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중씨仲氏요 諱눌訥이요 자字박옹樸翁이니 광제군廣濟軍定陶人이라
曾祖諱
환環이요 祖諱
조祚니 皆弗仕
라가 而至君父諱
윤尹始仕
하야 至
조주관찰지사曹州하야 贈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하다
君
元年進士
하야 起家
막주방어추관莫州防禦推官하니 年少初
막주방어추관官이나 然上下無敢易者
러라
時傳거란契丹이 且大擾邊하니 朝廷使中貴人來問한대 막주지사知막주지사州장숭준張崇俊未막주지사知所對어늘 公策거란契丹無他하야 爲具奏論之하다
又권박주방어판관權博州防禦判官하야 以母夫人喪去라가
去三年에 復권명주절도추관權明州節度推官하다 縣送海賊數十人하야 獄具矣어늘 君獨疑而辨之하야 數十人者皆得雪하다
用擧者改대리시승大理寺丞이라가 지사知대명부大名府청평현淸平 공주邛州임계현臨溪兩청평현縣하고 又해주통판通判해주통판解州하다
於是
에 三遷爲
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이라가 而以
五年十二月二十一日卒
하니 年五十五
러라
君厚重有大志하야 不妄言笑하며 喜讀書하고 爲古文章이러니 晩而尤好爲시詩하야 시詩尤稱於世하다
所在有聲績이나 然直道自信하야 於權貴人에 不肯有所屈이라 故好者少나
此流俗所羞하야 以爲迂而弗言者也니 非明於先王之義則孰知리오
君知此矣니 則其自信不屈은 宜以有所負而然이어늘 惜乎라 其未試也로다
君初
재취부인娶왕씨王氏하니 상서우부원외랑尙書蘭之女
요 又
재취부인娶이씨李氏하니 상서우부원외랑尙書虞部員外郞송경宋卿之女
라
三男子니 백달伯達은 爲태상박사太常博士요 次백달伯适백동伯同은 爲진사進士라
三女子니 嫁전중승殿中丞임유任庾와 병주幷州교성현위交城縣尉최강崔絳과 흥원부興元府호조참군戶曹參軍임응任膺이라
태상박사博士以
元年十一月二十一日
에 葬君於
정도定陶之
민구향閔丘鄕하고 而以余之聞君也
로 來求銘
하다
그의 기운氣韻이 저상沮喪되었던 부분을 유념해 보아야 한다.
군君의 성姓은 중씨仲氏이고, 휘諱는 눌訥이며, 자字는 박옹樸翁으로, 광제군廣濟軍 정도인定陶人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환環이고, 조부祖父의 휘諱는 조祚이니, 모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가 군君의 부친父親 휘諱 윤尹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하여 조주관찰지사曹州觀察支使를 역임하였고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군君은 경우景祐 원년元年(1034)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첫 벼슬로 막주방어추관莫州防禦推官을 지냈는데, 나이가 어린데다가 처음 하는 벼슬이었지만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때에 거란契丹이 국경지대를 크게 어지럽힌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조정朝廷에서 궁중宮中의 환관宦官을 보내어 사태를 파악하려 하였는데, 막주지사莫州知事인 장숭준張崇俊이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니, 공公이 ‘거란무타契丹無他’라는 계책을 내어서, 구체적으로 아뢰고 설명하였다.
이에 장숭준張崇俊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반드시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또한 내가 군君의 계책을 잘 들어주었음을 당연히 좋게 여길 것이다.” 하였다.
그 후 권박주방어판관權博州防禦判官이 되었으나, 모부인母夫人의 상喪 때문에 물러났다.
물러난 지 3년 만에 다시 권명주절도추관權明州節度推官이 되었는데, 속현屬縣에서 해적海賊 수십數十 인人을 압송押送하면서 죄상罪狀을 갖추어 보고하였으나, 군君은 홀로 이를 의심하고 다시 조사하여 수십數十 인人이 모두 풀려날 수 있었다.
추천한 자가 있어서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옮겼다가 대명부大名府 청평현淸平縣과 공주邛州 임계현臨溪縣 등 두 현縣의 지사知事를 역임하고, 다시 해주통판解州通判이 되었다.
이에 세 번 벼슬을 옮겨서 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이 되었다가 황우皇祐 5년 12월 21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55세였다.
군君은 중후重厚한 품격品格에 큰 뜻을 지녀, 말하고 웃기를 함부로 하지 않았고, 글 읽기를 좋아하고 고문古文을 잘 지었는데, 만년晩年에는 시詩 짓기를 더욱 좋아하여 시詩를 잘 짓는 것으로 더욱 세상의 칭찬을 받았다.
벼슬했던 곳마다 업적을 남겨서 명성을 얻었으나, 자신이 믿는 바를 곧바로 행하고 권귀權貴들에게 굽히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가 월촉越蜀에 있을 때에는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르며 배웠다.
보원寶元과 강정康定 연간年間에는 건의하는 자들이 국방에 관하여 논하기를 좋아하였으나 그들이 주장한 계책은 공격과 수비의 방책에 지나지 않았는데,
군君만은 유독 《서경書經》에 이른바 “농시農時를 잃지 않게 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멀리 있는 오랑캐를 회유하면 가까이 있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며, 후덕厚德한 정사政事로 백성을 이끌고 내치기 어려운 아첨꾼을 멀리 내쫓으면, 사방의 오랑캐들이 서로 이끌고 와서 복종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바탕으로 하여 〈어융의禦戎議〉 두 편篇을 지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속인俗人들이 부끄러워했던 것으로서, 우활迂闊하다고 여겨서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었으니, 선왕先王의 뜻을 밝게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대저 중국中國이 안정되고 부유해지고 강력해지고 존경받을 수 있는 방안이 반드시 여기에서 나온다.
군君이 이것을 알았으니, 스스로 이를 확신하고 굽히지 않은 것은, 마땅히 자부自負함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데도, 그 계책을 시험해볼 기회가 없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군君의 초취부인初娶夫人은 왕씨王氏로 상서가부낭중尙書駕部郎中 란蘭의 따님이고, 재취부인再娶夫人은 이씨李氏로 상서우부원외랑尙書虞部員外郞 송경宋卿의 따님이다.
아들이 셋인데, 백달伯達은 태상박사太常博士이고 다음 백적伯適과 백동伯同은 진사進士이다.
딸도 셋인데, 전중승殿中丞 임유任庾와 병주幷州 교성현위交城縣尉 최강崔絳과 흥원부興元府 호조참군戶曹參軍 임응任膺에게 출가出嫁하였다.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있는 아들이 희령熙寧 원년元年(1068) 11월 21일에 군君을 정도定陶의 민구향閔丘鄕에 안장安葬하고, 내가 군君과 알고 지낸 사이이므로, 찾아와서 명銘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하늘이 좋은 자질 주었으나 인세人世의 운명은 험난하였네.
아름다운 명성名聲을 드날렸으나, 시대의 곤돈困頓을 겪으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