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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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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曰
朕欲得卿直言之하니 勿有所隱하라
朕功不高耶
高矣니이다
德未厚耶
曰 厚矣니이다
華夏未安耶
曰 安矣니이다
遠夷未慕耶
曰 慕矣니이다
符端未至耶
曰 至矣니이다
年穀未登耶
曰 登矣니이다
然則何爲不可
對曰 陛下功高矣 民未懷惠하고 德厚矣 澤未旁流하고 華夏安矣 未足以供事注+供, 平聲, 後同.하고 遠夷慕矣 無以供其求하고 符端雖臻이나 而罻羅猶密注+罻, 音蔚.하고 積歲豊稔이나 而倉廩尙虛하니 此臣所以切謂未可니이다
臣未能遠譬하니 且借近喩於人하리이다
有人長患疼痛하여 不能任持라가 療理且愈 皮骨僅存이어늘 便欲負一石米하여 日行百里하면 必不可得이니이다
隋氏之亂 非止十年이어늘 陛下爲之良醫하사 除其疾苦하시니 雖已乂安이나 未甚充實이어늘 告成天地 臣竊有疑니이다
且陛下東封注+謂東封泰山也, 在今泰安州. 萬國咸萃하여 要荒之外注+要, 平聲. 要服‧荒服, 蠻夷之地也. 莫不奔馳니이다
今自伊洛之東으로 曁乎海岱注+岱, 泰山也.萑莽巨澤 茫茫千里 人烟斷絶하고 鷄犬不聞하며 道路蕭條하여 進退艱阻하니 寧可引彼戎狄하여 示以虛弱이리잇가
竭財以賞이라도 未厭遠人之望注+厭, 音淹, 足也.이요 加年給復이라도 不償百姓之勞 或遇水旱之災 風雨之變하여 庸夫邪議하면 悔不可追니이다
豈獨臣之誠懇이리잇가
亦有輿人之論이니이다
太宗稱善하고 於是乃止注+, 是年正月, 文武官請封禪, 上曰 “卿輩皆以封禪爲帝王盛事, 朕意不然, 若天下乂安, 家給人足, 雖不封禪, 庸何傷乎. 昔秦始皇封禪, 漢文帝不封禪, 後世豈以文帝之賢不及始皇耶. 且事天掃地而祭, 何必登泰山之巓, 封數尺之土, 然後可以展其誠敬乎.” 群臣猶請之不已, 上亦欲從之, 魏徵獨以爲不可云云. 會河南北數州大水, 事遂寢.하다
【集論】孫氏甫曰
封禪之文 不著於經典하니 하여 以爲帝王盛德之事 無大此禮
故秦皇漢武行之한대 儀物侈大하여 自謂光輝無窮이라
然封禪之後 災異數至하고 天下多事
蓋繁費生靈하여 干動和氣所致 則崇尙此禮 惡足以當天意哉리오
況此禮不著於經典也
司馬遷 作封禪書하여 引經典之文이나 但巡守之禮耳
帝王 巡守하여 每至하면 必燔柴以告至하니 非謂自陳功於天也
帝王 治天下 能以功德濟生民하여 致時太平하면 則天必佑之以永久之福이라
之禮 足伸其報어늘 何待自告其功也리오
太宗 嘗謂事天至敬하여 掃地而祭 何必登山封土리오하니 此實至論이라
范氏祖禹曰
古者 天子巡守하여 至于方岳하면 必告祭하나니 所以尊天而懷柔百神也
後世學禮者 失其傳이어늘 而諂諛者爲說하여 以希世主하여 謂之封禪하니 實自秦始 古無有也
且三代 不封禪而王하고 封禪而亡하니 不法三代而法秦하여 以爲太平盛事하면 亦已謬矣
太宗方明하고 朝多賢이로되 而佞者 猶倡其議하고 獨魏徵 以爲時未可 而亦不以其事爲非也
其後 使顔師古議其禮하고 玄齡裁定之할새 徵亦與焉이라
貞觀之末 欲東封이라가 以事而止 高宗 明皇 遂踵行之
終唐之世토록 惟柳宗元 以爲非하고 以韓愈之賢으로도 猶勸憲宗하니 則其餘 無足恠者
嗚呼 禮之失也 久矣 世俗之惑 可勝救哉
胡氏寅曰
自孟子沒 聖學不傳하여 學者 以天人爲二致하여 不能監觀休咎之符하며 凡天事 尙象하여 往往以道遠難知 置於冥漠而不省하니 昧者 無足恠矣
以太宗之明으로 房杜王魏 竝侍左右할새 正旦日食 天變爲大로되 不聞其胥訓告胥敎誨하여 以消陰沴復陽德하고 而群臣獻諂하여 侈蕩上心하여 請登太山하여 明示德意하니 太宗 口雖不允이나 實欲從之하여 至稱功高德厚하여 偃然自足이라
徵雖以空虛勞費爲言이나 若非數州大水 亦未必爲止也
夫大水者 陰氣沴也 日食者 陽氣微也 二者 君象이라 尤當儆懼로되 而不知戒焉하니
豈非以天人爲二致하여 不學不知道之過歟
愚按 文中子曰 封禪 其秦漢之侈心乎인저하니 聖人復起라도 不易斯言矣리라
虞舜之制 五載一巡守하고 成周之盛 六年一時巡하여 肆覲群后하여 大明黜陟하고 望秩山川하니 蓋所以盡報本之誠이요 明命討之公也
豈泥金刻玉하여 告成之謂哉
善乎
厥後 惑於諂佞하여 自背其言이라
爲魏徵計者컨대 惟當援古据經하여 正名定論하여 于以復先王之常禮하고 于以掃秦漢之謬說하면 不亦偉歟
顧以罻羅猶密 倉廩尙虛 執爲未可하니 夫以爲未可行이어든 則必有可行之時也
嗚呼 大道不明하고 禮學無据하여 爲君者 昧於上하고 爲臣者 惑於下하니 不有聖人出焉이면 孰能祛其謬而反諸正乎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짐이 의 직언하는 것을 듣고자 하니 숨김없이 말하시오.
짐의 공로가 높지 않소?”
위징魏徵이 말하였다.
“높습니다.”
이 후하지 않소?”
“후합니다.”
화하華夏(中華)가 평안하지 않소?”
“평안합니다.”
“먼 곳 오랑캐가 추앙하지 않소?”
“추앙합니다.”
“상서로운 일이 생기지 않았소?”
“생겼습니다.”
“해마다 곡식이 풍년을 이루지 않았소?”
“풍년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안 된다고 하시오?”
“폐하께서 이 높으시지만 백성들이 폐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이 후하시지만 혜택이 두루 미치지 않고, 화하華夏가 안정되었지만 봉선제에 이바지하기엔 충분치 못하고注+(제공하다)은 평성平聲이다. 뒤에도 같다., 먼 곳 오랑캐가 추앙하지만 그들의 요구를 이바지하기엔 충분치 못하고, 상서로운 일이 생기지만 법망法網이 여전히 촘촘하고注+(그물)는 음이 이다., 해를 거듭하여 풍년이 들었지만 창고가 아직도 비어 있으니, 이것이 이 절실하게 아직 안 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신이 멀리 비유하여 말할 수 없으니 우선 가까이 사람으로 비유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아파서 제 몸도 지탱하지 못하다가 겨우 치료를 받아 우선 치유는 됐지만 피골만 겨우 남아 있는데, 이내 한 섬 쌀을 지고 하루에 백 리를 가려고 하면 반드시 불가능할 것입니다.
수씨隋氏(隋나라)의 난리가 십 년에 그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그 질병과 고통을 제거하셔서 비록 이미 안정을 찾았지만 그다지 충실하진 못하거늘, 하늘과 땅의 신명에게 완성을 고유告由하는 것에 대해 신은 조심스레 의문이 듭니다.
또 폐하께서 동쪽에서 봉선封禪을 거행할 때注+동봉東封은 동쪽 태산泰山에 봉토하는 것을 말하니, 지금 태안주泰安州에 있다. 수많은 나라들이 다 모여 요복要服황복荒服의 바깥에 있는注+(要服)는 평성平聲이다. 요복要服황복荒服만이蠻夷의 땅이다. 오랑캐들도 모두들 달려오게 됩니다.
지금은 이수伊水낙수洛水 동쪽에서부터 발해渤海태산泰山에 이르기까지注+태산泰山이다. 거친 풀들과 큰 연못이 아득히 천 리에 걸쳐 펼쳐져 있고, 인적이 끊어지고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길이 적막하여 통행이 막혀 있는데, 어찌 저 오랑캐들을 불러들여 허약한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재산을 모두 다 쏟아 상을 준다 하더라도 먼 곳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고注+은 음이 이니, 만족하다는 뜻이다., 햇수를 늘려 부역을 면제시켜준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노고를 보상할 수 없으며, 혹시 홍수와 가뭄, 비바람의 변고를 당하여 용렬한 자들이 사악한 말들을 만들어내게 되면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신만의 진실한 간청이겠습니까.
뭇 사람들의 말이기도 합니다.”
태종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바로 멈추었다注+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정관貞觀 6년 정월에 문무관원들이 봉선封禪을 주청하자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들이 모두 봉선封禪제왕帝王의 성대한 일이라 생각하나 의 생각은 그렇지 않소. 천하가 평안하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면 봉선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있겠소. 옛날 시황始皇은 봉선을 하고 문제文帝는 봉선을 하지 않았지만 후세에 어찌 한 문제의 어짊이 진 시황만 못하다고 하였소. 또 하늘을 섬길 적에 땅을 깨끗이 쓸고 제사지내면 됐지 어찌 굳이 태산泰山 꼭대기에 올라가 몇 자 높이의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든 뒤에야 그 정성과 공경의 마음을 펼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여전히 주청해 마지않자 태종太宗도 따르고 싶었지만 위징魏徵만이 홀로 “안 됩니다.……”라고 했다. 마침 황하黃河 남북南北의 여러 에서 홍수가 발생하여 그 일이 결국 중지되었다..
【集論】孫甫가 말하였다.
봉선封禪에 대한 내용은 경전에 나와 있지 않으니 나라와 나라의 제유諸儒들이 관중管仲을 인용하여 ‘제왕의 성대한 을 나타내는 일 가운데 이 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황始皇 무제武帝가 이를 거행했는데 의식이 화려하고 장대하여 스스로 그 영광이 끝이 없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봉선을 거행하고 나서 재난과 이변이 자주 발생하고 천하에 사고가 많았다.
이것은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게 낭비하고 온화한 기운을 침범한 데서 야기된 것이니 이 의식을 숭상하는 것이 어찌 하늘의 뜻에 맞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의식에 관한 내용이 경전에 나와 있지도 않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사마천司馬遷이 〈봉선서封禪書〉를 지으면서 경전의 문장을 인용했지만 그것은 순수巡守에 대한 의식일 뿐이다.
제왕이 순수巡守를 가서 그 지방의 대표적인 산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나무를 태워 도착했음을 고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하늘에게 공로를 진술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릴 때 공덕으로 백성들을 구제하여 태평을 이루면 하늘이 반드시 영구한 복으로 도와준다.
이에 교사郊祀의 의식만으로도 충분히 그 보답을 표할 수 있는데, 어찌 스스로 그 공로를 고유할 필요가 있겠는가.
태종太宗이 일찍이 ‘하늘을 섬길 때 극진한 존경심을 갖고 땅을 깨끗이 쓸고 제사를 지내면 됐지 어찌 굳이 산에 올라가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으니, 이는 실로 지극한 말이다.”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옛날에 천자天子순수巡守를 나가 그 지방의 대표적인 산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고유하는 제사를 올려 시제柴祭망제望祭 의식을 치렀으니, 이는 하늘을 존경하고 모든 들을 회유하는 것이다.
후세에 를 공부한 학자들이 그 전하는 기록을 잃어버렸는데 아첨을 일삼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어 군주에게 영합하여 봉선封禪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사실 시황始皇 때부터 시작된 것이고 옛날에는 없었던 것이다.
삼대三代에는 봉선을 거행하지 않고도 을 누렸고 나라는 봉선을 거행하고도 망했으니, 삼대三代를 본받지 않고 나라를 본받으면서 태평성대를 거론한다면 이미 잘못된 것이다.
태종太宗이 현명하고 조정에 현자가 많았지만 아첨을 일삼는 자가 오히려 그 논의를 제창하였고, 위징魏徵만이 시대 상황에 알맞지 않다고 했지만 그 일 자체가 잘못됐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 뒤에 안사고顔師古에게 봉선의 의식에 대해 논하고 방현령房玄齡에게 재량하여 확정하게 할 때 위징 역시 참여하였다.
정관貞觀 말기에 동쪽에서 봉선을 행하려 하다가 사고가 발생하여 멈췄지만 고종高宗명황明皇(玄宗)이 결국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나라가 끝날 때까지 유종원柳宗元만이 봉선封禪을 잘못됐다고 하였고 한유韓愈 같은 현자도 헌종憲宗에게 권유했으니 그 나머지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아, 예절을 잃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세속의 미혹됨을 이루 다 구제할 수 있겠는가.”
호인胡寅이 말하였다.
맹자孟子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성학聖學이 전해지지 않아 학자들이 하늘과 사람을 두 가지로 여겨 길흉의 징조를 잘 살피지 못하였으며, 무릇 하늘의 일은 상징을 숭상하여 이따금 이를 알 길이 요원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그윽한 데에 놓아두고서 살피지 않았으니, 어두운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태종太宗 같은 현명한 군주를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왕규王珪위징魏徵이 모두 좌우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정단正旦(정월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발생한 것은 하늘의 변고 가운데 큰 변고인데도 서로 훈계하고 서로 일깨워 의 나쁜 기운을 없애고 을 회복시켰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신하들이 아첨의 말을 올려 임금의 마음을 들뜨게 해서 태산泰山에 올라가 공덕을 밝게 보여줄 것을 요청하자, 태종이 입으로는 윤허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따르고 싶어 하여, 이 높고 이 후하다고 일컬으며 버젓이 스스로 만족하기에 이르렀다.
위징이 비록 공허하게 비용만 허비할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만일 여러 에서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반드시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홍수는 음기陰氣가 기승을 부린 것이고 일식은 양기陽氣가 미약해진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임금의 상징이어서 더욱더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임에도 경계할 줄을 몰랐다.
이것이 어찌 하늘과 사람을 두 가지로 여겨 공부하지 않아 를 알지 못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문중자文中子가 말하기를 “봉선封禪나라와 나라의 호사스런 마음일 것이다.”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이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우순虞舜의 제도는 5년에 한 번 순수巡守하고 성주成周(周나라)의 성대한 시절엔 6년에 한 번 순수巡守하여, 뭇 제후들을 만나보고 상벌을 크게 밝히고 산천山川을 바라보고 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을 다하고 토벌을 명하는 공정함을 밝히는 것이다.
어찌 이금泥金(아교에 갠 금가루 물)과 옥에 새긴 글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하여 성공을 고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훌륭하도다.
태종太宗의 “ 시황始皇봉선封禪을 하고 문제文帝봉선封禪을 하지 않았지만 후세에 어찌 한 문제가 진 시황만 못하다고 하였는가.”라고 한 말이여.
하지만 그 뒤에 아첨꾼들에 현혹되어 스스로 자기의 말을 위배하였다.
위징魏徵을 위하여 헤아려보건대 고사를 인용하고 경전에 의거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논의를 확정하여 선왕先王상례常禮를 복원하고 나라와 나라의 잘못된 설을 말끔히 정리하였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법망이 여전히 촘촘한 것과 창고가 여전히 비어 있는 것을 이유로 들어 아직 안 된다고 고집하였으니, 상황으로 보아 아직 시행해선 안 된다고 하였으면 반드시 시행할 만한 때가 있는 것이다.
아, 대도大道가 밝지 못하고 예학禮學이 근거가 없어 임금은 위에서 혼미하고 신하는 아래에서 현혹되니, 성인聖人이 나오지 않으면 누가 그 오류를 제거하여 정도正道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通鑑 : 《資治通鑑》 권194 唐紀 10 太宗 貞觀 6년에 보인다.
역주2 秦漢諸儒 用管仲說 : 《史記》 〈封禪書〉에 “管仲이 말하기를 ‘옛날에 泰山에 封하고 梁父(보)에 禪한 것이 72家였다.’[管仲曰 古者封泰山禪梁父者 七十二家]”라고 하였다.
역주3 方嶽 : 四方의 山嶽이다. 東嶽은 泰山, 西嶽은 華山, 南嶽은 霍山(또는 衡山), 北嶽은 恒山이다.
역주4 郊祀 : 郊外에서 天地에 지내는 제사이다. 南郊에서 天에 제사하고, 北郊에서 地에 제사하였다.
역주5 柴望 : 두 가지 제사로, 柴는 나무를 태워 天에 제사하는 것이고, 望은 國中의 山川을 바라보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역주6 升中 : 帝王이 하늘에 제사하고 成功을 고하는 일이다. 升은 上의 뜻이고 中은 成의 뜻으로, 뒤에는 널리 祭天을 가리킨다. 《禮記 禮器》
역주7 秦始皇……豈以文帝不及始皇耶 : 《資治通鑑》 권194 唐紀 10 太宗 貞觀 6년에 보인다.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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