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광서廣西困於
제거병갑계동사兵이어늘 詔以
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소군蕭君으로 지계주知桂州 兼
광서도순검廣西都巡檢 제거병갑계동사提擧兵甲제거병갑계동사事한대 至則因其故俗
하야 治以寬大
하니 광서廣西遂安
하다
而君以材
로 選爲
형호남로제점형옥荊湖南路提點刑獄이러니 未幾
에 以君之信於
형호남로제점형옥南方也
로 又以君爲廣西
하다
方是時
하야 蒐兵
하고 誘聚
중국中國亡命
하야 陰以其衆窺邊境
호되 而邊吏士尙皆不寤
어늘 군君獨憂此
하야 以謂必爲南方之患
이라하야 乃選遣才辯吏
하야 說
농지고智高內屬
하다
上書言狀하고 請因以一官撫之하야 使抗교지交趾하면 且可以紓患하다
書下樞密한대 樞密以농지고智高故屬교지交趾로 納之生事라하야 以詔問君호되 能保교지交趾하야 不爭농지고智高면 농지고智高終無爲寇리니 則具以聞하라
君曰 蠻夷는 視利則動하나니 必保其往은 非臣之所能顧니이다
今中國勢는 未可以有事於蠻夷니 則如농지고智高者는 撫之而已니이다
且농지고智高才武强力하야 非교지交趾所能爭而畜也니 就其能爭이면 則蠻夷方自相攻하리니 吾乃所以間而無事리이다
君又奏請擇將吏하고 繕兵械하며 修城郭以待變하야 亦至五六호되 又皆不報하고 而君以召歸하다
농지고智高果反옹주邕州하야 殺其守將하고 出入광동廣東광서西十有一옹주州하야 所至殘破하니 吏士多走死하다
樞密乃更歸責於君하야 以지길주知吉州하니 一時士大夫紛紛欲爲君訟이나 君遂絶口無所道하니 世以此稱君長者러라
又因지계주知君智謀果可以任邊事하야 居頃之에 遂復以爲광동전운사廣東轉運使라가 又以직소문관直昭文館지계주知桂州하다
當是時하야 농종단儂宗旦聚兵농지고智高故地하야 無所屬하니 옹주邕州爲之警하야 諸將皆議興師호되 君又獨持招降之議하다
朝廷用君議하니 농종단宗旦遂釋兵服이어늘 以爲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하니 而邊無事라
於是에 君積官至尙書刑部郞中하고 以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再任하다
會蠻
反
하야 巡檢
송사요宋士堯戰死
하니 인종仁宗使中貴人出視
한대 君坐
송사요士堯死
하야 降
지강주知江州하다
而제점형옥提點刑獄因中貴人言君罪狀하니 朝廷爲置제점형옥獄이나 而君所坐止於贖金이요 諸제점형옥提點刑獄所言多無之나 然猶奪兩官以免하다
稍除무주감염주監무주감염주撫州무주감염주鹽酒호되 辭不往하고 以분사남경分司南京就第하니
諸公多欲薦起之者로되 君遂告老하고 卽以尙書祠部郞中致仕하다
初以진사進士選계양감판관桂陽監判官이라가 초주단련추관楚州團練推官하다
用擧者二十三人하야 改대리시승大理寺丞하고 지사知開封府양무현陽武영강군永康軍청성현靑城兩양무현縣 통판通判건주虔州하다
所至皆有善狀하야 推賢擧善하고 束縛姦吏하야 明而不殘하다
於財利尤能開闔斂散이라 故在광동전운사廣東에 收銅鹽課 皆倍前以十萬數러라
치평治平三年에 年六十五로 以九月十七日에 卒於家하다
初娶농서현군隴西縣君이씨李氏요 再娶팽성현군彭城縣君유씨劉氏라
子男二人이니 순洵은 원주군사추관袁州軍事推官으로 前死하고 형泂은 시비서성교서랑試秘書省校書郞하고 가어현지사知鄂원주군사추관州가어현지사嘉魚縣원주군사추관事라
女三人이니 嫁강주江州호구현주부湖口縣主簿하정신何正臣과 공주龔州사호참군司戶參軍구양성歐陽成하고 其季尙幼也라
소씨蕭氏는 故
장사인長沙人이니 군君曾祖諱
처균處鈞
은 當
時
에 爲
형주사마衡州司馬러니 以
마씨馬氏方亂
에 棄其官
하고 歸
이씨李氏임강군江남당南하야 不願仕
하니 有賜田百頃
원주袁州之
신유현新喩하다 신유현新喩後屬
임강군臨江軍이라 故今爲
임강군臨江신유현新喩장사인人하니라
祖諱소紹요 考諱세칙世則이니 皆以儒學不仕나 而考以군君故로 贈官至광록경光祿卿하다
君之疾革也에 出其奏議焚之나 其子孫所錄이 傳尙二百餘篇하니 蓋其言詳密하고 多世務之要라
四年九月二十二日에 葬君신유현新喩안화향安和鄕장선리長宣里불자강佛子岡하다 銘曰
08. 상서사부낭중 집현전수찬을 지낸 소군의 묘지명
오직 한 가지 사적事績만을 들어 기술記述하였다.
구희범區希範이 처형될 때에 광서廣西 지방이 전쟁으로 궁곤해지자, 조서詔書를 내려서 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 소군蕭君을 지계주知桂州 겸兼 광서도순검廣西都巡檢 제거병갑계동사提擧兵甲溪洞事에 임명하였는데, 부임하자 예부터 전해오는 풍속에 근거하여 관대하게 다스리니, 광서 지방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그러자 군君을 재능이 있다 해서 선발하여 형호남로제점형옥荊湖南路提點刑獄으로 삼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군君이 남방에서 신뢰를 받았다 하여 다시 군君을 광서수륙계도전운사廣西水陸計度轉運使에 임명하였다.
바로 이때에 농지고儂智高가 군사를 모아서 무리를 이끌고 중국中國으로 망명하면서, 비밀리에 그 무리를 시켜서 변경을 엿보고 있었지만, 변경의 관리와 군사들은 모두가 아직 그 저의底意를 간파하지 못하였는데, 군君만이 홀로 이를 근심하면서 반드시 남방의 근심거리가 되리라고 여겨서, 재능이 있고 변설에 능한 관리를 뽑아 보내어 농지고儂智高에게 내속內屬하도록 설득하였다.
조정朝廷에 상서上書하여 상황을 보고하면서, 그에게 벼슬 한 자리를 주어서 진무하여 그가 교지交趾에 대항하도록 하면, 근심거리를 늦출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그 건의서를 추밀원樞密院으로 내려 보내자 추밀樞密에서는 농지고儂智高가 과거에 교지交趾에 내속內屬했던 일이 있으므로 그를 받아들이면 사단事端이 일어날 것으로 여겨서, 조서詔書를 내려 군君에게 묻기를 “교지交趾를 보호하면서 농지고儂智高와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농지고儂智高는 끝내 침구侵寇하지 않을 것이니, 그 방안을 구체적으로 보고하라.” 하였다.
군君이 답변하기를 “오랑캐들은 이익을 보게 되면 움직이니, 반드시 그가 돌아가도록 보장하는 일은 신臣이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중국의 형편이 오랑캐들에게 중국을 섬기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농지고儂智高 같은 자들은 어루만져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농지고儂智高는 재능과 군사력이 강력하여 교지交趾가 그와 싸울 수 있도록 능력을 축적할 수가 없으니, 만약 싸울 수 있게 된다면 오랑캐들이 바야흐로 저희끼리 서로 공격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곧 그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무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5, 6년 동안 논쟁을 하다가 추밀樞密에서는 오히려 군君이 보고하는 글을 제대로 올리지 않았다고 하여 내쫓았다.
군君이 또 아뢰기를 “훌륭한 장수와 관리를 선발하고 무기와 병력을 보완하며 성곽을 수리하여 변고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또한 5, 6년이 지나도록 모두 이에 합당하게 처리하지 않고, 군君을 소환하여 중앙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후 농지고儂智高는 그의 예측대로 옹주邕州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그 수장守將을 살해하고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지방 11개 주州를 넘나들면서 이르는 곳마다 잔악하게 파괴하니, 관리들 중에는 달아나거나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에 추밀樞密에서는 오히려 군君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지길주知吉州로 내보내니, 당시의 사대부들이 떠들썩하게 군君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군君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 때문에 군을 훌륭한 어른이라고 찬양하였다.
또 그 일 때문에 군君의 지모智謀가 과연 변방의 일을 담당할 만하다고 알려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다시 광동전운사廣東轉運使가 되었다가, 다시 직소문관直昭文館으로 지계주知桂州가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농종단儂宗旦이 농지고儂智高가 활약했던 옛 땅에서 군사를 모아 웅거하면서 귀속하지 않으니, 옹주邕州에서 이를 경계하여 여러 장수들이 모두 군사를 일으켜서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군君만이 홀로 귀순歸順시켜서 항복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군君의 주장을 채납採納하자, 농종단儂宗旦이 드디어 병력을 해산하고 복속하였는데, 그를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으로 삼으니 변방이 무사하게 되었다.
이에 군君은 벼슬이 누적累積되어 상서형부낭중尙書刑部郎中에 이르렀고,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재임再任하게 되었다.
때마침 남방 오랑캐인 갑소태甲紹泰가 반란을 일으켜 순검巡檢인 송사요宋士堯가 이와 싸우다가 전사하니, 인종仁宗께서는 중귀인中貴人을 시켜 나가서 사태事態를 파악하도록 하였는데, 군君에게 송사요宋士堯가 전사하게 된 책임을 물어서 지강주知江州로 강임降任하였다.
그리고 제점형옥提點刑獄이 중귀인의 말을 근거로 하여 군君의 죄상罪狀을 보고하니, 조정에서 군君을 옥에 가두고 문초하였지만, 군君이 걸릴 만한 죄는 속전贖錢할 만한 일에 그칠 뿐이었고, 제점형옥提點刑獄에서 보고한 여러 일들도 사실과 다른 것이 많았으나, 그런데도 오히려 두 관직을 삭탈하여 면직시킨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주감염주撫州監鹽酒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며, 분사남경分司南京으로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재기再起하여 벼슬에 나가도록 추천하였으나, 군君은 끝내 늙었음을 이유로 은퇴하여, 이에 상서사부낭중尙書祠部郎中으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군君의 휘諱는 고固이고, 자字는 간신幹臣이다.
처음에 진사進士로서 계양감판관桂陽監判官에 선임選任되었다가, 초주단련추관楚州團練推官이 되었다.
추천하는 사람이 23인人이나 있어서,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옮겼고, 개봉부開封府의 양무현陽武縣과 영강군永康軍 청성현靑城縣 등 두 현縣의 지사知事와 건주虔州의 통판通判을 역임하였다.
훌륭한 계책을 낸 것과 도둑을 잘 잡은 업적으로 황상皇上께서 장려하는 칙서를 내리셨고, 지강주知江州로 옮겨주었다.
부임한 곳마다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유능하고 선량한 사람은 천거하고 간악한 관리는 억제하여, 고을의 질서가 밝아지고, 쇠잔해지는 일이 없어졌다.
재정財政의 이익을 도모하고, 물자의 유통과 물가의 조절 및 재정의 수입에 더욱 능력을 발휘하였으므로, 광동전운사廣東轉運使로 근무할 때에는 구리와 소금에 부과한 조세 수입이 전보다 배로 늘어서 10만萬 냥兩을 헤아리게 되었다.
치평治平 3년 65세 되는 해 9월 17일에 집에서 졸卒하였다.
초취初娶는 농서현군隴西縣君 이씨李氏이고, 재취再娶는 팽성현군彭城縣君 유씨劉氏이다.
아들이 둘인데, 순洵은 원주군사추관袁州軍事推官으로 있다가 군君보다 먼저 사망하였고, 형泂은 시비서성교서랑試秘書省校書郞을 거쳐서 악주卾州 가어현지사嘉魚縣知事로 있다.
딸이 셋인데, 강주江州 호구현주부湖口縣主簿 하정신何正臣과 공주龔州 사호참군司戶參軍 구양성歐陽成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딸은 아직 어리다.
소씨蕭氏들은 과거에 장사인長沙人이었으나, 군君의 증조曾祖인 휘諱 처균處均이 마씨馬氏가 세운 초楚나라 때에 형주사마衡州司馬가 되었다가 초楚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이씨李氏가 세운 남당南唐에 귀순하였으나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으니, 원주袁州 신유현新喩縣의 토지 100경頃을 하사한 일이 있는데, 신유新喩가 후後에 임강군臨江軍에 속하게 되었으므로 지금은 임강臨江 신유인新喩人이 된 것이다.
조부祖父의 휘諱는 소紹이고 선고先考의 휘諱는 세칙世則이니 모두 유학儒學에 종사하면서 벼슬한 일이 없으나, 선고先考는 군君이 귀해진 까닭으로 추증追贈되어 벼슬이 광록경光祿卿에 이르렀다.
군君의 병이 위독해지자 그가 기록해놓았던 주의류奏議類의 글들을 불태워 없애버렸으나, 그 자손이 기록해놓은 저술著述 200여餘 편篇은 아직 남아 있는데, 그 논리가 자상하고 치밀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데 요긴하게 쓸 만한 것들이 많다.
치평治平 4년 9월 22일에 군君을 신유현新喩縣 안화향安和鄕 장선리長宣里 불자강佛子岡에 안장安葬하였으니, 명銘은 다음과 같다.
형주사마衡州司馬이셨던 증조曾祖께서 초楚 땅을 떠나서, 이 남국南國 땅에 이르렀네.
군君이 그 땅에서 우뚝하게 일어나, 소씨蕭氏들 종족이 이에 번창하였네.
오랑캐와 접경한 지방에서 노력을 다하고, 때때로 훌륭한 계책을 올렸으나,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아, 그 때문에 변경에 근심거리가 생겼네.
모함을 받고도 원망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한 고을에 은퇴하여 편안히 지내었네.
곤궁한 가운데서도 통달하였으나, 끝내 세상에 쓰임을 받지 못하였네.
이 시詩를 유택幽宅에 새겨놓으니, 그 공덕功德 영원히 전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