은 지위에 임용되었다.
論次終始하고 作爲銘詩하노니 豈特以顯孫氏而慰其子孫이리오
이분이 태어나서부터 할 때까지를 기술하고 이분을 위해 명시銘詩를 짓는 것이, 어찌 손씨孫氏들을 드날리게 하고 그 자손들을 위로하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乃亦以詒其鄕里로다
또한 이로써 그 향리鄕里에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銘曰
이에 다음과 같이 을 지었다.
在仁宗世하야 蠻跳不制어늘
인종仁宗께서 재세在世하셨을 때에, 남쪽 오랑캐들이 횡행하여 제어할 수 없었는데,
餽師牧民하야 實有膚使
군사軍士들을 잘 먹이고 백성들을 잘 길러서, 실로 사명使命을 잘 수행하셨고,
踐艱乘危하고 條變畫奇하야
어려움과 위태로움을 겪으시며, 변고變故분석分析하고 기이한 계책計策을 세우셔서,
瘭毒旣除하고 膏熨以治
급성 종기 같은 반란叛亂을 제거하기를, 고약을 발라 치료하듯 하셨네.
方遷旣隕하야 哀曁山夷하니
이미 궁핍해진 사람들을 옮겨서, 애긍哀矜히 여기는 마음이 산속과 평원까지 미쳤으니,
維此膚使 文優以仕
이렇게 사명使命을 원만하게 수행하였고, 문장文章은 벼슬을 하기에 넉넉하였네.
祿則不殖이나 其書滿笥하니
봉록俸祿은 늘어나지 않았지만, 그분이 지은 글은 상자에 가득 찼네.
書藏于家하고 銘在墓前이라
글은 가정에 간직하고, 은 묘소 앞에 새겨놓아서,
以告黟人하노니 孫氏之阡이라
이를 땅 사람들에게 손씨孫氏의 무덤이라고 알려주려 하노라.
역주
역주1 廣西轉運使孫君墓碑 : 이 글은 孫抗이 皇祐 5년(1053)에 사망한 이후 10여 년이 지나서 지은 것이다. 廣西는 廣南西路의 약칭으로 그 管轄區域은 지금의 廣西省과 海南省 一帶였다.
역주2 同學究出身 : 學究는 科擧시험 과목 중 하나인 明經科를 다시 세분하여 五經‧三經‧二經‧學究一經으로 나누고, 學究一經을 約해서 學究라 불렀으며, 同學究 出身이라는 것은 學究 出身과 相同하게 대우한 것을 말한다.
역주3 右司理 : 司理는 宋代에 각 州에 설치하였던 司理參軍의 略稱으로 獄訟을 관장하였다.
역주4 廟學 : 孔子의 祠堂 안에 설치한 학교를 말한다.
역주5 : 選注의 뜻으로, 吏部에서 관직에 임명할 때에 빈자리가 있으면 상응한 자격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는 자 중에서 선발함을 말한다.
역주6 監察御使裏行 : 감찰어사를 보좌하는 관원이다.
역주7 常平 : 官府에서 포목과 곡식을 비축하고 곡식 값이 지나치게 떨어지면 고가로 매입하고 지나치게 오르면 저가로 매출하여 물가의 조절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치한 常平倉을 지칭한다.
역주8 皇祐三年 : 誤記이다. 儂智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皇祐 4년이고 그때에 墓主가 생존해 있었으며, 농지고의 亂을 평정한 皇祐 5년 正月 이후에 사망하였으므로, ‘三年’을 ‘五年’으로 修正하여야 마땅하다.
역주9 散官 : 품계와 직위만 있고 일정한 직무가 없는 관직이다.
역주10 得姓於衛 : 《通志》 〈氏族略〉에 “孫氏는 衛 武公 후손이다. 武公 和가 公子 惠孫을 낳았고, 惠孫이 耳를 낳았으며, 衛의 上卿이 되어 戚을 식읍으로 받았다. 武仲을 낳았는데, 또한 孫仲이라고도 불렀으니, 祖父의 字로써 氏를 삼았기 때문이었다.[孫 衛武公之後也 武公和生公子惠孫 惠孫生耳 以爲上卿 食邑于戚 生武仲 亦曰孫仲 以王父字爲氏]” 한 말을 근거로 한 것으로, 衛나라 公子 惠孫의 字인 ‘孫’을 姓氏로 삼았다는 것이다.
역주11 孫儒之亂 : 唐末에 孫儒(?~892)가 洛陽, 鄭州, 河陽 등을 攻陷하고 자칭 절도사가 되었다가 擊殺당한 것을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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