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9. 좌반전직을 지낸 양군의 묘지명
通篇以好武一事하야 相欷歔感慨
글 전체에 군사軍事 방략方略했던 한 가지 일을 서술敍述하면서 때를 만나지 못하여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일을 탄식하며 감개해하였다.
楊闢狀其先人曰 君諱文詡 字巨卿이니
속록현束鹿縣양벽楊闢이 그 선친先親행장行狀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문후文詡이고, 거경巨卿이다.
少孤하야 鞠於世父러니 世父戰于常山할새 君始十七 能以兵入하야 得甲馬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서 백부伯父에게 양육되었는데, 백부伯父상산常山에서 거란契丹과 싸울 때에 은 겨우 17세로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적진敵陣으로 돌진하여 무기와 전마戰馬를 빼앗아왔다.
其後 世父爲峽州麻谿寨主하야 合州兵討蠻之叛者할새 君以二十五卒馳前하야 與蠻三千遇하니 蠻傳畏君勇하야 悉還走險하다
그 후 백부께서 섬주陝州마계채주麻溪寨主가 되어 고을의 군사를 모아서 오랑캐 가운데 배반한 자들을 토벌할 때에, 은 25명의 군사로 전진하여 3천 명의 오랑캐와 조우遭遇하니 오랑캐 사이에 의 용맹이 소문나서 두려워하며 모두 험지로 달아났다.
其酋據險下射하야 殺君卒幾盡이어늘 君以兩矢自下顚其酋하니 而後世父軍亦至하야 遂戡其衆以歸하다
추장酋長험요지險要地를 차지하고 활을 쏘아 이 거느린 군졸을 거의 살해하자, 이 화살 두 개로 그 추장을 쏘아 굴러 떨어지게 하였는데, 그런 후에 백부가 거느린 군사가 이르러서 드디어 그 무리를 평정하고 개선하였다.
天子賞世父一官하고 而以君屬三班爲하다
천자天子께서는 백부에게 으로 한 관등官等을 올려주고 삼반원三班院에 배속하고 전시殿侍로 삼았다.
君曾祖諱淵이요 祖諱君正이요 父諱德成이니
증조曾祖이고, 조부祖父군정君正이며, 덕성德成이다.
皆以經術敎授鄕里하고 遭五代變擾하야 皆不仕하나
모두 향리에서 경술經術을 가르쳤고, 오대五代변란變亂시기를 만나 모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君亦少敏强記하야 通五經
도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오경五經형명刑名서수書數에 통달하였다.
然負其材武하야 思一有所奮하야 成功名하니 以故爲武吏하다
그러나 무예武藝에 재능이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 한번 이 재능을 떨쳐서 공명功名을 이루기로 마음먹었고, 그 때문에 무관武官이 되었다.
稍遷하야 監睦州酒하고 由借職三遷하야 爲左班殿直하고 由睦州亦三遷하야 爲邵州武岡寨하다
조금 지나서 차직借職이 되었다가, 목주감주세睦州監酒稅가 되었고, 차직借職에서 세 차례 승진하여 좌반전직左班殿直이 되었으며, 목주睦州에서 다시 세 차례 승진하여 소주邵州 무강채武岡寨병마감압兵馬監押이 되었다.
由武岡歸京師하야 以慶曆七年二月二十九日 年七十三而卒하다
무강武岡에서 경사京師로 돌아와 경력慶曆 7년(1047) 2월 29일에 향년享年 73세로 하였다.
처음 강정康定 연간年間장상將相들이 오로五路의 군사를 동원하여 서하西夏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爲陝西招討使하니 欲君爲用이어늘
이에 과거 재상宰相을 지낸 진공공陳恭公(陳執中)을 섬서초토사陝西招討使로 삼자, 그는 임용任用하고자 하였다.
知君者皆曰 君嘗有所試하니 今其時也 勉之矣어다한대
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말하기를 ‘의 능력은 과거에 이미 시험해본 바가 있고, 지금이 바로 그 능력을 발휘할 때이니 노력하시오.’ 하였다.
君不應而辭以疾하고 顧說恭公曰
그러나 은 이에 하지 않고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진공공陳恭公을 설득하기를
吾士卒惰久矣 而數敗以恐이어늘 卒然敺之以入不測하야 戰久講勝悍强之賊하니
‘우리의 사졸士卒들이 전쟁에 대비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낸 지가 오래되었고, 여러 차례 패전하여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런 군대를 갑자기 헤아릴 수 없이 위험한 곳으로 내몰아서, 오랫동안 계획하고 있던 적과 싸워 사납고 억센 적을 이기게 하니,
愚不知計策이요 見其危而已라하니 恭公黙然이러라
어리석은 저는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알 수가 없고 그 위태로움만 보일 뿐입니다.’ 하니, 진공공陳恭公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而其後兵果不得出하다
그 후에 군대를 과연 출동시키지 못하였다.
自是 君亦老矣 更讀書하고 勸諸子以學하야 無復言兵事하다
이 일이 있은 이후 도 늙었기에 더욱 독서에 열중하고 자손들에게도 학문을 권장하며 다시는 군사軍事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方君少壯時 喜兵하야 彎弓 士莫敢伍
이 젊었을 시절에는 무술武術 닦기를 좋아하여, 활쏘기와 검술을 겨룸에 군사들 가운데 감히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然仁恕愛物하야 遇人謙謹하니라
그러면서도 어질고 관대하며 사람들을 아껴서, 남들을 대할 때 겸손하고 조심하였다.
麻谿士卒殺戮無所擇어어늘 君爲救止하야 全活甚衆하다
마계채麻溪寨에 있을 때에는 사졸士卒들이 가리지 않고 살육殺戮을 자행하였는데, 이 살육을 금지하여 구제해주어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其武岡 以恩信得諸蠻하야 蠻有嵩敍上下誠等州刺史 至呼君爲父하고 終君去토록 不爲侵竊이러라
그가 무강채武康寨병마감압兵馬監押으로 있을 때에는 은혜와 신의로 여러 오랑캐들의 신임을 얻어서, 오랑캐로서 숭주嵩州, 서주敍州상성上城 하성下城자사刺史로 있는 자들이 을 아버지라 부르기까지 하였으며, 이 임무를 마치고 떠날 때까지 침탈侵奪자행恣行한 일이 없었다.
君夫人杜氏 生三男하니 其長子早卒하고 次闢 爲大理寺丞하고 次閎이라
부인夫人두씨杜氏이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자長子는 일찍 하였고, 둘째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있으며, 셋째는 이다.
三女子 皆已嫁 其長亦早卒하다
딸 셋은 모두 이미 출가하였는데 장녀長女 또한 일찍 하였다.
夫人少君十歲 以嘉祐二年五月二十三日 卒于酸棗하니 而壽與君皆七十三이요
부인夫人보다 10세가 어렸고, 가우嘉祐 2년(1057) 5월 23일에 산조현酸棗縣에서 하니, 과 함께 모두 73세였다.
六月二日 合葬于陳州宛丘縣友于鄕彭陵原하다
6월 2일에 진주陳州 완구현宛丘縣 우우향友于鄕 팽릉원彭陵原합장合葬하였다.” 하였다.
臨川王某曰 士之以材稱於世하야 而能以義克者 少矣
임천臨川 왕모王某가 이르기를 “선비가 재능이 있다고 세상의 칭송을 받으면서, 를 고수하고 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로子路공자孔子께 배운 사람인데도 자기의 용맹을 뽐내다가 올바로 죽지 못하였는데,
君以此其材 至白首無所遇로되 而恂恂自克하야 以考厥終하고 克有名子하야 載其行治하니 其可銘이로다
은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지만, 온순溫順공근恭謹으로 자신을 완성하고, 이로써 장수長壽하고 고종명考終命하였고, 유명한 아들을 두어 그의 행위와 치적을 행장行狀등재登載할 수 있었으니, 이를 에 새겨놓을 만하도다.” 하였다.
銘曰
은 다음과 같다.
擐堅挽强하니 可扞四方이라
단단한 갑옷 입고 굳센 활 당기며, 나라의 사방을 방어하였네.
視時弛張하야 以不悖于常하니 維士之良이로다
시세時勢에 알맞게 늦추었다 당기었다 하며, 사납게 대하지 않는 것으로 법도를 삼았으니, 선비들 가운데 어진 분이셨도다!
역주
역주1 左班殿直楊君墓誌銘 : 左班殿直은 武官職이다. 本 墓誌銘은 文中에 陳執中(990~1059)의 諡號인 ‘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陳執中이 사망한 嘉祐 4년(1059) 4월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鹿 : 저본에는 ‘麓’으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3 契丹 : 宋의 北方에 契丹族이 건국하여 宋을 위협하였던 遼나라를 지칭한다.
역주4 殿侍 : 三班院에 配屬된 武官職이다.
역주5 刑名 : 戰國時代 申不害를 대표로 하는 學派로, 信賞必罰과 循名責實을 주창하였으며, 이를 刑名之學이라 하고, 略하여 刑名이라 稱하기도 하였다.
역주6 書數 : 六藝 中의 六書(文字)와 九數(數學)를 지칭한다.
역주7 借職 : 三班院에 소속된 下級 武官職이다.
역주8 兵馬監押 : 兵馬鈐轄 밑에서 屯戍, 邊防, 訓練 등을 담당한 武官職이다.
역주9 康定 : 宋 仁宗의 年號(1040~1041)이다.
역주10 將相欲五路兵攻夏 : 夏竦, 韓琦, 范仲淹 等 將軍과 宰相들이 康定 元年 겨울부터 이듬해 봄 사이에 鄜延, 環慶 등 五路의 군사를 동원하여 西夏의 李元昊를 討擊하자고 건의했던 일을 말한다.
역주11 故相陳恭公 : 慶曆 5년부터 8년간 宰相으로 있었던 陳執中을 지칭한다. 恭公이라 한 것은 그의 諡號가 恭襄이었기 때문이다.
역주12 : 저본에는 없는데 龍舒本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3 子路……然怙其勇以不得死 : 孔子의 弟子 子路가 衛나라의 大夫 孔悝의 家臣으로 있다가 衛나라 지배층의 내분에 휩쓸려서 죽은 것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15年와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이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