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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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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3. 〈자객열전〉을 읽고
조말曹沫이 장수가 되어 인군人君을 빼앗겼다가 다시 천하天下맹주盟主겁박劫迫하여 이를 되찾은 것과, 관중管仲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당대에 신뢰를 얻고자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나는 유독 지백智伯국사國士로 예우해주었던 예양豫讓이 어찌 그 친구가 일러준 계책을 쓰지 않았는가를 괴이하게 여긴다.
讓誠國士也 曾不能逆策하야 救智伯之亡하고 一死區區 尙足校哉
예양豫讓이 진실로 국사國士였다면, 일찍이 삼진三晉의 야욕을 미리 계책을 세워 막아서 지백智伯하는 것을 구제하지 못하고, 구구하게 한 몸이 죽는 것으로 오히려 충분히 계교計較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其亦不欺其意者也니라
그러나 그는 또한 자기 마음을 속이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섭정聶政엄중자嚴仲子에게 팔려가서 원수를 제거해주고 죽었고, 형가荊軻나라 태자太子 에게 예우禮遇를 받고서 진왕秦王 을 살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此兩人者 汚隱困約之時其身하고 不妄願知하니 亦曰有待焉이로다
이 두 사람은 천민들 속에 은둔해 있으면서 곤궁하게 지낼 때에 스스로 그 몸을 귀중하게 보존하고 함부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또한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彼挾道德以待世者 何如哉
을 간직하고 시대의 추이를 기다리는 자에 비하여 어떠한가?
역주
역주1 讀刺客傳 : 本文은 《史記》 〈刺客列傳〉에 登載된 曹沫, 豫讓, 聶政, 荊軻 등의 事迹에 대하여 評論하면서 아울러 그 속에 함축된 敎育的 意義를 밝힌 것이다.
역주2 曹沫將而亡人之城……管仲因勿倍以市信一時 : 춘추시대 魯나라 장수 曹沫이 齊나라와 싸우다 패전하니 魯 莊公이 두려워서 遂邑을 齊에 바치고 講和를 청하여, 柯邑에서 齊 桓公과 會盟을 하였는데, 그때에 曹沫이 匕首를 들고 단에 올라가서 桓公에게 겨누고 遂邑을 되돌려주도록 위협하여 승낙을 받았으나, 조말이 단에서 내려오자 환공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하였다.
이에 재상 管仲이 “안 됩니다. 작은 이익을 지키려 하다가 제후들의 信賴를 잃게 되면 天下의 동조세력을 잃게 될 것이니 遂邑을 약속대로 돌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하여 수읍을 노나라에 되돌려준 일을 이른다.
역주3 予獨怪智伯國士豫讓 豈顧不用其策耶 : 國士는 나라의 훌륭한 선비이다. 春秋末 戰國初에 晉나라의 豫讓은 처음에는 范氏와 中行氏를 섬겼으나 重用되지 못하였다가 智伯인 荀瑤의 家臣이 되어서는 尊待와 寵愛를 받았다. 그 후 韓‧趙‧魏 三家가 晉을 滅하고 그 영토를 三分하여 領有하였는데, 趙襄子가 유독 豫讓이 섬기던 智伯을 미워하여 그의 해골로 술그릇을 만들어 술을 그곳에 담아 마셨다.
이에 豫讓이 姓名을 바꾸고 그 집에 잠입하여 화장실에서 기다리며 趙襄子를 刺擊하려다가 발각되어 잡혔으나 趙襄子는 그의 義氣를 높이 여겨서 풀어주었다. 이에 豫讓은 숫불을 삼켜서 목소리를 바꾸고 몸에 옻칠을 하여 나환자처럼 몸을 만든 후 다시 趙襄子를 刺殺하려 하였다.
이에 그의 친구가 권고하기를 “그대의 재능으로 趙襄子에게 몸을 맡기고 그를 섬긴다면 襄子가 반드시 가까이하고 총애하게 될 것이니, 그가 그대를 가까이하게 되면 그를 죽이기가 쉽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필이면 몸을 해치고 괴롭히면서 襄子에게 보복하려 하니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니, 豫讓이 대답하기를 “몸을 맡겨 신하가 되어 남을 섬기면서 또 그를 죽이기를 도모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서 그 군주를 섬기는 것이네. 내가 하려는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그러나 이 일을 하려는 이유는 천하 후세에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그 군주를 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네.” 하였다.
드디어 豫讓이 다리 아래에 잠복하여 지나가는 趙襄子를 刺擊하려다가 다시 실패하여 체포되었다. 이에 豫讓이 趙襄子의 옷 한 벌을 내려주면 그 옷을 찔러서 보복의 의식을 행하고 죽겠다 하니, 襄子가 이를 허락하여 襄子의 옷을 찌른 후 칼에 엎어져서 자살하였다.
豫讓이 두 차례나 趙襄子를 刺擊하려다가 사로잡히자, 趙襄子가 꾸짖기를 “그대가 과거에 范氏와 中行氏를 섬긴 일이 있지 않았는가? 智伯이 그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에는 그들을 위해 보복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智伯에게 몸을 맡기고 신하가 되었다가, 또 智伯이 죽자 그를 위해서는 보복하려 하기를 그렇게 심하게 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하자, 豫讓이 대답하기를 “臣이 范氏와 中行氏를 섬길 때에 范氏와 中行氏는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해주었으므로 나도 보통 사람이 하는 만큼 그들에게 보답하였고, 智伯을 섬김에 이르러서는 나를 國士로 禮遇해주었으므로 내가 國士답게 보답하려 한 것이오.” 하였다. 本文은 이 사실을 지칭한 것이다.
역주4 三晉 : 晉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三分하여 韓‧魏‧趙 세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三晉이라고 칭한다.
역주5 聶政 售於嚴仲子 : 聶政(?~B.C. 227)은 전국시대의 자객이고, 仲子는 韓나라의 대신인 嚴遂의 字이다. 섭정이 원수의 보복을 피해서 백정들 틈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嚴遂가 相國 俠累와 다투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달아나서, 聶政이 용감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황금 百鎰을 받들고 가서 聶政의 어머니의 長壽를 축원하며 자신의 원수를 대신 보복해주기를 청하였다. 聶政은 어머니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이를 허락하지 않다가 어머니가 사망하자 相府에 들어가 俠累를 찔러 죽이고 自殺하였다.
역주6 荊軻 豢於燕太子丹 : 荊軻(?~B.C. 227)는 전국시대 말기 자객으로 後에 燕으로 이주하여 讀書와 擊劍을 즐기며 지냈는데, 燕의 太子 丹이 그를 上卿으로 모시고 그로 하여금 秦王 嬴政을 刺殺해주기를 원하였다. 이에 荊軻는 秦에서 도망온 장수 樊於期의 머리와 秦이 願하는 督亢 지방의 地圖를 秦에 바치겠다고 하면서 地圖 속에 匕首를 감추고 가서 秦王을 刺殺하려 하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역주7 : 저본에는 ‘責’으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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