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友심보深父는 書足以致其言하고 言足以遂其志하며 志欲以聖人之道爲己任하야 蓋非至於命이면 弗止也라
故不爲小廉曲謹하야 以投衆人耳目하고 而取舍進退去就를 必度於仁義라
世皆稱其學問文章行治나 然眞知其人者不多요 而多見謂迂闊하야 不足趣時合變하니
是乃所以爲심보深父也니 令심보深父而有以合乎彼면 則必無以同乎此矣리라
嘗獨以謂天之生夫人也에 殆將以壽考成其才하고 使有待而後顯하야 以施澤於天下요 或者誘其言以明先王之道하야 覺後世之民호라
孰以爲道不任於天하고 德不酬於人이어늘 而今死矣니 甚哉라
至於
양웅揚雄하야는 尤當世之所賤簡
이요 니 후파芭稱
양웅雄書以爲勝
주역周易이라하니 주역易不可勝也
니 후파芭尙不爲知
양웅雄者
로다
而人皆曰 古之人은 生無所遇合이라가 至其沒하야 久而後世莫不知라하니 若맹가軻양웅雄者는 其歿이 皆過千歲로되 讀其書하고 知其意者甚少하니
夫此兩人은 以老而終하고 幸能著書하야 書具在로되 然尙如此하니
其智雖能知맹가軻요 其於爲양웅雄에 雖幾可以無悔나 然其志未就하고 其書未具어늘 而旣早死하니 豈特無所遇於今이리오 又將無所傳於後라
天之生夫人也에 而命之如此하니 蓋非余所能知也로다
심보深父諱회回니 本하남河南왕씨王氏라 其後에 自광주光州之고시현固始로 遷복주福州之후관현候官하니 爲후관인候官人者三世라
曾祖諱某니 某官이요 祖諱某니 某官이요 考諱某니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이라
병부원외랑兵部葬潁영주州之여음현汝陰하니 故今爲여음현汝陰人하니라
심보深父嘗以진사進士로 補박주亳州위진현주부衛眞縣主簿라가 歲餘에 自免去하고 有勸之仕者면 輒辭以養母하다
於是에 朝廷用薦者하야 以爲某軍절도추관節度推官이라가 지사知진주陳州남돈현南頓縣지사事하니 書下而심보深父死矣러라
夫人증씨曾氏니 先若干日卒하고 子男一人이니 某요 女二人이니 皆尙幼라
諸弟以某年某月某日에 葬심보深父某縣某鄕某里하고 以증씨曾氏祔하다
글 전체가 허경虛景으로 자신의 감개感慨를 드러냈고 침울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 많다.
나의 친구 심보深父는, 글은 그의 말을 표현하기에 족足하고, 말은 그의 의지를 이루기에 족하였으며, 의지는 성인聖人의 도道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 천명天命을 아는 데 미치지 않으면 중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소한 청렴淸廉이나 세세한 일에 삼가는 것 따위로 중인衆人의 이목耳目을 끄는 일은 하려 하지 않았고, 취사取捨‧진퇴進退‧거취去就에 반드시 인의仁義를 기준으로 삼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의 학문과 문장과 재능과 처신을 칭찬하였지만, 그의 인물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많은 이들에게 우활迂闊해서 시속時俗에 맞추어 임기응변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바로 이 점이 심보深父의 됨됨이의 근본이니, 심보深父로 하여금 저들에게 영합하는 일이 있게 하였다면, 반드시 이와 같게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홀로 생각하기를, 하늘이 그 사람을 낼 적에, 아마도 그의 재능을 이룰 수 있을 만한 수명壽命을 줄 것이고, 재능이 이루어짐을 기다린 이후에 현달顯達함이 있게 하여 이로써 천하에 은택恩澤을 베풀며, 더러는 그의 말을 통하여 선왕先王의 도道를 밝혀서, 후세後世의 백성을 깨닫게 하기도 한다고 여겼다.
도를 하늘에서 미처 위임받지도 않았고 덕을 사람들에게 베풀지도 않았는데, 이제 사망하였으니 누가 이렇게 한 것인가. 심하도다!
맹가孟軻의 성聖스러움으로도 제자弟子들이 바란 바가 다만 관중管仲이나 안영晏嬰이 세운 업적을 기대하는 데 그쳤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양웅揚雄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 시대 사람들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고, 그의 문하門下를 출입하던 제자도 후파侯芭 한 사람 뿐이니, 후파侯芭는 양웅揚雄의 글이 《주역周易》보다도 더 낫다고 찬양하였으니, 《주역周易》보다 더 나은 글은 있을 수가 없으니, 후파侯芭는 오히려 양웅揚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옛사람 가운데는 살아서는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가, 그가 사망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는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하는데, 맹가孟軻‧양웅揚雄 같은 이들은 그들이 사망하고 모두 천 년을 지났는데도, 그들의 글을 읽고 그 뜻을 아는 자가 매우 적다.
그러니 후세에는 알게 된다고 이르는 것이, 반드시 진리眞理는 아니라고 본다.
이 두 사람은 늙어서 생을 마쳤고, 다행히 책을 지어서, 그 책이 모두 남아 있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의 지혜가 비록 맹가孟軻를 이해할 수 있었고, 양웅揚雄에 대해서는 비록 거의 대등한 경지에 도달하여 부끄러워할 것이 없었으나,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글도 갖추어놓지 못하였을 때에 이미 일찍 사망하였으니, 어쩌면 이 시대에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전할 수가 없을 듯하도다.
하늘이 그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수명을 부여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로다.
심보深父의 휘諱는 회回이니, 본래 하남河南 왕씨王氏였는데, 그 후에 광주光州의 고시현固是縣에서 복주福州의 후관현候官縣으로 옮겨서 후관인候官人이 된 것이 3대代가 되었다.
증조曾祖 휘諱 모某는 모관某官을 지냈고, 조祖 휘諱 모某는 모관某官을 지냈으며, 선고先考 휘諱 모某는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을 지냈다.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을 영주穎州의 여음현汝陰縣에 안장安葬하였으므로 지금은 여음인汝陰人이 되었다.
심보深父는 일찍이 진사進士로 박주亳州의 위진현주부衛眞縣主簿가 되었다가 1년 남짓 지나서 스스로 사임하고 물러났으며,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모친의 봉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는 치평治平 2년(1065) 7월 28일에 졸卒하였는데, 향년享年이 43세였다.
이때에 조정에서 추천하는 자가 있어서 모군某軍의 절도추관節度推官으로 삼았다가 진주陳州 남돈현南頓縣의 지사知事에 임용되었으니, 임명장이 내려갔을 때는 심보深父가 이미 사망한 후였다.
부인夫人 증씨曾氏는 약간 먼저 졸卒하였고, 아들이 하나인데 모某이고, 딸이 둘인데 모두 아직 어리다.
여러 아우들이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심보深父를 모현某縣 모향某鄕 모리某里에 안장安葬하였고, 증씨曾氏를 합장合葬하였다.
오직 덕행德行을 자임自任하여, 이로써 선인先人의 업적을 계승하였네.
옛 도道는 아득하게 멀어서 따르기 어려웠으나, 반드시 좇아서 취取하기에 힘썼네.
사람들이 나를 임용할 줄 몰랐으나, 또한 나를 모멸하지는 못하였네.
혼령이 장차 이곳에 돌아오리니, 이 땅에 육신肉身이 묻혔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