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양鄱陽處
태상박사士 贈
대리평사大理評事 황군黃君諱某之妻
로 는 今
태상박사太常博士손巽之母也
라
年若干의 以가우嘉祐五年十一月乙酉終하고 而以後年十一月丙子에 從其夫葬파양鄱陽장순리長順里之西原하다
葬若干年에 而태평현군太태평현군君之子所與游者 임천臨川왕모王某는 表其墓曰
及嫁하야 移所以事父於舅하야 而致其禮有加焉하고 凡在舅黨者에 無不禮也하며
移所以事母於姑하야 而致其愛無損焉하고 凡在姑黨者에 無不愛也하다
其後태군太君之子 以進士起하야 爲聞人하니 而州之士大夫皆曰 是母非獨能敎라 亦其爲善也하니 宜有子로다하니라
初에 其子爲태평현위尉於선주宣州之태평현위太平하고 又녹사참군參건주虔州녹사참군錄事에 皆欲迎태군太君以往한대 태군太君曰 吾助汝父享祠春秋於此니 義終不得獨往이라하다
及爲남검주南劒남검주州순창현령順昌縣令이라가 지사知홍주洪州신건현新建縣지사事에 而處士君已不幸이라
乃曰 吾老矣니 今而後에 可以從子라하니 故其終이 在신건현新建其子之官寢하니라
태군太君生一男二女하니 男卽박사博士요 女皆已嫁로되 其幼蚤卒하고 其長者는 少喪其配하고 事姑以孝聞而不嫁하니
州之士大夫又皆曰 是母能敎는 非獨施於其一男而已라 蓋其女子亦母之力也라하니 嗚呼라
잠자리가 날면서 꼬리로 물을 살짝 쳐서 잔잔한 물결이 이는 것과 같은 수법手法으로 지었다.
파양鄱陽의 처사處士로 대리평사大理評事에 추증追贈되었던 황군黃君 휘諱 모某의 아내로서 태평현군太平縣君 파양鄱陽 이씨李氏는 현재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있는 손巽의 모친母親이다.
연세가 모세某歲일 때인 가우嘉祐 5년 11월 을유일乙酉日에 생生을 마쳤고, 이듬해 11월 병자일丙子日에 부군夫君을 따라 파양鄱陽 장순리長順里의 서쪽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하장下葬한 뒤 몇 해가 지나서 태평현군太平縣君의 아드님과 교유하였던 임천臨川 왕모王某가 그분의 무덤 위에 세울 묘표墓表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태군太君은 처녀시절에 부모를 잘 섬겨서 향리鄕里에 소문이 났었다.
출가出嫁를 하자 친정 아버님을 섬겼던 방법 그대로 시아버님을 섬기면서 그 예禮를 더욱 극진히 하였고, 시아버님의 친족들에게도 예禮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친정 어머님을 섬겼던 방법 그대로 시어머님을 섬기면서 그 애모愛慕를 극진히 하여 손색이 없게 하였고, 시어머님의 친족들에게도 애모愛慕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남편을 바르게 도우면서 순종順從하였고, 그 자식들을 의리義理에 맞게 가르치면서 자애慈愛로웠다.
시아버님이신 처사군處士君이 일찍이 장가를 들어 자식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살피고 대우하기를 자기의 아들과 다름이 없게 하였다.
그 후 태군太君의 아들이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니, 고을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의 모부인母夫人께서 다만 잘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착한 일을 하였으니, 그런 아들을 둠이 마땅하다.” 하였다.
처음 그 아드님이 선주宣州의 태평현위太平縣尉가 되었다가 다시 건주虔州의 녹사참군錄事參軍이 되었을 때에 번번이 태군太君을 모시고 가려 하였는데, 태군太君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아버님이 이곳에서 춘추春秋로 선대先代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을 도와야 하니, 의리상 끝까지 홀로 따라갈 수가 없다.” 하였다.
남검주南劍州 순창현령順昌縣令이 되었다가 홍주洪州 신건현新建縣의 지사知事가 되었을 때에는, 처사군處士君께서 불행히도 이미 서거逝去하셨는데,
그제야 말씀하시기를 “내가 늙었으니, 이제는 자식을 따라갈 수가 있겠다.” 하였으니, 그 때문에 신건현新建縣의 그 아드님 관사官舍에서 생을 마치게 된 것이다.
태군太君께서는 1남男 2여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사博士이고, 딸은 이미 모두 출가出嫁하였으나,막내 딸은 일찍 사망하였고, 맏딸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시어머님을 효성으로 섬긴다고 소문이 났으며, 수절守節하고 개가改嫁를 하지 않았다.
이에 고을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어머님께서 잘 가르치는 일을 다만 그 한 아들에게 행하는 데 그쳤을 뿐만 아니라 그 딸의 처신이 훌륭한 것도 어머님이 잘 가르치신 덕이다.” 하였으니,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