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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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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광서전운사를 지낸 소군의 묘지명
感慨中有法度
감개한 가운데 법도가 있다.
慶曆五年 河北都轉運使 龍圖閣直學士 信都歐陽脩 以言事切直으로 爲權貴人所怒러니 因其孤甥女子有獄하야 誣以姦利事하다
경력慶曆 5년(1045)에 하북도전운사河北都轉運使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신도현개국자信都縣開國子 구양수歐陽脩직간直諫한 말 때문에 권세權勢 있고 지위地位 높은 사람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는데, 그 생질녀甥姪女옥사獄事가 있자 이를 근거로 하여, 구양수가 간사하게 이익을 추구하였다는 일로 무고誣告를 하였다.
天子使三司戶部判官 太常博士 武功蘇君與中貴人雜治하니
이에 천자天子께서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태상박사太常博士 무공현지사武功縣知事소군蘇君에게 궁중宮中의 지위 높은 환관宦官과 함께 이를 치죄治罪하게 하였다.
當是時하야 權貴人連內外諸怨惡修者하야 爲惡言欲傾修하니 銳甚이라
이때를 당하여 권귀인權貴人이 궁중 안팎에서 구양수에 원한을 품고 있거나 싫어하는 자들과 연통聯通하여 모함謀陷하는 말을 꾸며서 구양수를 무너뜨리고자 하니, 그 기세가 매우 날카로웠다.
天下洶洶하야 必修不能自脫이러라
이에 천하天下 사람들이, 구양수는 반드시 이에 걸려들어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蘇君卒白上曰 修無罪하니
이때에 소군蘇君이 마침내 께 아뢰기를 “구양수는 죄가 없습니다.
言者誣之耳한대 於是 權貴人大怒하야 誣君以不直하야 絀使爲殿中丞 泰州監稅하다
말한 사람이 무고誣告한 것일 뿐입니다.” 하니, 이에 권귀인權貴人이 크게 노하여 정직正直하게 하지 않았다고 무고誣告하여, 전중승殿中丞 태주감세泰州監稅로 쫓아냈다.
然天子遂寤 言者不得意하고 而修等皆無恙하니 蘇君以此 名聞天下하다
그러나 천자께서 드디어 진상眞相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모함한 사람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구양수 등은 모두 탈이 없게 되었으며, 소군蘇君은 이 일 때문에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嗟乎
아아!
以忠爲不忠하고 而誅不當於有罪 人主之大戒
충신忠臣불충不忠하다 하고, 를 주기에 합당하지 않은 이에게 징벌懲罰을 가하는 것은 군주君主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로다!
然古之陷此者相隨屬 以有左右之讒하고 而無如蘇君之救 是以卒至於敗亡而不寤
그러나 예부터 이런 모함에 걸려든 자가 연이었던 것은 좌우左右에 있는 근신近臣들의 참소讒訴가 있었고, 소군蘇君처럼 이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며, 군주君主가 이 때문에 패망敗亡에 이르러도 깨닫지를 못해서였던 것이다.
然則蘇君一動 其功於天下 豈小也哉
그러니 소군蘇君의 이 행동 하나가 천하에 끼친 공이 어찌 작다 할 수 있겠는가.
蘇君旣出逐 權貴人更用事하야 凡五年之間 再赦而君六徙하야 東西南北水陸奔走輒萬里로되 其心恬然하야 無有怨悔러라
소군蘇君축출逐出당한 이후 권귀인權貴人이 다시 국권國權을 휘두르게 되었고, 무릇 5년 사이에 두 차례나 사면령赦免令을 내렸지만, 은 여섯 차례나 벼슬을 옮기면서 동서남북東西南北 수륙水陸으로 만리萬里를 분주하게 떠돌아다녔으나, 그의 마음은 평온하였고 원망이나 후회를 하는 일이 없었다.
遇事强果하야 未嘗少屈하니 殆蘇君矣로다
일을 처리하게 되면 과감하게 용단을 내리고 조금도 굽히는 일이 없었으니, 대체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굳건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마도 소군蘇君 같은 이를 이르는 것이리라.
蘇君之仁與智 又有足稱者하니
소군蘇君인자仁慈함과 지혜智慧로움은 또한 칭찬 받기에 충분함이 있다.
嘗通判陝府하야 邊告急하니 樞密使使取道路戍還之卒하야 再戍儀渭하다
일찍이 섬주陝州 치소治所통판通判으로 있을 때에 갈회민葛懷敏반적反敵 원호元昊와의 전투에 패전하여 변방邊方에서 위급을 고하니, 추밀사樞密使도로道路를 지키다가 퇴각하여 돌아오는 군졸들을 거두어 다시 의주儀州위주渭州를 지키도록 명하였다.
於是 延州還者千人至陝이라가 聞再戍하고 大怨卽讙하야 聚謀爲變이라
이에 연주延州에서 퇴각한 군졸 천 명이 섬주陝州에 이르렀다가, 다시 을 막으라는 말을 듣고 크게 원망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떼로 모여서 변란變亂을 일으키기를 도모하였다.
吏白閉城하고 城中 無一人敢出이어늘 君徐以一騎出卒間하야 諭慰止之하고 而以便宜還使者하니
이에 관리官吏성문城門을 닫고 이들을 막자고 건의하였고, 성안의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감히 나가서 이들을 진무鎭撫하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필마단기匹馬單騎군졸軍卒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위로하고 설득하여 소요騷擾를 그치게 하고, 일을 정황에 맞게 처리하면서 사자使者에게 이를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戌卒喜曰 微蘇君이런들 吾不得生이라하고 陝人亦曰 微蘇君이런들 吾其掠死矣리라하다
이에 퇴각해 돌아왔던 수졸戍卒들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소군蘇君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고, 섬주陝州 사람들도 말하기를 “소군蘇君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퇴각한 군졸들의 노략질에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有令刺陝西之民以爲兵하고 敢亡者死러니
섬서陝西의 백성들은 얼굴에 문신을 하여 군인임을 표하게 하고, 감히 도망친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는데,
旣而亡者得하야 有司治之以死한대 君輒縱去하고 而言上曰
그 후 도망자를 잡게 되어 담당 관서에서 사형에 처하려 하자, 이 즉시 이 사람을 풀어주고 에게 건의하기를
令民以死者 爲事不集也어늘 事集矣로되 而亡者猶不赦 恐其衆相聚而爲盜하노이다
“도망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명한 것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는데, 이제 일이 이루어졌는데도 도망자를 사면赦免하지 않는다면, 그 무리들이 떼로 모여서 도둑이 될까 두렵습니다.
惟朝廷幸哀憐愚民하야 使得自反이니이다 天子以君言爲然하야 而三十州之亡者皆不死하다
오직 조정에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애긍哀矜히 여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수하고 돌아올 수 있게 하십시오.” 하니, 천자天子께서 의 건의를 옳게 여기셔서 30 에서 도망쳤던 군졸들이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其後知坊州할새 州稅賦之無歸者 里正代爲之輸하니 歲幣(弊)大家數十이어늘
그 이후 방주지사坊州知事가 되었을 때에, 부세賦稅를 납부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이정里正이 이를 대신 납부하도록 하니, 매년 파산한 대가大家가 수십 가였다.
君悉鉤治하야 使歸其主하니 坊人不憂爲里正 自蘇君始也러라
이에 이 이를 모두 자세히 조사하여 대신 납부한 것을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자, 방주坊州 사람들이 이정里正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소군蘇君지사知事가 되고부터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蘇君諱安世 字夢得이라
소군蘇君안세安世이고, 몽득夢得이다.
其先武功人이니 後徙蜀이라가 蜀亡하야 家于京師하니 今爲開封人也
선조先祖무공인武功人이었는데, 후촉後蜀으로 옮겼다가 후촉後蜀하자 우리 나라로 귀의歸依하여 수도首都에서 살았으므로 지금은 개봉인開封人이 되었다.
曾大考諱進之 率府副率이요 大考諱繼 殿直이요 考諱咸熙 贈都官郞中하다
증조고曾祖考진지進之이고 솔부부솔率府副率을 역임하였으며, 조고祖考이고 전직殿直을 지냈고, 선고先考함희咸熙도관낭중都官郞中증직贈職되었다.
君以進士起家三十二年이요 其卒年五十九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집안을 일으킨 지 32년이 되는 59세에 하였다.
爲廣西轉運使하고 而官止於屯田員外郞者 以君十五年不求일새라
광서전운사廣西轉運使를 지내었고, 관등官等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에 그친 것은, 이 한 자리에서 일정기간 근무하면 등급이 올라 옮겨가는 마감磨勘제도의 적용을 15년 동안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君娶南陽郭氏하고 又娶淸河張氏하니 爲淸河縣君이라
남양南陽 곽씨郭氏와 혼인하였고, 다시 청하淸河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장씨張氏청하현군淸河縣君해졌다.
子四人이니 台文 永州推官이요 祥文 太廟齋郞이요 炳文 試將作監主簿 彦文 未仕하다
아들이 넷인데, 태문台文영주추관永州推官이고, 상문祥文태묘재랑太廟齋郞이며, 병문炳文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이고, 언문彦文은 아직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女子五人이니 適進士會稽江崧 單州魚臺縣尉江山趙揚하고 三人尙幼
딸이 다섯인데, 진사進士회계인會稽人 강숭江崧단주單州 어대현위魚臺縣尉강산인江山人 조양趙揚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셋은 아직 어리다.
君旣卒之三年 嘉祐二年十月庚午 其子葬君揚州之江都東興寧鄕馬坊村하고
한 지 3년 되는 가우嘉祐 2년(1057) 10월 경오일庚午日에 그 아들이 양주揚州강도江都 동쪽 흥녕향興寧鄕마방촌馬坊村안장安葬하였다.
而太常博士 知常州軍州事 臨川王某 爲銘曰
태상박사太常博士 지상주군주사知常州軍州事 임천臨川 왕모王某는 다음과 같이 을 쓴다.
皇有四極하야 周綏以福이라
상천上天사극四極이 있어, 두루 을 내려 안정시키고자,
使維蘇君하야 이라
이에 소군蘇君으로 하여금 우리의 남복南服 땅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였네.
蘇君 不圜(圓)其方하고
선량善良소군蘇君이 원만하지 못한 지방을 방정方正하게 하였고,
不晦其明하니 君子之剛이라
밝은 지혜로 어두움을 제거하니, 군자君子강건剛健함을 드러낸 것이네.
其枉在人호되 我得吾直하니
타인他人에게 굽음이 있어도, 나는 곧음을 고수하였으니,
誰懟誰慍 祇天之役이라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노여워하였으랴, 천자天子을 공경히 따를 뿐이었네.
日月有丘 其下冥冥이라
해와 달이 언덕을 비추지만, 그 아래의 유택幽宅은 어둡고 어둡네.
昭君無窮하야 安石之銘이라
의 업적 무궁토록 밝히고자, 이에 안석安石을 지었네.
唐荊川曰 此等誌文 獨荊公有之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이런 묘지명은 오직 형공의 글에만 있는 것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廣西轉運使蘇君墓誌銘 : 墓主 蘇君은 蘇安世를 지칭하며, 本 墓誌銘은 嘉祐 2년(1057) 10월 前後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孔子所謂剛者 : 《論語》 〈公冶長〉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剛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하시니, 어떤 사람이 대답하기를 ‘申棖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棖은 情欲이 많으니 어찌 剛하다 할 수 있으리오.[子曰 吾未見剛者 或對曰 申棖 子曰 棖也欲 焉得剛]’ 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역주3 葛懷敏之敗 : 慶曆 2년(1042) 葛懷敏이 涇原路副都摠管 兼 招討經略按撫副使가 되어 反軍 元昊와 싸우다가 定川寨에서 敗戰하여 戰死한 것을 말한다.
역주4 磨勘 : 《宋史》 〈選擧志 考課〉편에 의하면, 어떤 벼슬에 있은 지 3년이 되면 審官院에서 성적을 考課하여 벼슬을 옮기는 제도를 磨勘이라 하였다.
역주5 奠我南服 : 奠은 安定시킨다는 뜻이고, 南服은 王畿 밖의 매우 먼 남쪽 지방을 말한다.
역주6 元元 : 저본에 ‘亢亢’으로 되어 있는데,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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