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록현束양벽楊闢狀其先人曰
군君諱
문후文詡요 자字거경巨卿이니
少孤
하야 鞠於世
백부父러니 世
백부父戰
于
상산常山할새 군君始十七
로 能以兵入
하야 得甲馬
하다
其後에 世父爲峽섬주州마계채주麻谿마계채주寨主하야 合섬주州兵討蠻之叛者할새 君以二十五卒馳前하야 與蠻三千遇하니 蠻傳畏君勇하야 悉還走險하다
其酋據險下射하야 殺君卒幾盡이어늘 君以兩矢自下顚其酋하니 而後世父軍亦至하야 遂戡其衆以歸하다
군정君曾祖諱연淵이요 祖諱군정君正이요 父諱덕성德成이니
然負其材武하야 思一有所奮하야 成功名하니 以故爲武吏하다
稍遷
하야 목주감주세監목주감주세睦州목주감주세酒하고 由
차직借職三遷
하야 爲
좌반전직左班殿直하고 由
목주감주세睦州亦三遷
하야 爲
소주邵州무강채武岡寨하다
由무강武岡歸경사京師하야 以경력慶曆七年二月二十九日에 年七十三而卒하다
知君者皆曰 君嘗有所試하니 今其時也라 勉之矣어다한대
吾士卒惰久矣요 而數敗以恐이어늘 卒然敺之以入不測하야 戰久講勝悍强之賊하니
愚不知計策이요 見其危而已라하니 진공공恭公黙然이러라
自是로 君亦老矣라 更讀書하고 勸諸子以學하야 無復言兵事하다
마계채麻谿士卒殺戮無所擇어어늘 君爲救止하야 全活甚衆하다
其무강채武岡에 以恩信得諸蠻하야 蠻有숭주嵩서주敍상성上하성下誠等숭주州자사刺史 至呼君爲父하고 終君去토록 不爲侵竊이러라
君夫人두씨杜氏로 生三男하니 其長子早卒하고 次벽闢은 爲대리시승大理寺丞하고 次굉閎이라
夫人少君十歲요 以가우嘉祐二年五月二十三日에 卒于산조현酸棗하니 而壽與君皆七十三이요
六月二日에 合葬우우향于진주陳州완구현宛丘縣우우향友于鄕팽릉원彭陵原하다
임천臨川왕모王某曰 士之以材稱於世하야 而能以義克者 少矣라
君以此其材로 至白首無所遇로되 而恂恂自克하야 以考厥終하고 克有名子하야 載其行治하니 其可銘이로다
글 전체에 군사軍事 방략方略에 능能했던 한 가지 일을 서술敍述하면서 때를 만나지 못하여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일을 탄식하며 감개해하였다.
속록현束鹿縣의 양벽楊闢이 그 선친先親의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군君의 휘諱는 문후文詡이고, 자字는 거경巨卿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서 백부伯父에게 양육되었는데, 백부伯父가 상산常山에서 거란契丹과 싸울 때에 군君은 겨우 17세로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적진敵陣으로 돌진하여 무기와 전마戰馬를 빼앗아왔다.
그 후 백부께서 섬주陝州의 마계채주麻溪寨主가 되어 고을의 군사를 모아서 오랑캐 가운데 배반한 자들을 토벌할 때에, 군君은 25명의 군사로 전진하여 3천 명의 오랑캐와 조우遭遇하니 오랑캐 사이에 군君의 용맹이 소문나서 두려워하며 모두 험지로 달아났다.
그 추장酋長이 험요지險要地를 차지하고 활을 쏘아 군君이 거느린 군졸을 거의 살해하자, 군君이 화살 두 개로 그 추장을 쏘아 굴러 떨어지게 하였는데, 그런 후에 백부가 거느린 군사가 이르러서 드디어 그 무리를 평정하고 개선하였다.
천자天子께서는 백부에게 상賞으로 한 관등官等을 올려주고 군君을 삼반원三班院에 배속하고 전시殿侍로 삼았다.
군君의 증조曾祖는 휘諱가 연淵이고, 조부祖父는 휘諱가 군정君正이며, 부父는 휘諱가 덕성德成이다.
모두 향리에서 경술經術을 가르쳤고, 오대五代의 변란變亂시기를 만나 모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군君도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오경五經과 형명刑名과 서수書數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무예武藝에 재능이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 한번 이 재능을 떨쳐서 공명功名을 이루기로 마음먹었고, 그 때문에 무관武官이 되었다.
조금 지나서 차직借職이 되었다가, 목주감주세睦州監酒稅가 되었고, 차직借職에서 세 차례 승진하여 좌반전직左班殿直이 되었으며, 목주睦州에서 다시 세 차례 승진하여 소주邵州 무강채武岡寨의 병마감압兵馬監押이 되었다.
무강武岡에서 경사京師로 돌아와 경력慶曆 7년(1047) 2월 29일에 향년享年 73세로 졸卒하였다.
처음 강정康定 연간年間에 장상將相들이 오로五路의 군사를 동원하여 서하西夏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과거 재상宰相을 지낸 진공공陳恭公(陳執中)을 섬서초토사陝西招討使로 삼자, 그는 군君을 임용任用하고자 하였다.
군君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말하기를 ‘군君의 능력은 과거에 이미 시험해본 바가 있고, 지금이 바로 그 능력을 발휘할 때이니 노력하시오.’ 하였다.
그러나 군君은 이에 응應하지 않고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진공공陳恭公을 설득하기를
‘우리의 사졸士卒들이 전쟁에 대비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낸 지가 오래되었고, 여러 차례 패전하여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런 군대를 갑자기 헤아릴 수 없이 위험한 곳으로 내몰아서, 오랫동안 계획하고 있던 적과 싸워 사납고 억센 적을 이기게 하니,
어리석은 저는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알 수가 없고 그 위태로움만 보일 뿐입니다.’ 하니, 진공공陳恭公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군君도 늙었기에 더욱 독서에 열중하고 자손들에게도 학문을 권장하며 다시는 군사軍事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군君이 젊었을 시절에는 무술武術 닦기를 좋아하여, 활쏘기와 검술을 겨룸에 군사들 가운데 감히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질고 관대하며 사람들을 아껴서, 남들을 대할 때 겸손하고 조심하였다.
마계채麻溪寨에 있을 때에는 사졸士卒들이 가리지 않고 살육殺戮을 자행하였는데, 군君이 살육을 금지하여 구제해주어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가 무강채武康寨의 병마감압兵馬監押으로 있을 때에는 은혜와 신의로 여러 오랑캐들의 신임을 얻어서, 오랑캐로서 숭주嵩州, 서주敍州와 상성上城 하성下城의 자사刺史로 있는 자들이 군君을 아버지라 부르기까지 하였으며, 군君이 임무를 마치고 떠날 때까지 침탈侵奪을 자행恣行한 일이 없었다.
군君의 부인夫人은 두씨杜氏이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자長子는 일찍 졸卒하였고, 둘째 벽闢은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있으며, 셋째는 굉閎이다.
딸 셋은 모두 이미 출가하였는데 장녀長女 또한 일찍 졸卒하였다.
부인夫人은 군君보다 10세가 어렸고, 가우嘉祐 2년(1057) 5월 23일에 산조현酸棗縣에서 졸卒하니, 수壽가 군君과 함께 모두 73세였다.
6월 2일에 진주陳州 완구현宛丘縣 우우향友于鄕 팽릉원彭陵原에 합장合葬하였다.” 하였다.
임천臨川 왕모王某가 이르기를 “선비가 재능이 있다고 세상의 칭송을 받으면서, 의義를 고수하고 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로子路는 공자孔子께 배운 사람인데도 자기의 용맹을 뽐내다가 올바로 죽지 못하였는데,
군君은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지만, 온순溫順과 공근恭謹으로 자신을 완성하고, 이로써 장수長壽하고 고종명考終命하였고, 유명한 아들을 두어 그의 행위와 치적을 행장行狀에 등재登載할 수 있었으니, 이를 명銘에 새겨놓을 만하도다.” 하였다.
단단한 갑옷 입고 굳센 활 당기며, 나라의 사방을 방어하였네.
시세時勢에 알맞게 늦추었다 당기었다 하며, 사납게 대하지 않는 것으로 법도를 삼았으니, 선비들 가운데 어진 분이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